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암천회의 부활 역시 이현성이 원치 않는다면 자신 역시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단호한 이현성의 대답에 귀백은 안도하는 동시에 약간의 실망감도 있었다.
“그것을 묻기 위해서 두 분이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현성과 암천회의 관계.
그리고 암천회의 부활 여부 역시 중요하지만, 그들이 그를 만나러 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순간 야래향과 귀백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귀림은 은공 아니, 주군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갑작스러운 야래향의 폭탄선언에 이현성은 당황했다.
그녀만의 충동적인 결정이 아닌지, 귀백 역시 부복한 채로 이현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현성은 그들을 일으켰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게 충성을 맹세하다니요?”
“말 그대로예요. 저희는 이세암천이신 이현성님을 모시고 싶어요.”
“귀왕만의… 야 소저만의 생각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세암천이시여. 모두의 생각입니다.”
귀림의 생사여탈권을 쥔 귀왕의 결정을 거부할 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은 그녀의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귀림의 미래가 걸린 일인 만큼 그녀는 귀백은 물론 귀노들과 특급살수인 귀림팔령과 귀림이십사혼을 긴급 소집했다.
귀림의 뿌리인 암천회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물론 이세암천인 이현성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신위 등을 밝혔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그들이었지만, 귀왕이 자신들을 소집한 이유를 깨닫곤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굳이 이런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까? 야 소저께선 아시겠지만, 살왕의 죽음과 함께 살막은 사실상 멸문되었습니다. 유령곡 역시 유령왕이 건재하다고 하지만 세가 상당히 줄었고요. 지금이라면 귀림이 살문으로서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지금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모르겠군요.”
오히려 이현성이 왜 자신을 따르려 하느냐고 설득을 했다.
자신이 암천회주의 진전을 이었다고 해서 귀림에게 복속을 강요한 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허나 야래향의 눈빛은 확고했다.
“진짜 하늘을 봤기 때문이에요. 그간 우리가, 그리고 제가 얼마나 좁은 하늘만 봤는지 깨달았어요. 부디 저희를 거둬주세요.”
“…….”
귀림은 삼대 살종 중 하나였다.
비록 전대 귀왕인 조부의 타계로 주춤했으나 언젠가 삼대 살종에 걸맞은 귀림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수년 사이 귀림은 전력을 상당히 회복했다.
하지만 유령곡과 살막을 보며 자신들이 얼마나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점점 성장했던 그들과 달리 자신들 귀림은 점점 퇴보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흔들린다고 해서 귀림의 입지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성장을 하지 않는 한 귀림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에 그녀와 귀림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내 곁이 더 위험할 수도 있소. 내가 가야할 길이 더 험난할 수 있으니…….”
“각오하고 있습니다. 주군.”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할 거요.”
“어떤 결정을 내리든 후회는 하겠지요. 하지만 오늘 이대로 그냥 돌아갔을 때에 대한 후회는 평생을 두고 할 것 같습니다. 주군.”
이현성은 그녀를 지긋이 바라봤다.
단호한 야래향의 눈빛에서 그녀의 진심을 느꼈다.
“살문으로서 귀림이 사라질 수도 있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살종 귀림은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귀림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더욱 날의 예기를 세우려는 것뿐이었다.
“환영하오. 귀왕 그리고 귀림을…….”
“아…! 속하 귀왕, 주군을 뵙습니다.”
“노신, 귀백이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고수의 부족으로 고민하던 이현성에게 단비처럼 나타난 그들이었다. 그렇게 이가장은 양(陽)으로는 물론 음(陰)으로도 역시 더욱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 부가(富家)의 몰락
“어이가 없구려. 본천의 십삼세 중 둘이 나섰는데, 이게 무슨 꼴이오?”
황실의 일은 혈천에게도 무척이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협력관계인 태태감의 요청에 따라서 마지못해 유령곡과 하북성을 담당하는 석가장을 지원해주었다.
당연히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힘을 숨기고 있을 뿐, 혈천십삼세 하나하나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혈천십삼세의 두 세력이나 지원을 나갔음에도 도리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천하일통을 꿈꾸는 혈천으로서는 너무도 어이가 없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대호법님의 집안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않소?”
“지금 뭐라고 하셨소. 대장로님. 그러는 귀교 역시 수년 전에…….”
혈천의 대호법인 혁련중광은 분위기를 주도할 생각인지, 이번 사태를 짚고 넘어갔다.
그런 꼴을 볼 생각이 없는지 대장로가 수개월 전에 있었던 혁련세가의 일을 지적했다.
이를 참고 넘어갈 혁련중광이 아니었다.
그 역시 대장로의 치부인 수년 전 산동에서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혈천의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들답지 않은 무척이나 지저분한 언쟁이 아닐 수 없었다.
쾅!
“지금 우리끼리 싸우자는 자리는 아니지 않소? 대장로, 대호법.”
“으음… 맞습니다. 부천주님.”
대장로, 대호법 역시 혈천이 자랑하는 화경고수들이었다.
허나 부천주가 괜히 혈천의 이인자가 아니다.
세력은 물론 신위(神威) 역시 그 자리에 걸맞았기에 가능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도 언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부천주와 견줄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부천주는 대군사 문인윤걸을 바라보았다.
