211화.
게다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무림맹 고수들이 뇌옥의 경계를 소홀하게 할 리가 없었다.
그런 뇌옥의 경계를 소홀하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을 꺼낸 것은 방도가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림맹의 요인을 암살하는 것이오.”
“요인이라시면… 설마!”
“그렇소. 신산(神算) 제갈윤호의 죽음이라면 무림맹도 뇌옥에만 신경을 쓰긴 어려울 것이외다.”
가장 좋은 것은 무림맹주인 백의무제(白衣武帝) 백무강의 암살이었다.
하지만 화경고수인 그의 암살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살왕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몰라도 혈살객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선책이 바로 무림맹 총군사인 제갈윤호의 죽음이었다.
“혈검살객이 이끄는 혈살객이 제일 많다고 하지만 두 임무를 모두 감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대호법님.”
“신산의 암살은 다른 사람이 맡으면 되지 않소? 내 듣기로 혈살객 중에서도 반골들만 모아둔 곳이 있다고 하던데…….”
대호법의 물음에 대군사의 눈이 커졌다.
혁련중광이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깨달아서였다.
“산서에 나가 있는 혈우살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호법님? 그들은 고작 다섯입니다. 무림맹의 심처인 신산각에서 그를 암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설사 성공한다고 한들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반골들인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오?”
주인을 따르지 않는 개는 언제 주인을 물지 모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가치 있게 써먹는 것이 낫다.
신산 제갈윤호를 암살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뇌옥에 대한 시선이 분산될 것이다.
다만 그들을 양성하기 위해 들인 17년이란 시간과 막대한 재물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대군사는 부천주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호법의 제안을 부천주가 동의하자 더 이상은 반대할 수 없었다.
“모두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산서와 안휘 비밀안가에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그렇게 혈우살객을 포함한 반골들을 미끼로 사용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때 대호법이 나직하게 말했다.
“…부천주께서 허락하신다면 한 가지 제안이 있소이다.”
“말씀해보시오. 대호법.”
“그건… 바로…….”
* * *
“혈살객이 움직이려면 몇 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가장에 돌아온 이현성은 당황스러웠다.
장원이 또다시 습격받았다는 사실은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그들의 정체였다.
이현성은 그들이 혈살객임을 알아차렸다.
회귀 전에는 지금보다 수년 후에나 그들이 움직였다.
물론 이미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화했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귀림 덕분에 장원은 생각보다 피해가 크진 않았으나… 다른 이들은 다를 터인데…….”
혈살객은 무림 백대고수 혹은 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존재를 암살하기 위해서 양성되었다.
그런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면 무림의 수많은 기인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혈천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들의 행보를 방해할 자들을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다.
천하에 그들의 존재를 밝히자니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고, 침묵하자니 혈살객의 행보가 걱정되었다.
“처조부님을 한번 뵈어야 하나…….”
혈천 그리고 혈살객의 일은 자신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으로선 무림맹의 총군사인 제갈윤호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허나 무림맹이 움직여도 곤란한 점이 있었다.
“…분명 녀석들도 나왔을 텐데… 하…….”
그는 자신의 의제들이 혈살동에서 살아남았을 거란 사실을 굳게 믿었다.
혈살객이 되었다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혈천 밖으로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회귀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맡은 임무는 대부분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 그런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 혈천이 혈살객을 양성한 것이다.
막대한 지원과 지옥과 같은 수련을 통해서 양성된 혈살객이었기에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완수해냈다.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수행한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죽음을 맞이한 자들도 많았다.
그렇게 위협적인 혈살객은 혈천의 비수로써 수많은 기인을 제거했다.
허나 그들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임무 완수는커녕 생존확률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현성은 딱히 혈살객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들의 일원인 의제들까지 위험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 안 되겠어. 우선 녀석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혈천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도 싫지만, 의제들의 안위는 그 이상으로 중요했다.
이가장을 습격한 것처럼 혈살객들이 이미 중원에 나왔다면 각 성에 위치한 비밀안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혈천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준비한 비밀안가가 한두 곳이 아니란 점이었다.
각 성마다 몇 개씩 존재할 정도로 많았다.
그런 비밀안가 중 자신의 의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이현성 본인도 모든 비밀안가를 알지는 못했다.
“나 혼자 다 뒤질 수도 없고… 하… 귀림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겠어.”
예전이었다면 혈천의 비밀안가를 은밀하게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이 이현성 본인을 제외하고 암월뿐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이가장에는 고수들이 여럿 있었으나 이 일은 무위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삼대 살종이었던 귀림이 함께하게 되었다.
귀림의 특급살수급 호위들은 결코 혈살객의 아래가 아닌 만큼 그들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기로 결단은 내린 이현성은 귀림주인 야래향을 찾아갔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괜찮겠소? 매우 위험한 임무요.”
이현성의 장황한 설명에도 야래향은 너무도 쉽게 수락했다. 덕분에 오히려 그가 더 당황해서 되물을 정도였다.
