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오셨습니까, 교두님. …대주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됐다. 녀석아.”
중년 사내의 정체는 바로 수라검귀(修羅劍鬼).
혈무곡의 교두에 이어 혈살동에서도 교두이자 혈살삼관장을 역임한 그였다.
철우와 초운비가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이현성과의 연이 그들을 이어준 셈이었다.
그런 그가 몇 년 전, 왕래가 끊겼다.
놀랍게도 수라검귀가 초절정지경에 오르면서 혈천삼십육대 중 하나인 수라검대로 보직이 이동되었기 때문이다.
마광수라가 그를 껄끄러워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아랫사람이었던 수라검귀가 수라검대주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호법원 호법의 직위까지 부여받았다.
때문에 껄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수하들을 거부하는 거냐?”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하고?”
“…말이 수하지, 감시자들 아닙니까?”
반골 기질이 다분한 삼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혈살객들은 혈살사객의 수하나 마찬가지였다.
혈살사객은 하나같이 혈천십삼세의 직계들이었다.
혈무곡, 생사교 시절부터 포섭했으며, 혈살동에 들어온 후부턴 수족처럼 부렸다.
그런 혈살객들이 자신의 밑에 들어와 봤자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감히 초절정지경에 오른 자신의 명령에 항명할 수는 없겠지만, 온전하게 따를 리가 없었다.
“그럴 수 아니, 그렇겠지. 그리고?”
“…….”
수라검귀는 알고 있었다. 그게 그들을 거부하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수라검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도 녀석을 잊지 못했느냐. 아직도 복수를 할 생각이더냐?”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성님을! 오직 복수만을 꿈꾸며 지금까지 버텼습니다. 만약 복수를 포기해야 한다면…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습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의 명령을 들으면서요!”
철우와 달리 수라검귀는 혈천을 증오하지 않는다.
물론 존경하거나 목숨을 걸 정도로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혈천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무인으로서 천주를 경외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였지만 혈천을 증오하는 철우를 다그치지 않았다. 철우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권태로웠던 그에게 흥미를 일으켰던 그리고 제자로 키워보고 싶었던 이현성이었다.
그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되었다.
“후… 동주님께 말씀드려서 너희 같은 놈들을 붙여주마.”
“저희 같은 놈들이라니요?”
“많지 않지만 너희 같은 미친놈들이 몇몇 있었다. 다른 녀석들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녀석들이.”
“교두님, 미친놈들이 뭡니까? 명색이 제자들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있습니까?”
수라검귀의 말에 철우는 발끈했다.
다른 이들에겐 몰라도 최소한 그에게만큼은 깍듯했기 때문이다. 허나 수라검귀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아니냐? 두 놈이 모두 삼광에 속했으면서?”
“그야 뭐… 그런데 정말 있습니까?”
“많지는 않지만… 몇몇 있었다. 너랑 운비에게 배치하기에 적긴 하지만…….”
혈살객들에겐 세뇌가 되어 있었다.
허나 그건 혈천과 혈천주에 대한 충성이지, 그 외 누군가를 향한 충성심은 아니었다.
물론 혈천십삼세의 주인들도 손을 쓰려고 했으나 혈천주의 심복인 혈궁주의 감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자칫 혈천주에 대한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에 도박할 수는 없었다.
십삼세의 주인들 특히 화경고수들까지 아우른 혈천주였다. 때가 되지 않은 지금 감히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순 없었다.
“길들이는 것은 너희 몫이다.”
“흑오 녀석에게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흑오까지? 녀석들을 셋으로 나누면 고작 두셋밖에 안 된다. 상부에서 받아들이겠느냐? 그리고 너희가 그 녀석까지 챙길 여력이 되더냐? 녀석은 운비와 다르지 않더냐.”
“그렇긴 하지만… 교두님 말씀이 맞습니다. 운비와 저에게만 배정해주십시오.”
철우는 생각을 바꾸었다.
자신들의 계획에 흑오는 포함되지 않았다.
계획을 성공하나 실패하나 자신들의 미래는 없었다.
혁련후가 누군가. 대호법의 손자였다.
따라서 뒷감당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중원으로 도망친다고 한들, 혈천과 대호법의 힘이라면 분명 자신들을 찾아내서 죽일 테니까.
그 죽음에 흑오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의형과 연관 없는 그를.
‘흑오 녀석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
* * *
“죽여…버리겠어!!”
이성을 잃은 이현영은 주먹을 휘둘렀다.
장문인의 부름을 받았기에 검은 두고 온 상태였다.
비록 검을 쥔 것은 아니었지만 냉천한월공의 기운을 잔뜩 실은 그녀의 주먹은 그 자체가 흉기였다.
그렇다고 한들, 초절정고수에겐 통하지 않는다.
“이놈!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더냐!”
“아닙니다… 소저에게 죽으러 온 겁니다. 장문인.”
이현영의 앞에 무릎을 꿇은 한승은 기겁하는 화천기를 모른 척하며 16년 전의 일을 이야기했다.
짐승 같은 자들에게 이현호가 죽임을 당했던 것과 이현영이 그들에게 겁탈당할 뻔했을 때 나서지 못한 이야기를.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이현영이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 이현영의 주먹을 낚아챈 자가 있었다.
바로 화천기였다.
아무리 냉천한월공의 기운이 잔뜩 실렸다고 하지만 초절정고수인 화천기의 손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발버둥질하려는 이현영을 제압한 화천기가 한승에게 물었다. 짧지만 그가 느낀 한승은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대협.”
