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그녀가 구룡검을 쥔 채 밖으로 나가자 오직 9인만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승의와 도의를 입고 있었다.
구룡검의 맹약자들인 구대문파의 수호자들이었다.
“끄응…! 보통 놈들이 아니군.”
“그러니 황실을 넘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하나 같이 초절정지경에 오른 구대문파의 원로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접근하고 있는 이들의 수도 상당한데, 그들 중 몇몇은 자신들 못지않음이 느껴졌다.
이러한 일을 대비해서 준비된 자신들이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막주,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게.”
“존명!”
주가려와 맹약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막주라는 노인만 해도 자신 못지않은데, 그에게 명을 내린 노인에게서는 아무런 기세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자신들이 읽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었다.
전자일 가능성이 없으니 결국 노인은 자신들이 기세를 감지할 수 없는 반박귀진의 절대자란 말이었다.
“살…왕이란 말인가?”
“살왕이 진정 화경에 올랐단 말인가!”
구룡검의 맹약자들은 불청객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살종이라고 불리는 살막(殺幕).
이런 힘을 가진 살문은 오직 살막뿐이었다.
칠사의 하나이자, 팔왕의 한 명인 살왕(殺王).
물론 아무도 살수 나부랭이가 화경이란 지고한 경지에 올랐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파무림에서 정파무림에 꿀리기 싫어 살왕을 칠사의 하나로 만든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대놓고 부정하진 못했다.
살왕의 손에 과거 십정인 은하창왕이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신비지문이라 불리던 은하궁은 무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자리를 개방의 태상호법인 장왕이 채웠다.
암살이었기에 은하창왕을 살해할 수 있었지, 실제는 화경에 오르지 못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살왕의 분노를 살까 봐 두려워서 누구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살왕은 화경에 올랐던 것이다.
“어딜 가느… 헉!”
“너흰 나와 놀아야 하지 않겠느냐.”
성질 급한 공동파의 수호자가 건청궁으로 향하는 살막의 살수들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 자루의 칼이 그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이, 이기어도(以氣御刀)!”
“무량수불… 진정… 화경이란 말인가.”
살왕은 자신의 무위를 증명하고야 말았다.
이기어도. 오직 화경고수만 펼칠 수 있는 신기였다.
이현성의 여의재천과는 다른 완벽한 이기어도를 펼친 살왕이었다.
살왕은 광기 어린 피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땡중과 말코의 피 맛을 보겠군.”
“크으윽!!”
“칠상권성(七傷拳星)! 적하신니(赤霞神尼)!”
공동의 칠상권군과 아미의 적하신니는 십초도 버티지 못한 채 나가떨어졌다.
과연 화경고수는 격이 달랐다.
두 사람은 너무도 쉽게 쓰러졌다.
비록 두 사람이 구룡검의 맹약자 중에서 약한 편이라지만 무려 초절정고수였다.
결코 가벼운 상대가 아닌데, 살왕은 너무도 가볍게 둘을 쓰러트렸다.
두 사람만 아니라 구룡검의 맹약자들 모두 화경고수의 강력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무력하다니… 도대체 화경고수는 얼마나 괴물이란 말인가.’
어려서부터 영약을 밥 먹듯이 복용하고 초절정고수들인 맹약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간신히 초절정지경에 오른 그녀로서는 이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살왕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황제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과연 구파일방이군. 하지만 장난은 이만하지.”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는 칠상권성과 적하신니를 내려다보며 살왕이 차갑게 말했다.
단순히 조롱이라면 발끈이라도 할 텐데, 아쉽게도 살왕의 말은 결코 조롱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두 사람을 너무도 가볍게 쓰러트렸다.
그 절대적 강함은 모두를 긴장시켰다.
그때 침묵을 깨는 자가 있었다.
“아미타불…! 빈승이 앞장서겠습니다.”
“…무량수불…! 빈도가 한 손 거들지요.”
소림의 공암대사가 칼을 쥐며 앞으로 나서자, 무당의 적운진인도 한 손을 거들었다.
공암대사가 소림의 도법을 계승했다면, 적운진인은 무당의 장법을 계승했다.
정파무림의 양대 산맥이라는 소림과 무당의 맹약자가 나서자 기세부터가 달라졌다.
그렇다고 긴장할 살왕은 아니었다. 허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소림과 무당이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단 증거였다.
“소림의 도법과 무당의 장법이라… 기대되는군…. 허나 이번에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네. 나도 더 이상 시간을 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야.”
천하의 소림대사와 무당진인을 앞에 두고 이런 오만한 말이라니.
허나 살왕은 충분히 그만한 자격이 있었다.
무려 화경고수였기 때문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공암대사였다.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라… 좋군.”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라 불리는 소림의 금강부동신법을 펼친 공암대사는 거대한 칼을 휘둘렀다.
살왕은 굳이 피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칼을 휘둘렀다.
결코 작은 칼은 아니었지만, 공암대사의 거대한 칼에 비하면 작았다.
채―앵!!
“큭! 어림없소!”
“빈도 역시 있소이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암대사의 거대한 칼이 살왕의 칼에 너무도 쉽게 막혔다.
오히려 뒤로 밀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공암대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연이어 칼을 휘둘렀다.
적운진인은 찰나에 생겨난 틈을 이용해서 손을 휘둘렀다.
너무도 절묘해서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춘 것만 같았다.
쾅!!
