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암천 대 살왕
“죄송합니다. 주군. 신(臣)이 부족해서 유령왕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현성을 대하는 암월의 태도가 바뀌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화경에 오른 그는 이세암천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니까.
“실망하지 마시오, 암월 호법. 또 기회가 있을 게요.”
“주군, 말씀을 내려주십시오.”
완전히 태도가 바뀐 암월을 보며 당황스러웠으나 이현성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알겠네. 그만 일어나게.”
“예 주군.”
문가장을 습격했던 유령곡의 살수들은 대부분 죽거나 제압되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금의위를 본 유령왕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도주하고 말았다.
유령곡의 살수들은 그를 따라 도주했으나 실제로 도주에 성공한 자는 스물을 넘지 못했다.
그 외에 제압된 유령살수들에 대한 처분은 금의위에게 맡겼다.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 이현성은 문종학과 제갈윤호에게 갔다.
“장인어른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갈 어르신 덕분에 무사했네. 자넨 괜찮은가?”
“예.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장조부 어른 감사합니다.”
“아니다. 문 대인과 우리가 어디 남인가.”
안타깝게도 축하객 중에서도 제법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대부분이 고관의 호위들이었지만, 고관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적지 않았다.
물론 무림명숙들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방심했고, 유령곡은 강했다.
“그런데… 자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
눈치가 빠른 제갈윤호는 이현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허나 자신의 생각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치부하며 설마 하는 마음으로 운을 뗐다.
그런 그의 물음에 이현성은 부정하지 않았다.
덕분에 운을 뗐던 제갈윤호가 오히려 기겁했다.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 셈이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정말… 하하! 축하하네!”
“감사… 음?”
화경에 오른 이현성의 기감을 속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의 기감에 걸린 자는 분명 유령곡의 살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사로운 자도 아니었다.
“장조부 어른, 장인어른. 손님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아, 알겠네. 가보게나.”
이현성은 그들을 뒤로 한 채 급하게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현성을 보곤 군례를 취했다.
“이 대협, 마마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그러시군요.”
“마마께서 대협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시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나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이 일어난 듯싶었다.
‘설마했는데… 젠장.’
고위관리들과 무림명숙들이 한자리에 모인 문가장이 습격을 당했다.
남들에게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습격이었지만, 이현성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혈천십삼세인 유령곡과 석가장.
그들이 느닷없이 문가장을 습격했다.
이현성은 그것이 시선을 돌리기 위함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게 아니라면 일을 이렇게 화려하게 벌일 이유가 없었다.
‘황실의 일에는 얽매이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지.’
주가려와의 약속도 있었고, 그녀의 도움을 받았기에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혈천이 원하는 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앞장서시오.”
“감사합니다! 대협!”
“…두 사람은 어쩔 생각이오?”
이현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신은 주군의 그림자입니다.”
“…야 소저께선…….”
이현성이 지칭한 두 사람은 암월만이 아니었다.
돌아간 줄 알았던 당대 귀왕인 야래향 역시 지척에 있었다.
그녀는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은공께서… 허락…하신다면 동행하고 싶어요.”
“…좋소.”
암월을 통해서 귀왕과 암천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나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암천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단체이니 자신이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다 여겼다.
그런데 야래향은 무슨 생각인지 따라오겠단 의사를 밝혔다.
이현성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이세암천으로서 그가 확실하게 정리할 일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이현성은 암월과 귀왕만 이끌고 황실로 향했다.
* * *
“빈도…가 꿈을 꾸는 것이오?”
“아니외다. 빈도 역시 보고 있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구룡검의 맹약자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만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챙! 채챙!!
두 마리의 용이 하늘을 노니며 격돌했다.
허나 그건 용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두 자루의 도검(刀劍)이었다.
이기어검(以氣御劍)과 이기어도(以氣御刀).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이 대협… 당신은 도대체…….’
놀라기는 주가려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이현성에게 도움을 청한 그녀였지만 그가 한 손 거들어주길 바랐지 이 정도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은 그를 위한 말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의 강함은 주가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경이라니… 이건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허나 이 상황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자는 그녀가 아닌 바로 살왕이었다.
‘미친!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거야? 젠장. 역시 황실이란 말이지.’
살왕에게서는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여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손자뻘로 보이는 어린 청년이 자신에 비견되는 신위를 발휘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직접 겪고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여유를 부릴 수 있겠는가.
까딱하면 본인이 당할 수 있다.
허공을 노니며 격돌하던 두자루의 도검이 주인들에게 돌아갔다.
“어이없군. 황실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거늘…….”
“…….”
살왕의 말에 이현성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도객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도왕 조부님을 제외하고 화경에 오른 도객이라면… 사망도제?’
화경고수 중 칼을 다루는 자는 대표적으로 두 사람이 있었다.
하북팽가의 도왕과 사해련의 사망도제.
하지만 도왕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망도제일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하지만… 알려진 사망도제의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니다.’