야래향이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임무이지 않나요?”
“그렇긴…하오만…….”
오히려 걱정해주는 이현성을 보며 야래향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을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이라면 본림 만한 적격자를 찾기 어렵지요. 위치를 말씀해주시면 본림의 특급살수…가 아닌 이젠 특급호위들을 파견할게요.”
“고맙소, 림주.”
“아니에요.”
“단, 조사만할 뿐 그들과 충돌은 하지 마시오. 쓸데없는 피를 볼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이현성은 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한 후 돌아갔다.
그가 떠난 후 귀백이 들어왔다.
그런 그에게 야래향은 이현성이 부탁한 일을 설명했다.
혈천 그리고 혈살객에 대해서 듣게 된 귀백은 놀라워했다.
“허… 그런 세력이 있었단 말입니까? 안 그대로 그 지독한 놈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하던 차였는데…….”
“저도 많이 놀랐어요.”
일전에 이가장을 습격한 혈살객들은 앞서 도착한 귀림의 호위들에 의해서 전멸했다.
그들의 배후를 파기 위해서 제압하려고 했으나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지독한지 동귀어진도 불사할 정도였다.
물론 귀백과 구연청까지 나서자 극명한 실력 차이로 몇몇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허나 금제가 되어 있었는지 바로 죽음을 맞이했다.
절대살수인 귀백이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금제였다. 덕분에 귀백조차 치를 떨었는데, 그런 거대한 배후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장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조사만이라고 하지만 그런 위험한 자라면 귀혼들로도 버거울 수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귀령을 주축으로 움직여야겠지요.”
같은 특급살수의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귀혼과 귀령은 격차가 크다.
살수의 가치는 본인의 무위가 아닌 암살할 수 있는 대상의 수준으로 분류된다.
특급살수란 절정고수도 홀로 암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였다.
귀혼은 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절정고수를 암살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귀령은 살법만이 아니라 무위 역시 절정지경에 오른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혈살객을 암살하는 임무가 아닌 그들이 숨어 있을 거라 추정되는 비밀안가의 조사라지만 귀혼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다.
귀령을 필두로 귀혼들의 보조를 받아야 실패를 줄일 수 있고, 설사 충돌한다고 해도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이가장의 식구가 된 본림의 첫 번째 임무인 만큼 제가 직접 지휘할 테니, 귀왕께선 장원에 안착하는데 집중하십시오.”
“직접 지휘하시겠다고요?”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니, 귀왕께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어요. 잘 부탁해요. 할아버지.”
귀왕과 귀백의 사이였지만, 사적으로 조손지간이나 마찬가지다. 귀백이 전대 귀왕의 사제였기 때문이다.
귀백은 그런 그녀에겐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둘러댔으니 속내는 조금 달랐다.
‘느낌이 좋지 않아…….’
* * *
이현성과 동행했던 한승과 그를 호위했던 주작당 고수들이 무림맹 총단으로 복귀했다.
정확히는 석가장에서 제압한 혁련세가와 혼세교의 잔당을 호송하기 위함이었다. 혁련용후와 우사의 단전을 막아뒀다고 하지만 명색이 초절정고수들이었다.
마냥 안심할 수는 없기에 초절정고수인 한승이 그들의 호송을 직접 맡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무림맹 총단에서 온 고수들이 중간에 합류한 덕분에 이렇다 할 습격 없이 총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떠날 생각이오, 한 호법.”
“…죄송합니다. 총군사님.”
“허…….”
제갈윤호는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었다. 한승과 이현영 간의 비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림맹으로서는 한 명의 고수가 더 필요했다.
그리고 총군사인 제갈윤호는 자신의 뜻에 따라서 움직여줄 고수를 원했다.
천검(天劍) 한승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고수였다. 그렇기에 무척이나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제갈윤호로서는 아쉽기만 했다.
“호법 위를 거두진 않겠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면 꼭 돌아오시오.”
“감사…합니다. 총군사님.”
끝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 총군사 제갈윤호가 고맙기만 했다. 총군사의 직권으로 자신을 막는다면 무림맹의 호법위를 받은 이상 마음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허락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호법위를 그대로 둠으로써 돌아올 수 있는 길까지 남겨주었다.
이렇게까지 배려해주니 그녀에게 용서를 받게 된다면 천하를 위해 그리고 무림맹을 위해서 앞장서겠단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 호법 나와 한잔 하십시다. 또 언제 볼지 모르니…….”
“그러시지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한승의 입장에서도 자신을 이렇게까지 챙겨준 제갈윤호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막 총단 밖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초―옹군사―님!!”
“음? 무슨 일이지?”
멀리서 누군가 제갈윤호를 부르며 달려왔다.
무림맹 총단에서 활동하는 인물만 수천이었기에 그들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제갈윤호는 자신을 부르는 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맹주전 소속의 무인이었다.
신산각만큼이나 자주 방문하는 맹주전이기에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