“대협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호칭이 어울리는 자가 아닙니다. 변명에 불과하지만… 사부님의 유언이셨습니다. 천검을 9성까지 익히기 전까지 무림과 연루되지 말라는… 죄송합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한승의 변명을 들은 화천기는 한숨이 나왔다.
사부의 유언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유언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의 사부가 그런 상황까지 염두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같을 순 없으니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었다.
어떻든 이현영에게는 변명으로만 들렸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변명으로 들렸다.
“당신이… 당신이 생각만 바꿨어도 현호… 그 아이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어엉… 어엉…….”
절규를 하던 이현영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마음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이현영이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녀를 붙잡고 있는 화천기가 울컥할 정도이니 당사자인 한승은 어떻겠는가.
도저히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한참 울던 그녀의 울음소리가 조금은 진정되었을 때 한승이 나직하게 말했다.
“호현이… 아니, 현호는 살아 있습니다. 소저…….”
“훌쩍… 지금… 훌쩍… 뭐라고… 훌쩍…….”
기진맥진할 정도로 울었던 이현영은 귀를 의심했다.
이미 죽은 동생이 살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봤다.
짐승 놈의 주먹을 맞고 나가떨어진 것은 물론 가슴에 비수가 꽂힌 동생의 모습을 봤다.
그런데 어찌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아이의… 무덤이라도 만들어주려고 다가갔는데… 미약하지만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었습니다. 간신히 맥을 이은 후에…….”
“훌쩍… 저, 정말인가요! 훌쩍… 현호가 살아… 훌쩍… 살아 있었다는 게! 훌쩍… 어디에 있나요. 현호…훌쩍…….”
이현호의 소재를 묻자 한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이현영의 심장을 쿵 내려앉았다.
“서, 설마 내보낸 건가요! 훌쩍…….”
“아, 아닙니다. 제 조카로 위장한 후… 제자로 삼았습니다. 다만…….”
“다, 다만 뭔가요!”
“몇 달 전, 당시의 일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 아이가 뛰쳐나갔습니다.”
“……!!”
지금까지 이현호가 무사했다는 말에 무척이나 기뻤으나 충격을 받고 뛰쳐나갔다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이제야 동생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에게 또다시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 그럼 어디로 갔는지 모르신단 말인가요!”
“아, 아닙니다. 아마 형에게 갔을 겁니다.”
“혀, 형이라면… 현성… 현성 오라버니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 아니죠?”
“맞…습니다. 확실하진 않으나 분명 그분에게 갔을 겁니다.”
“……!!”
이현영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의 살아 있단 사실에 이어서, 16년 전 헤어진 오라버니의 소재를 알게 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가족이었으니까.
“어, 어딘가요! 오라버니와 현성이가 있는 곳이!”
“…혹시 신검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 *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직접 찾아뵙고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커흠… 되었네. 자네의 사정을 알고 있었네. 마음에 두지 말게.”
호북성에서 출발한 제갈세가의 무리가 이가장에 도착했다. 황도인 북경에 가는 길에 이가장이 있기에 굳이 따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가장과 합류해서 함께 가기로 사전에 약조를 해둔 상황이었다.
제갈인섭은 이현성의 장인어른이란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가주, 우리도 소개를 해주게나.”
“아… 네 숙부님. 사위, 본가의 원로님들로 나의 숙부님들이시네.”
제갈인섭은 동행한 노인들을 소개해주었다.
제갈윤호와 같은 항렬인 원로들이었다.
다들 고희를 넘긴 노고수들이었다.
배분도 배분이었지만, 이제 처숙조부들이기에 이현성은 무척이나 깍듯이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숙조부님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현성입니다.”
“허허… 헌헌한 것이 그야말로 대장부일세!”
“그럼 우리 현지가 짝을 허투루 찾았을까?”
제갈세가 어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제갈현지였다.
그녀의 부군이 될 이현성이었다.
한편으로는 괘씸하면서도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선 중년인들은 좀 달랐다.
“본가의 장로들일세.”
“자네가 우리 현지를 그렇게 목매게… 흠흠…….”
“흥. 제 서방 욕한다고 눈을 시퍼렇게 뜨네.”
“수, 숙부님도 제가 언제… 그랬다고…….”
원체 나이가 많은 원로들과 달리 4, 50대인 장로들은 마냥 이현성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제갈세가의 보물을 몇 년이나 곁에 두고도 마음고생만 시켰으니까.
그들의 말에도 이현성은 화는커녕 면목이 없었다.
애초 자신의 잘못임을 알고, 그들이 조카인 제갈현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처숙부님들, 앞으로 지매를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흠흠… 용서까지야…….”
너무도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니 제갈세가의 장로들은 오히려 머쓱했다.
그때 누군가 그들을 타박했다.
“이놈들아 우리 장주 그만 괴롭혀라.”
“헉! 숙부님 그, 그게 아니라…….”
이가장주는 물론 제갈세가의 원로, 장로들이 있는 자리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실례였다.
하지만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
그는 바로 장강어옹(長江漁翁) 규염이었다.
이가장의 장로이자, 제갈세가에서도 오랜 시간 지내왔던 그였다.
원로들은 물론 장로들 역시 그와 친분이 있었다.
“자넨 오랜만에 봤는데, 아이들에게 타박인가?”
“윤한이 아닌가. 오랜만일세.”
원로인 제갈윤한과 규염은 동갑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