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그때 살왕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네놈 누구냐.”
“…머리가 나쁘군. 분명 내 신분을 밝혔거늘…….”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닐 텐데…? 삼종의 후예인가.”
살왕은 완벽하게 짚지는 못했으나 제법 좋은 접근을 해왔다.
살수천자까지는 아니었지만, 암천회 사대호법까지 짚었으니까.
“귀왕인에 목매는 멍청한 귀림은 아닐 테고, 겁쟁이 유령곡? 아니야. 네놈에게선 유령곡의 냄새가 나지 않아… 설…마… 암월의 후예인가! 그러고 보니 이가장에 암월의 후예로 추정되는 자가 있단 말을 듣긴 했는데…….”
살왕은 이현성을 암월의 후예로 착각했다.
허나 충분히 착각할 만했다.
사대호법 중 검을 계승한 자는 암월이며, 삼대 살종과 달리 오랫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
이현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현성의 침묵이 그의 오해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지. 암월의 후예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흐흐흐… 좋군. 좋아!”
뭐가 좋은지 살왕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암천회 사대호법의 수좌인 살백. 하지만 그와 견줄 수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암월이었다.
사대호법이라고 해서 실력이 동일하진 않았다.
살수천자가 괜히 필살의 암기인 귀왕과 유령을 초대 귀와 령에게 하사한 것이 아니었다.
월과 살에 비해 모자란 실력을 채워주고 싶기 때문이다. 살수천자의 그림자로서 나서기 좋아하지 않았으나 암월의 실력은 살백과 견줄 만했다.
“흐흐흐. 네놈을 죽여서 본 왕이 진정한 살수제왕임을 증명하겠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쾅! 콰쾅! 쾅! 쾅!
도대체 얼마나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기세가 줄기는커녕 더욱 강렬해졌다.
그로 인해 그들의 싸움은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갔다.
살왕의 칼에 심상치 않은 기세로 기운이 몰렸다.
그리곤 고리의 형태를 이루었다.
살왕의 눈에선 광기가 번들거렸다.
“시조께서 틀을 세우시고, 대를 거쳐서 완성한… 멸천(滅天)을 보여주마!”
“헉! 천중비화, 혼원주천!”
살수천자를 동경하며 홀로서기를 한 살왕의 정수가 담긴, 멸천.
그야말로 파천황(破天荒)적인 위력이 담겨 있었다.
이현성은 전력을 다해서 천중비화와 혼원주천을 펼쳤다.
절대방어를 자랑하는 검술이었지만,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쿠웅―콰―콰콰쾅―앙!!!
멸천.
하늘을 없앤다는 이름처럼 그 위력은 가공하기 그지없었다. 후폭풍으로 인해 일어난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자 모두의 눈앞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그만큼 가공한 위력이었다.
“주…군… 주군!”
암월은 눈을 부릅뜬 채로 이현성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군가. 이세암천.
24대에 걸쳐서 기다려 온 암월의 주군.
그런 그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사대호법인 살백의 후예에 의해서.
암월의 눈이 뒤집어졌다.
“이―노옴!!”
“으… 이젠 개나 소나 날뛰는군!”
멸천은 그 가공한 위력만큼 내공 소모도 극심한 절기였다. 그런 만큼 살왕 역시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거대한 폭발의 중심에 있던 살왕 역시 온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는 화경에 오른 초인이었다.
이성을 잃은 암월이 그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챙! 채챙! 채채챙!!
“제법…….”
“닥쳐!!”
눈이 뒤집어진 암월의 검은 섬뜩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살왕을 섬뜩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암월의 검은 누군가를 지킬 때, 가장 빛이 난다.
하지만 분노에 눈이 뒤집어진 그의 검은 암월의 검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통하겠지만, 살왕은 결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었다.
퍽!
“크윽!”
“미친개에겐 매가 약이겠지?”
과연 살왕이었다. 잠시 주춤거린 듯싶었으나 이내 살왕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살왕의 무차별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암월은 반격은커녕 방어하는 데만도 급급했다.
칼을 휘두르는 살왕의 눈빛에 살기가 엿보였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출(出)!”
채―앵!
갑작스러운 암습에 살왕은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러서 막아냈다. 하지만 칼을 통해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에 살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암월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냐!”
“회(回)!”
살왕을 긴장시킨 암기의 주인은 놀랍게도 상당히 젊은 여인이었다. 놀라는 것도 잠시, 그는 암기의 정체를 눈치챘다. 동시에 여인의 정체까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귀…왕인? 귀왕에게 발견되지 않은 귀왕인이 네년에게 있을 줄이야.”
“서, 설마!”
그 한마디로 야래향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전대 귀왕인 조부의 죽음에 살왕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절대살수이자, 귀왕인의 주인인 조부의 죽음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흥분한 그녀는 바로 살왕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 순간 야래향을 막은 자가 있었다.
“귀왕, 자네의 실력으로 어쩔 수 있는 자가 아닐세.”
“암월 님! 하지만…….”
“음? 암월이라고? 네가? …그럼 아까 그놈은 뭐야?”
이현성을 암월의 후예라고 생각했던 살왕으로서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암월은 이를 갈았다.
“그분은… 암천의 주인, 이세암천이시다!”
“뭐?”
“예?”
