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커억!”
“진인!”
안타깝게도 살왕의 멸극은 무당의 이화접목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그 결과 적운진인 역시 화를 면치 못했다.
세 맹약자를 단숨에 지웠음에도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살왕의 칼은 새로운 사냥감에게 향했다.
바로 주가려였다. 세 맹약자의 목숨을 앗아간 살왕의 칼을 지금의 주가려가 막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의…재천(如意在天)!”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한자루의 검이 놀랍게도 살왕의 칼을 멈추게 만들었다.
주가려는 검의 주인을 확인하곤 눈이 커졌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뒤는 제가 맡지요. 마마…….”
* * *
“괴, 괴물…….”
천하의 금의위 정천호들이 제대로 힘도 못쓰고 궁지에 몰렸다. 상대가 너무도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흡정혈왕(吸精血王) 석대환. 흡정마공을 극한까지 익힌 괴물이었다.
흡정마공으로 그러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수천, 그 이상의 희생이 필요하였다.
그렇기에 무림사에서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대부분의 흡정마공 수련자들은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기 전에 발각되어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석대환은 석가장의 막대한 금력을 이용해서 은밀하게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흡정마공의 한계에 부닥쳐서 야망을 숨겨야 했었다.
혈천십삼세 중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최소 다섯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고작 금의위 천호 두 사람만으로 감당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커억!”
“유 장군! 크윽!!”
금의위 천호 중 한 명이 나가떨어지고, 이어서 또 다른 천호 역시 쓰러졌다.
비록 초입이라도 명색이 초절정고수인 그들이 쉽게 나가떨어지자 주위의 금의위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석대환은 그들의 명을 완전히 끊기 위해서 다가갔다.
“흐흐흐… 그만 죽어라!”
그들의 머리를 으깨기 위해서 석대환이 양손을 뻗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알면서도 그들은 석대환의 마수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도망칠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였다.
“큭! 누구냐!”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제가 상대할 테니, 두 분께선 몸부터 추스르시지요.”
천호들의 머리를 으깨려던 석대환은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그의 몸을 죄여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석대환을 무시한 채 이현성은 천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현성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그들은 눈이 커졌다.
“아… 가, 감사하오.”
“부, 부탁드리겠소.”
두 사람은 자존심을 세우는 대신 뒤로 물러났다.
내각대학사의 사위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 두 사람과 달리 석대환은 무척이나 화가 났다.
자신의 일을 방해 받은 것이 상당히 불쾌했다.
“감히… 본좌의 일을 방해해!”
석대환의 손에는 핏빛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수많은 제물을 통해서 익힌 흡정마공의 강기였다. 천호들을 상대할 때는 이와 같은 힘은 발휘하지 않았다.
그건 석대환이 이현성의 무위를 엿봤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허나 이현성 역시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천중비화(千重飛花)!”
한눈에 봐도 석대환이 발현한 강기의 덩어리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피한다면 주변, 특히 문가장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피하는 대신 암천살무의 천중비화를 펼쳤다.
콰쾅! 쾅쾅!!
대단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천중비화였지만, 석대환의 강기 덩어리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전력을 다한 석대환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천중비화로 인해 석대환의 강기가 다소 약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덕분에 이현성은 검술을 바꿀 틈을 얻었다.
“으윽…! 혼원…주천(混元周天)!”
천중비화를 거둔 이현성은 혼원검결의 혼원주천을 펼쳤다. 석대환의 강기를 억지로 막아내는 것보다는 그에게 되돌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이 섰다.
물론 천중비화로 석대환의 강기를 최대한 약화시켰기에 시도할 엄두가 난 것이다. 다행히 가까스로 석대환의 강기를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미, 미친!”
석대환은 흔적도 없이 죽어갈 이현성을 기대했다가 자신이 쏘아낸 강기가 되돌아오자 기겁했다. 피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다시 강기를 발현했다.
콰쾅!
“일점혈(一點血)!”
“컥! 개, 개 같은 자식이!!”
석대환이 정신을 못 차리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이현성이 아니었다. 절대쾌검이라고 불리는 일점혈이 석대환의 어깨를 베었다.
제법 깊게 베였는지 뼈가 보일 정도였다.
물론 원래는 심장을 노렸으나 아쉽게도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죽이……!!”
실전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강해진 무림인들과 달리 금력의 힘을 빌어 속성으로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석대환이었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본인은 고통을 참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작은 고통에도 괴로워했다.
하물며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베인 상태였다.
그러니 고통을 견뎌내기 어려운지 눈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쾅! 쾅! 쾅! 쾅!
석대환은 그나마 멀쩡한 손으로 강기를 난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현성은 등골이 오싹했다.
석대환은 분명 무림인으로서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공에 한해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힘을 갖고도 눈치를 보다니… 도대체 혈천은 얼마나 많은 괴물들의 천지란 말인가.’
회귀 전의 기억으로 가늠한 혈천도 대단했지만, 어쩌면 자신은 빙산의 일각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것은 석대환도 마찬가지였다.
