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당시에는 글을 몰랐기에 부친이 자신에게 쥐어준 쪽지에 적혀 있던 것을 내용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중산장으로 간다고, 장주님이신 한승 어른은 좋은 분일 거라고.
이현영은 혼란스러웠다.
16년 전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얼마 후 문제의 인물이 화산에 방문했다.
* * *
“한 호법님, 저곳이 바로 화산파입니다.”
“저…곳이 바로…….”
무림맹을 떠난 한승은 주작당의 호위무사들과 함께 화산으로 향했다. 무림맹의 총단이 위치한 하남성 허창과 섬서성 화음현의 화산은 제법 먼 거리였다.
걸어서 한 달은 걸릴 수 있는 거리로, 아무리 서둘러도 20일 이상 걸린다.
그런데 그들은 보름 만에 도착했다.
아무리 마차를 탔다고 하지만 한승의 재촉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중간 중간 마방에서 말을 교체하며 부지런히 움직인 것이 한몫했다.
화산은 제법 산세가 가파르기에 마차를 끌고 가긴 어렵다. 하지만 산의 중턱까지는 가능했다.
화산파의 도사들도 사람이기에 생필품은 필요했다.
그런데 화산파 본산에 기거하는 인원만 기백이었다. 그들이 소모하는 생필품의 양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생필품을 사람들이 직접 짊어지고 오르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화산의 속가제자들이 본산을 위해서 길을 개척한 덕분에 가능했다.
덕분에 한승과 무림맹 고수들은 중턱까지는 마차를 타고 오를 수 있었다.
“화산파 고수들께서 마중 오시나 봅니다.”
“…그런 것 같군요.”
마차에서 내린 후에도 부지런히 걸어 오른 덕분에 화산파의 산문이 보였다.
그때쯤 고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주작당 고수들보다 한승이 먼저 느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의 머리는 복잡했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그런 것을 내색할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중년과 장년도사들이 다가왔다.
“무림맹 분들입니까? 빈도는 화산의 장로인 운상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승이라고 합니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년으로 보이지만 다들 50대인 화산파의 장로들이었다. 자하검제가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기존 장로들 역시 원로원인 자하원에 들어갔다.
덕분에 화산 일대제자들이 장로 및 주요 궁주 및 관주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듯 대동한 장년 고수들은 화산파를 대표하는 매화검수들이었다.
그야말로 화산의 미래들이었다.
무림맹의 호법은 결코 화산파 장로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리 정중한 태도를 보여주니 내심 흡족했다.
덕분에 그를 대하는 화산 제자들의 태도 역시 부드러웠다.
“오르시지요. 장문인께서 호법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한승은 화산파 장로들의 안내를 받아 장문인의 거처로 오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 힘이 느껴지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바로 칠매신검(七梅神劍) 화천기였다.
두 사람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서로에 대해 감탄했다.
서로의 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화천기보다 무위가 낮은 장로들은 한승의 무위를 깨닫지 못했으나 그는 달랐다.
“화천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화산 장문인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한승이라고 합니다.”
화천기는 한승이 무림맹의 호법이란 것을 떠나 강자로서 존중을 해주었다.
한승 역시 대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자신 못지않은 고수임에도 겸손한 그를 보며 놀랐다.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한승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현영 사질을 만나러 오셨다고요?”
“예. 장문인.”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아, 도착했군요.”
두 사람 모두 초절정지경에 오른 고수들이었다.
하수들의 기척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자 이현영, 장문사백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들어 오거라.”
곱지만 왠지 모를 차가운 여인의 목소리에 한승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한승은 움찔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그녀가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잘 왔구나. 인사드리거나. 무림맹의 호법이신 한승 대협이시… 대, 대협 왜 그러십니까?”
화천기는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한승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질인 이현영의 앞을 바라보며.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소저…….”
회한의 눈물 (2)
“두 달 후라…….”
북경에서 날아온 서신을 읽은 이현성의 표정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문종학과 제갈인겸의 합의로 세 사람의 혼사는 황도인 북경에서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혼삿날은 두 달 후로 정해졌다.
덕분에 또 다른 처가인 제갈세가에선 벌써 북경으로 떠날 채비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혼례 준비는 문가장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기에 시일을 단축할 수 있었다.