전혀 예상치 못한 암월의 폭탄선언에 살왕은 물론 야래향까지 깜짝 놀랐다. 특히 최근에야 암천회의 존재를 알게 된 야래향으로서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그…분…께서 이세암천이시라고요?
“그렇소. 귀왕.”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쿡쿡쿡…! 하하하하!! 이세암천이라… 언제 적 망령인가. 그리고 이세암천을 벤 나야말로 진정한 살수제왕이 아닌가! 하하하하!!”
살왕의 비아냥거림에 암월은 울컥했다.
“네노옴!”
“대협, 저희가 돕겠습니다.”
살왕에게 입은 부상으로 주춤했던 주가려와 구룡검의 맹약자들이 합류했다.
그들 중 어느 한명 멀쩡하지 않았다.
하지만 멀쩡하지 않은 것은 살왕도 마찬가지였기에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크크크…! 감히 나 살왕이 만만해 보이더냐!”
“우윽!”
“아직도… 저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허세인지 아니면 화경고수는 다른 것인지, 살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제법 범상치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물러날 그들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그는… 살왕은 내 몫이니… 모두 물러나 주셨으면 좋겠소.”
“주…군!!”
“이 대협!”
누군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놀랍게도 조금 전 살왕의 멸천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던 이현성이었다.
그의 등장에 좌중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살왕의 반응이 제일 격했다.
“네…놈 살아 있었더냐!”
“살왕은 제가 상대할 테니, 마마께선 폐하께 가보시지요.”
“그, 그렇게 할게요.”
주가려도 건청궁 안이 걱정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림군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상대가 살종이라는 살막이었다. 결코 방심해선 안 되는 상대였다.
그렇게 주가려와 생존한 맹약자들이 건청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암월과 귀왕은 이 싸움을 봐야 하기에 자리를 지켰다.
“운 좋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운? 살수의 입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
살수는 인내하는 자이며, 준비하는 자였다.
때를 기다리며 완벽한 준비를 통해서 목적을 이루는 존재였다. 그런 살수가 운에 의지한다는 것은 목숨을 두고 도박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현성의 비웃음에 살왕의 눈빛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건방진 놈, 네가 암천의 주인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과연… 없을까.”
* * *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여긴 또 어디고?”
눈을 뜬 이현성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칠흑과 같이 어두울 뿐이었다.
그러나 진정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우―웅―
무언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놀랍게도 검이었다.
검명(劍鳴)에 정신을 차린 그는 검을 꽉 쥐었다.
순간 칠흑과 같은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고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으윽!”
점점 강해진 빛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보름달이 밝게 뜬 밤, 정상에 선 한 사람을 향해 수십여 명이 달려들었다. 하나 같이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그들이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어둠이 갈라지며 사내에게 달려들었던 수십여 명은 그대로 쓰러졌다.
허나 사내를 향한 위협은 멈추지 않았다. 사내를 향해 하늘에서 수백의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사내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꽃잎이 휘날리더니 수백의 화살 비를 모두 튕겨냈다.
‘서, 설마…….’
당황한 수백의 궁수들은 다시 시위를 당겼지만, 화살을 쏘지는 못했다.
사내의 손에서 벗어난 검이 그들을 절명시켰다.
사내가 펼친 검술을 지켜보던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아, 암천살무! 어, 어떻게!’
그렇다. 사내가 펼친 검술은 바로 암천살무였다.
암천검을 소유했던 자는 여러 번 바뀌었으나 암천검의 진정한 주인으로 암천살무를 익힌 자는 이세암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현성뿐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사내가 암천살무를 펼쳤다는 것은 사내가 바로 암천의 원주인인 살수천자란 뜻이었다.
그는 시산혈해를 이룬 대지를 내려왔다.
그리곤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술이라기보단 검무(劍舞)에 가까웠다.
섬뜩하거나 강렬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거스름이 없으면서 매우 자연스러운 검무였다.
도저히 살수의 검으로 보이지 않았다. 암천살무라는 위험한 절학을 창안한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다. 갑자기 그의 검이 이를 숨죽여 지켜보던 이현성에게 향했다.
순간 이현성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 역시 희미하게 들려왔다.
“심즉살 심즉생(心卽殺 心卽生)… 암…천…….”
* * *
“큭…! 뭐야! 도대체 뭐냐고!”
살왕은 기겁했다.
죽다 살아난 주제에 이현성의 검세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검을 막는데 급급한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공이 더욱 심후해진 것도 아니고, 검초가 더욱 고절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당할 살왕이 아니었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멸극!”
마음이 불안한지 살왕은 위력만큼이나 내공 소모가 큰 멸극을 펼쳤다. 멸천을 완성하기 전까지 살왕 최강의 도법인 멸극을 펼친 것이다.
허나 그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현성의 검에 의해서 멸극이 자연스럽게 흘려졌다.
“나의 존재를 지우고, 적을 잠재울 수 있는 삼푼의 힘만 있으면 되거늘…….”
“이이익!!”
이현성의 충고가 살왕에게 조롱으로 들렸는지 그는 이성을 잃었다. 강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셈이었다.
살왕의 도법은 최강이었다. 그 어떤 강자도 그의 표적인 된다면 반드시 목숨을 잃었다.
허나 점점 강력해진 살왕의 도법은 언제부터인지 살수의 칼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