거센 공암대사의 도격과 강렬한 적운진인의 장법이 살왕의 도면(刀面)에 의해 막혔다.
허나 오히려 살왕은 감탄했다.
“허…! 소림의 도법도 놀랍지만, 무당의 십단금(十段錦)이라니… 소실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무량수불…….”
살생을 금하는 소림답게 권장지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하지만 소림에 무기류의 절학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하공부 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소림의 도법이 약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살왕이 놀란 것은 공암대사의 도법보다 적운진인의 장법이었다.
무당면장하면 무림일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한 면장을 능가하는 파괴력을 가진 십단금은 정말 무시무시한 장법이었다.
익히기도 어렵고, 익힌다고 해도 그 가공할 위력은 신선을 꿈꾸는 도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당에서도 섣불리 전수하지 않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펼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당금 무림에선 십단금이 소실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헛소문인지 적운진인의 손에서 발현되었다.
문제는 그런 십단금이 작렬했음에도 살왕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 죽어라!”
살왕의 손을 벗어난 칼이 공암대사와 적운진인에게 향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대응했다.
공암대사와 적운진인의 대응은 나쁘지 않았으나, 살왕의 이기어도를 막기에 부족해 보였다.
그들로서는 정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관일(貫日)!”
“오뢰인(五雷印)!”
“종학금룡수(縱鶴擒龍手)!”
콰쾅!!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살왕의 칼이 튕겨나갔다.
공암대사와 적운진인의 연수는 매우 뛰어났다.
따로 손발을 맞춰본 것이 아님에도 그러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쉽게 끼어들지 못하고 상황만 엿보던 구대문파의 또 다른 맹약자들이 움직인 것이다.
살왕의 이기어도로 인해 공암대사와 적운진인이 밀리는 순간 점창의 관일창법, 종남의 오뢰인 그리고 곤륜의 종학금룡수가 작렬했다.
구대문파의 맹약자 다섯이 힘을 합쳐서야 겨우 살왕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살왕이 칼을 거두었다는 말이 옳았다.
“사전절광검(射電絶光劍)!”
“칠절매화(七絶梅花)!”
이기어도를 시전한 살왕에게 청성의 사전절광검과 화산의 칠절매화검이 쇄도했다.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시기가 매우 절묘했다.
쾅!
“흐흐흐… 내가 살수라는 사실을 잊었나 보군. 난 살왕일세. 화경고수를 너무 가볍게 봤어.”
구대문파의 다섯 고수를 상대했던 살왕의 칼이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덕분에 화산과 청성의 맹약자의 기습이 실패하고 말았다.
순간 살왕의 눈빛이 변했다.
“네년부터 죽여…주마!”
“안 돼!!”
살왕은 칼을 쥔 채 누군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강기가 넘실거린 칼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의 칼이 향한 곳에는 젊은 절색의 여인이 있었다.
살왕은 구룡검주인 주가려부터 베서 구대문파 맹약자들을 흔들 생각이었다.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그들도 초절정고수이다.
동시에 열이나 상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쩌억!!
살왕의 일도에 누군가의 몸이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사, 사부님!!”
“호? 몸이 움직일 만했던가?”
주가려는 무사했다. 살왕의 칼이 그녀에게 닿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 대신 칼을 받아냈다.
적하신니(赤霞神尼) 혜원사태. 실질적으로 주가려에게 무공을 가르친 사부인 그녀가 대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사부인 혜원사태의 죽음에 주가려는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을 여유조차 없었다.
살왕의 칼이 아직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챙! 서걱!
“크윽!!”
“대사!!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이어진 살왕의 칼 역시 누군가 대신 받아냈다.
소림의 공암대사와 무당의 적운진인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휘두르는 살왕의 칼을 두 사람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는지, 공암대사의 거대한 칼은 물론 칼을 쥔 팔까지 베이고 말이었다.
적운진인의 일갈에 드디어 주가려는 정신을 차렸다.
주가려가 빠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아…! 구룡…진천하(九龍振天下)!!”
그녀는 구룡검을 꽉 쥐고 전력을 다해서 검을 휘둘렀다. 구룡검의 맹약자들조차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가려의 행동은 무척이나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휘두른 검초는 구룡검결의 오의, 구룡진천하였다. 사실 주가려의 경지로 구룡진천하를 펼치는 것은 무리였다.
주가려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반드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콰쾅!!
“크윽…! 황실무공을 무시했는데… 제법이야.”
“우웩!!”
“마마!!”
공격을 한 사람은 주가려였건만 피를 토한 사람 역시 그녀였다. 허나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살왕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으니까.
많은 영약을 복용한 만큼 주가려는 내공에 한해서는 상당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뀔 것이 없었다.
아미파의 혜원사태는 죽음을 맞이했고, 소림의 공암대사는 한쪽 팔을 잃었다. 나머지 맹약자들 역시 크고 작은 내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살왕의 눈에 살기와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흐흐흐…! 하하하!!!”
살왕의 입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진한 죽음의 기운이 퍼졌다.
“모두 죽어라! …멸극(滅極)!”
“컥!”
“큭!”
살왕의 손에서 칼을 사라진 순간 생명이 사라졌다.
종남과 공동의 맹약자는 반응조차 못 한 채 절명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살왕의 칼이 무당의 적운진인을 노렸다.
그는 이를 악물며 이화접목의 수법을 펼쳤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