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귀왕이 암월을 뵙습니다.”
“…….”
그녀의 태도가 바뀌었다. 암월은 그 이유를 눈치챈 듯싶었다.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이제 알았나 보오, 귀왕.”
“예… 시조께서 남기신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암월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인정하는 것이오. 암천회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아래향의 말에서 뼈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되물었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예, 다만… 후… 본림 아니, 초대 귀왕께서 암천회 출신이라고 해서 얽매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암월은 잠시 야래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귀왕의 뜻을 존중하겠소.”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시오.”
야래향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에 암월은 수락했다.
그녀의 길이 자신과 달라졌다고 해서 이를 타박할 순 없기 때문이다.
예전의 그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현성을 만나고 암월의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당대 암월로서 살수천자를 향한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24대까지 이어지면서도 변치 않은 충성과 경외는 지금도 여전했다.
“…암천…회가 아직도 존재하는 건가요?”
“본인이 알기론 존재하지 않소. 그분의 사후 본회는 갈기갈기 찢어졌으니…….”
“그럼에도 암월께선…….”
“본인은 물론 역대 조사들께선 암천회가 아닌 이세암천. 즉, 그분의 후계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담담하게 대답한 암월을 보며 귀왕은 깜짝 놀랐다.
이세암천이라니…….
귀림의 역사를 생각하면 암천회는 최소 수백 년 이전에 사라졌다.
현 무림집단 중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집단이 바로 귀림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전에 있던 암천회주의 후계자, 이세암천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므로 야래향이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그분의 후계자를 기다리신다는 것이…….”
“이미 암천회와 그분으로부터 마음이 떠난 귀왕께서 왜 궁금하시오.”
“…그, 그건…….”
“…좋소. 궁금하다면 말해주겠… 음?”
그녀는 암천회주인 살수천자의 신물인 암천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리고 암천검의 주인을 증명하는 암천살무 역시 모르는 듯했다.
이에 암월은 이를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그리고 설명해주려던 암월의 말이 갑자기 멈췄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귀왕께서 궁금하신 부분은 나중에 말해주겠소.”
“예? 암월 님?”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암월이 사라졌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야래향은 당황했다.
암월을 이 정도로 무례한 인물로는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 * *
“……!!”
누군가 눈을 부릅뜬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단말마의 비명도 없는 죽음이었다.
그건 정체불명의 복면인이 입을 막고 심장을 찔렀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죽은 자는 금위군. 금의위 휘하의 정예군사였다.
문제는 이런 죽음이 그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천의 결정대로 지휘권은 본왕이 가지겠소. 석 호법은 장원만 포위하시오.
―…물론이외다. 곡주.
복면인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바로 살수들이었다.
다만 하나의 세력이 아닌 듯싶었다.
예는 갖추었지만, 말투에서 상대를 얕보는 것이 느껴졌다.
곡주란 인물이 이백의 살수를 이끌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사라졌음에도 수십의 무리가 남았다.
―총당주, 계획대로 포위하게.
―존명!
수십의 무리는 장원의 주변을 은밀하게 포위했다.
그러자 홀로 남은 석 호법은 이를 갈았다.
‘고작해야 살수나부랭이가 날 무시해? 빠드득… 네놈이 나의 발아래에 머리를 숙일 날이 올 것이다.’
푹! 서걱!
술에 흠뻑 취해 있던 축하객들은 무방비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무방비하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챙!
“누구냐! 감히 내가 누구… 큭!”
“어림없다!”
뒤늦게 살수들 존재를 눈치챈 호위들과 무림명숙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보통 살수들이 아닌지 다소 실력이 떨어지는 호위들은 반격하다가 도리어 당했다.
무림명숙들 역시 술에 취해서 어이없이 당한 자들도 있었다.
“이놈들!!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이 좋은 날 피를 보게 하다니!!”
띵! 띠딩!!
갑자기 나타난 두 고수의 활약에 살수들은 잠시 주춤했다.
그들은 바로 장강어옹 규염과 칠현마금 독고혜였다.
강철보다 단단한 철죽의 낚싯대는 살수들의 머리를 부수고, 천잠사로 꼬아서 만든 낚싯줄은 살수들의 사지를 끊었다.
그리고 독고혜의 칠현금의 현이 튕겨질 때마다 살수들이 절명했다.
두 사람의 활약에 문가장을 찾은 축하객들 역시 숨통을 트일 수 있었다.
허나 살수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부곡주는 장강어옹을 맡으시오. 난 저 칠현마금을 상대하겠소.”
“알겠소. 곡주.”
정체불명의 살수들 중에서도 기세가 남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규염과 독고혜는 움찔했다.
그들의 기량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독고혜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음공은 다수를 상대할 때 그 강력함이 더했다.
지금처럼 적만 골라서 공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가 자신 못지않은 고수라면 더더욱 쉽지 않았다.
팅!
챙!!
“과연 칠현마금… 허나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상대를 골라서 음공을 펼치는 것도 어려운데, 적이 대단한 고수이니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를 본 무림명숙들이 도우려고 했으나 방해꾼들이 있었다.
챙! 챙! 채챙!!
“도대체… 설마 살막이라도 된단 말인가!”
“설사 살막이라도 네놈들은 살아 돌아가지 못하리라!”
무림명숙들은 최소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럼에도 살수들을 상대로 압도하지를 못했다.