‘애송이 놈이 이 정도였단 말이야! 젠장! 젠장! 여기서 내 야망을 접을 수는 없다! 죽여야 해! 기필코!’
자신을 무시하는 혈천을 제 발아래 두고 천하를 손에 넣을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상황이 꼬이자 석대환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판이었다.
콰쾅! 쾅! 쾅!!
이현성도 내공이 적다곤 할 수 없었으나 석대환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난사하는 석대환의 강기를 맞대응하기보단 피하거나 흘리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석대환이라고 이현성의 그러한 생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일점…큭!”
“으윽! 잡았다!”
석대환답지 않게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수를 썼다.
설마 그가 이러한 수를 쓸 줄은 상상도 못 한 이현성은 석대환에게 팔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서, 설마!”
“흐흐흐…! 맞다. 바로 그 설마다!”
순간 이현성은 단전의 내공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그의 내공이 석대환에게 빨려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현성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흡정마공(吸精魔功)!!’
그렇다. 석대환이 육참골단의 수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이현성을 잡은 것은 흡정마공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그라도 내공의 한계는 있는 법.
강기를 난사하면서 그 역시 내공을 상당히 소모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흡정마공으로 이현성의 내공을 흡수하는 동시에 죽일 생각이었다.
“으아악!!”
“흐흐흐… 그래 비명을 질러라! 하하하!!”
강제로 내공을 갈취하는 것인데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현성은 내공은 물론 영혼까지 빨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결국 비명을 질렀다. 정신까지 아찔해졌으나 간신히 의식의 끝자락을 붙잡았다.
여기서 석대환이 잊은 것이 있었다.
베인 상처로 하나의 팔만 사용하는 그와 달리 이현성은 두 팔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컥!”
이현성은 이를 악물고 석대환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곤 석대환의 가슴에 꽂힌 자신의 검을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석대환은 정신을 놓을 뻔했다.
그로 인해 운용 중이었던 흡정마공이 흔들렸다.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개 같… 헉! 뭐, 뭐야!”
“이걸 노린 것은 아니지만… 네 내공은 잘 쓰마. 흡정혈왕.”
“어, 어떻… 으아악!!”
갑자기 내공의 흐름이 바뀌었다.
놀랍게도 석대환에게 빨려 들어가던 내공이 역류해서 되려 이현성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흡정마공의 운용에 문제가 생긴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이현성에게 혼원신공이 있었다는 것이 석대환으로서는 불운이었다.
동시에 최악의 패착인 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현성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서 간신히 붙잡고 있던 흡정마공의 주도권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석대환의 내공 역류는 더욱 빨라졌다.
그 결과 석대환은 점점 메말라가며 흡사 목내이(木乃伊 : 미라)처럼 되어갔다.
그의 흡정마공에 의해 죽어간 자들처럼 석대환 역시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인과응보인 셈이었다.
“주군! 제가… 컥!”
“누구 마음대로!”
푹! 푸푹!
죽어가는 석대환을 발견한 현무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 급히 몸을 빼려고 했다.
허나 그건 최악의 실수였다.
금의위 천호 한 명이었다면 몰라도, 기운을 차린 나머지 두 천호까지 합세하면서 현무는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아무리 현무가 석가장의 비밀병기라도 초절정고수 셋에게 등을 보인 것은 죽여 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죽을…수…….”
석대환은 죽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아니, 발버둥조차 칠 수 없었다.
그럴 힘조차 없었다. 결국 모든 기운을 빼앗긴 석대환은 너무도 비루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천하제일의 부자라는 석가장주답지 않은 결말이었다.
“이 대협 덕분… 음?”
간신히 현무를 죽인 금의위 천호들은 이현성에게 다가와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금의위 천호들 역시 초절정지경에 오른 고수들답게 이현성의 상태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대협의 호법을 내가 서겠네. 자네들은 대인들을 구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 장군님.”
석대환과 현무의 죽음으로 팽팽했던 싸움에 균열이 생겼다. 석가장의 비밀 무력대인 삼당의 하나인 밀당(密堂) 고수들은 그렇게 무너졌다.
그러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현성은 무아지경 속에 빠졌다. 놀랍게도 그의 몸속에서는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다.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이 이루어지면서 거대하고 견고했던 화경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한번 좌절했던 일이었다. 허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부족했던 내공이 흡정혈왕 석대환으로 인해 해결되면서 완전한 정기신의 합일을 이루었다.
“서, 설마…….”
이현성의 호법을 서던 조 장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순간 이현성의 전신에서 성스러운 빛(聖輝)이 뿜어져 나왔다.
조 장군은 그 의미를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화경(化境). 당대 무림에서 공식적으로 스물이 넘지 않았다고 알려진 초인지경이었다.
황실과 알려지지 않은 기인들을 합친다고 한들 서른이 넘지 않을 화경에 그가 도달하려 했다.
그것도 이립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청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순간 이현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