“유령곡과 석가장의 상태는 어떻소. 대군사.”
“유령곡의 부곡주인 유령살군과 정예살수들을 잃긴 했으나 곡주인 유령왕이 건재하고, 유령곡의 전력도 상당히 존재합니다만…….”
전력이 상당히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령곡이 몰락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살왕이 죽은 이상 현시점 최고의 살수라고 할 수 있는 유령왕이 건재하지 않던가.
그에 반해 석가장은 처참하였다.
“석가장은 초절정고수인 석 호법과 그의 비밀호위 현무의 부재, 삼당 중 밀당이 전멸했습니다. 두 개의 당이 남아 있으나 명령권자가 사라진 지금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명령권자야 새로 만들면 되지. 새 가주는 어찌 되었나?”
놀랍게도 대군사는 현무는 물론 삼당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석대환이 철저히 숨겼으나 그의 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석가장은 유령곡과 달리 초절정고수가 전멸한 상황이었다.
허나 그들의 진정한 힘은 무력이 아닌 금력이었다.
그렇기에 초절정고수들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석가장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석가장은 가주 자리를 두고 소가주와 대장로의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으음… 대군사가 보기에 누가 가주가 되는 것이 본천에 유리하겠는가?”
“경험 많고 노련한 대장로보다는 아직 혈기왕성한 소가주가 이용하기 좋습니다만…….”
“다만?”
정통성을 갖춘 소가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로와 분쟁이 일어난 것은 석가장과 같은 거대한 가문을 다스리기에 소가주가 연륜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만큼 대장로는 경험과 영향력 등 다방면에서 소가주보다 낫다.
그렇다보니 실제로 승기는 대장로 쪽으로 기울려고 했다.
이런 때 소가주를 도와주면 이용하기가 더 용이해진다.
“음흉한 성격이 제 애비를 빼닮아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겠습니다.”
“상가(商家) 놈들이 음흉한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그리고 그런 망둥이 하나 제어 못 할 본천도 아니고…….”
아무리 석가장이 대단해도 그들의 눈에는 천한 상인들로 보일 뿐이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차별이 석대환을 더욱 삐뚤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부천주는 혁련중광을 바라봤다.
“대호법, 귀가가 석가장의 소가주를 지원하는 것이 어떻소?”
“부천주께선 소가주를 본천의 새 호법으로 세우실 생각입니까?”
부천주는 대호법의 물음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이번에는 대장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장로는 석가장의 대장로를 도와주시구려.”
“설마… 그 말씀은…….”
부천주의 지시에 대장로 대신 대군사 문인윤걸이 입을 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좌중 역시 부천주의 뜻을 눈치챘는지 눈이 커졌다.
그런 그들을 보며 부천주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모두의 생각대로일세. 더 이상 석가장을 본천의 십삼세로 둘 필요가 없지 않는가. 본천이 필요한 것은 석가장의 금력인데… 대장로, 대호법께서 그 두 사람을 이용해 석가장의 금력을 본천에 귀속해보시오. 가능하겠소?”
“그게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흐흐흐… 재밌구려.”
천하제일부가(天下第一富家) 석가장.
금력이 검이라면 석가장은 천하를 벨 수 있는 신검이었다. 그런 석가장이건만 지금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건… 그렇고… 신검 애송이가 살왕을 벴다니… 놀랍군. 화경고수를 벴다는 말은 설마 애송이가 벌써 화경에 올랐단 뜻인가?”
“첩보에 의하면 석 호법이 흡정마공을 운용했다가 도리어 흡수당했다고 합니다. 그게 이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 저희의 판단입니다.”
“허허… 석 호법, 그 머저리가 끝까지 귀찮게 만드는군.”
문가장의 밖에서 벌어진 전투였기에 그 광경을 지켜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알지 못했다.
허나 그 흔적을 되짚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진 지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혈천의 머리인 대군사 문인윤걸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본천의 호법이었는데, 복수를 해주지 않을 수도 없고… 누가 좋겠는가?”
“그를 직접 제거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 같습니다.”
명색이 살왕을 벤 화경고수였다.
그를 응징하기 위해선 최소한 화경고수를 보내야 했다.
아무리 혈천이라도 화경고수가 넘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장로와 대호법에겐 조금 전 석가장의 귀속을 지시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현성까지 맡길 순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부천주뿐인데, 감히 그를 움직이게 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대군사는 시기상조라는 말로 부천주의 물음에 반대를 표했다.
대군사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부천주는 피식거렸다.
“하긴 화경고수를 줄여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칫 대계가 흔들릴 수도 있지. 좋네. 허나 그냥 넘길 순 없지.”
“그러시다면 경고만 하시지요.”
“경고? 자세히 말해보게나.”
“혈살객이 각 비밀지부로 이동 중입니다. 부천주님.”
대군사의 대답에 부천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쁘지 않군.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네.”
“다른 계획이 있으십니까? 부천주님.”
부천주는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나직하게 말했다.
“있지. 애송이놈과 빈자리를 채울 계획이…….”
* * *
“크윽!”
“으아악!”
“사, 살려…….”
수백의 사람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그들은 평범한 양민도, 그렇다고 무림인도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