사망도제는 오제(五帝)의 일인, 이제 막 화경에 오른 이현성이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때 머릿속에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설마… 살왕!”
“호― 본 왕을 이제야 알아본 건가?”
분명 팔왕이자 칠사의 한 사람인 살왕이 맞았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화경에 올랐다는 것에는 회의적인 의견에 대부분이었고, 이현성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정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삼대 살종 중 최강이라더니… 정말 화경에 올랐단 말이구나.’
귀림의 당대 귀왕은 물론 유령곡의 유령왕조차 화경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살막의 살왕은 그 한계를 넘어서 화경에 올랐다.
만약 이현성이 화경에 오르지 못했다면 살수의 제왕 자리를 그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었다.
“내 정체를 알았다면, 네 정체도 밝혀야 하지 않겠나?”
“…이가의 현성이라고 하오.”
“이현성…? 신검? 네가 신검이라는 애송이란 말인가!”
애송이라는 말에 불쾌했으나 그렇다고 화를 내진 않았다.
분기로 인해 심기가 흐트러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에 반해 살왕은 무척이나 놀랐다.
설마 눈앞의 괴물이 황실의 비밀고수도 아니라 무림인일 줄은 몰랐다.
더구나 반노환동(返老還童)한 노괴물이 아닌 실제로 어린 청년이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어이없군.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지.”
이현성의 존재가 의외였으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죽이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이현성과 살왕의 이차전이 시작되었다.
“대…단하시군요…….”
귀왕 야래향은 쉽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은공인 이현성의 신위는 그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초절정지경에조차 오르지 못한 그녀에게 화경고수들의 격돌은 천외천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무림원로라고 할 수 있는 구룡검의 맹약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달랐다.
‘살백… 넘어섰단 말인가.’
암월(暗月), 귀왕(鬼王), 유령(幽靈) 그리고 살백(殺伯).
암천회의 사대호법이자 살수천자의 심복들이었다.
살수천자의 사후 암천회는 자연스럽게 붕괴되었고, 사대호법 역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암천회의 수많은 후예가 사라진 지금에도 사대호법의 후예들만은 이어져왔다.
이세암천을 기다렸던 암월과 달리 나머지 세 호법들은 과거를 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다.
귀왕은 암천회를 부정하진 않았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령왕은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사대호법의 최고라는 살백.
그는 이미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살왕이 되었다.
그런 그가 지금 초대 살백의 경지를 넘어섰다.
‘암월아…! 어리석구나. 이래서야 진정 주군의 호법이라 말할 수 있더냐.’
그의 무위는 결코 얕지 않았다.
절대살수이자 천사교 오대교령이었던 천살조차 그의 검에 죽지 않았던가.
허나 같은 암천회 사대호법의 후예인 당대 유령왕을 상대로 승기를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놓치고 말았다.
하물며 살왕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그렇게 진정한 살수의 제왕이 되어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주군께서… 계시거늘… 이세암천이신 주군께서!’
절망에 물들었던 암월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살왕과 팽팽한 접전을 치르고 있는 주군 이현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뒤늦게 암월의 변화를 깨달은 야래향은 의아했다.
암월이 이가장의 호법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두 사람의 사이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이현성과 살왕의 격돌은 더욱 심화되었다.
쾅! 쾅! 쾅!
“놈! 죽어라!”
도와 검이 충돌하면 십중팔구 검이 부러진다.
도는 검에 비해 무겁고 두껍기 때문에 더 많은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하물며 명장의 손에서 탄생한 살백도는 수천을 벤다고 해도 결코 부러지거나 무뎌지지 않은 보도(寶刀)였다.
그럼에도 이현성의 암천을 베지 못했다.
살백도가 보도라면 암천은 신검이었다.
허나 살백도에 실린 거력은 아무리 신검을 쥔 이현성이라도 밀려나게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후… 다시!”
“오냐! 와라! 이번엔 죽여주마!”
밀려났던 이현성은 주춤거리지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흡정혈왕 석대환의 기운까지 흡수해서 화경에 오른 이현성이었다.
만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올라서 완벽하게 기운을 갈무리했기 때문이지, 결코 그의 기세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이현성의 거센 반격에 살왕은 순간 움찔했으나 곧 신색을 회복했다.
그들은 일진일퇴(一進一退)를 반복하며 쉽지 않은 싸움을 보여주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살왕이 발전했다는 뜻이다.
초대 살백이 살막을 세운 후 스스로 살왕이 되었다.
그 후 주군이었던 살수천자의 살법을 탐구했다.
도검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으나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있듯 극에 달하면 일맥상통하는 법이었다.
대를 거쳐 가며 살왕은 발전해 왔고, 결국 진정한 살왕이 되었다.
‘으음… 이상하군. 이 수법, 왠지 낯설지가 않아…….’
하지만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콰쾅!!
강력한 격돌의 반발력으로 두 사람은 튕겨나갔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