고작 살수 두셋씩 감당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초절정고수들 역시 십여 명에게 발이 묶였다.
그건 그들이 술에 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만큼 살수들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흔치 않다는 특급살수가 십여 명 아니, 수십은 되는 것 같았다.
이런 힘을 가진 살문은 오직 살막뿐이었다.
그렇기에 무림명숙들이 저들의 정체를 살막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는 살막이 아니었다.
현재 살막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만 죽어라!! 혈살유령수(血殺幽靈手)!”
독고혜는 정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다.
강기가 실린 손이 그녀의 머리를 향했다.
쾅!!
“이자는 본인이 맡겠습니다. 독고 장로께선 장주 부인들께 가보시지요.”
“고맙네, 암월 호법.”
독고혜를 구해낸 자는 바로 암월이었다.
귀왕과 함께 있던 그가 갑자기 움직인 것은 살수들의 은밀한 움직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현성과 그의 부인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신방으로 향하던 중 가던 방향을 급하게 바꾸었다.
괴한들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암월? 그렇군. 천웅방의 암월영패였다가 이가장에 들어갔다는 그 잡놈이구나.”
“유령왕? 네놈도 있었군. 좋아… 죽여주마.”
“헉! 날 어떻게…! 상관없지. 어차피 곧 죽을 놈이니까.”
살수들의 정체는 바로 혈천십삼세의 하나인 유령곡이었다.
그것도 유령곡의 최정예들이니, 무림명숙들도 살수들을 압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암월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귀왕에 이어서 유령왕까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귀왕과 달리 유령왕은 이를 드러냈다.
암천검주가 계신 이 자리에.
그러므로 암월이 그에게 적개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두 사람 모두 암천회 사대호법의 후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곤욕스러운 사람은 바로 장강어옹 규염이었다.
“흐흐흐… 제법 기대했는데, 별 볼일 없는 늙은이였군.”
“빠드득…….”
그는 독고혜와 달리 술을 잔뜩 마셨다.
오랜만에 제갈윤호를 만났고, 친손녀 같은 제갈현지의 혼삿날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유령곡의 부곡주인 유령살군을 상대하는 것이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초절정고수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들 역시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유령곡의 장로들에게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살수들은 자존심에 목을 매지 않는다.
은신과 암습은 물론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규염 못지않게 흠뻑 취한 초절정고수도 발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제갈윤호의 경우 문종학과 문태규를 보호하고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젠장, 아무리 기뻐도 술을 과도하게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상처가 늘수록 규염은 죽음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죽을 순 없었다.
결국 결심했다. 눈앞의 적과 함께 죽겠다고.
콰쾅!!
“으아악!!”
“커어억!!”
목숨을 건 규염의 동귀어진에 주변에 있던 자들이 휘말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린 자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우웩!”
“흐흐흐… 동귀어진이라… 허나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줄 알아?”
최악의 상황이었다.
규염의 동귀어진을 눈치챈 유령살군은 대비하고 있다가 피하고 말았던 것이다.
피를 토할 정도로 내상을 입은 규염으로선 유령살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죽음을 감지한 규염은 그만 눈을 감았다.
쾅!!
“커억!!”
“감히… 네놈들이 내 가족을 건드려! 죽음으로 사죄해라!”
* * *
“헉… 헉… 큭.”
살수들을 베어가는 한승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다른 축하객들처럼 술에 흠뻑 취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 새 신랑과 신부들을 축하기 위함이라면 그는 괴롭기 때문이다.
십여 년 만에 재회한 가족들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린 이현영의 모습만으로도 그를 괴롭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부족해서 그녀와 함께 우는 두 사내.
특히 이현호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괴로워서 평소 잘 마시지 않는 술을 입에 대었다.
그 결과 살수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무리 상대가 삼대 살종인 유령곡의 정예살수들이라고 하지만 천검이라고 불리는 그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직… 죽을 수는 없어!’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생에 대한 집착이 크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은 목숨은 이현영, 그녀의 것이다.
죽더라도 그녀에게 죽어야 한다.
그렇기에 한승은 포기하고 편해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챙! 챙!
푹!
“으윽!”
한승은 자신의 발을 묶고 있는 살수들을 감당하느라 은신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또 다른 살수의 암격을 막지 못했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서 검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상처들이 늘어났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크고 작은 상처들은 그의 목을 점점 조여 왔다.
“커억!”
“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는 바로 이현호. 한승이 십여 년간 애정을 쏟아 부은 제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차마 만날 수 없는 애증의 존재이기도 했다.
“…괜찮으세요.”
“너는… 괜찮으냐.”
한승은 차마 이현호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부의 모습에 이현호는 마음이 아팠다.
언제나 당당하던 사부가 자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큭!”
“컥!”
살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마음이 흔들린 이 상황을 노리고 들어왔다.
허나 살수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냥 죽으실 생각입니까? 저는 아직 용서하지 않았어요.”
“소저…….”
“사세요. 용서를 받을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으세요.”
“누이…….”
두 사람을 구한 사람은 놀랍게도 이현영이었다.
16년 전 비사의 중심에 있던 그녀였다.
그들을 뒤로한 채 이현영은 움직였다. 오라버니의 혼례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자들을 과감하게 베기 위해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승이 일어났다.
“살아… 남아야지. 용서받을 그날까지…….”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