“미루는 것은 어렵겠지…….”
혼례를 앞둔 새신랑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혼례를 치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여동생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상 그에게 남은 혈육은 두 동생들뿐이었다.
다행히 남동생은 찾았지만, 아직 여동생은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혼례에 여동생이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진즉에 그 아이의 생존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뒤늦게 하오문에 의뢰를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쉽지 않은지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오래전의 일이고,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직접 만난 적이 없는 한승에게 화가 났다.
그가 당시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남동생조차 다시 만나지 못했을 수 있단 생각에 그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가 이현호에게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를 들어서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미워할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그보다 녀석들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 그 녀석들도 함께였다면 좋았을 것을…….”
동생들을 생각하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의 또 다른 동생들. 혈천에 남아 있는 의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운비야, 철우야. 너희에게 마음의 상처를 줘서 미안하구나. 그리고 흑오야… 미안하구나.”
혈무곡의 마지막 시험에서 그는 철우의 대검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죽음으로 위장했다.
덕분에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철우와 운비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회귀 후로 아직 만나지 못했던 또 다른 의제 흑오.
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혈살오객 중 사객에 치이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따랐던 의제들이었기에 더더욱 미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도 혈천에 의해 억압받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자신의 부족함이 미울 지경이었다.
“혁련후, 그 개자식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혈무곡 시절 자신을 가장 경계하고 괴롭힐 기회만 엿보던 혁련후였다.
죽음으로 위장한 자신을 대신해서 의제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거라. 기필코 너희를 만나러 갈 테니까.”
이현성은 혈천의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혈무곡에서 혈살동으로 갈 때 눈을 가렸다.
그리고 정식 혈살객이 된 이후 중원의 비밀지부들로 떠날 때도 금제를 당했기에 총단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중원 비밀지부들로 흩어지기 전, 장난꾸러기인 흑오가 혈천의 심처에서 빼온 정보를 통해서 총단의 비밀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찾아갈 수 없었다.
혈천의 총단에는 수천의 고수들이 기거했다.
그중 삼원(원로원, 장로원, 호법원)은 물론 오당팔각과 혈천삼십육대의 상위인 혈천육대의 수장들은 초절정지경 혹은 그에 근접한 고수들이었다.
게다가 화경고수들 역시 몇몇 존재했다.
그 역시 혈천의 전부가 아니었다.
일개 혈살오객이었던 자신이 혈천의 전부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혈천이었다.
초절정의 끝에 있다고 한들 무작정 혈천에 잠입할 수는 없었다.
아직 자신은 물론 무림 역시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의제들을 찾아가려가다가 작은 실수라도 한다면 무림대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후… 너희가 어느 비밀지부로 갈지 모르지만, 꼭 찾아내주마.”
몇 년 후 아니, 세상이 변했으니 언제일지 모르지만 혈살객들은 중원의 여러 비밀지부로 흩어지게 된다.
어느 비밀지부에 투입될지 모른다.
그가 혈영살객이었던 당시 방문했던 비밀지부만 십여 곳이며, 자신이 모르는 비밀지부는 훨씬 많을 테니까.
하지만 꼭 찾아낼 것이다.
“이 우형을 미워하고 원망하거라.”
* * *
“필요 없소. 부하들 따윈 흐흐흐…….”
광오한 광우(狂牛) 아니, 철우의 말에 혈살부동주는 짜증이 났다.
상부의 지시를 거역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감히 자신에게 이딴 태도를 보이는 것은 더욱 화가 났다.
혈무곡주 시절부터 혈살부동주인 지금까지 16년이나 그를 키워준 마광수라(魔狂修羅)였다.
감사하지도 못할망정 이따위 오만한 태도를 보이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건 그의 생각일 뿐, 철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납치되지 않았다면 이런 지옥 속에 살진 않았을 테니까.
“상부의 명을 거역하겠단 뜻이렷다?”
“마음대로 하시구려. 부하놈들을 붙이면 모두 때려죽여 버릴 테니까. 흐흐흐…….”
철우의 말에 마광수라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가 혈살칠객(血殺七客)이기 때문이다.
혈천신단을 복용한 혈살육관의 17인 중 절반 이상인 10인이 약효를 버티지 못한 채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허나 무려 7인이나 각성하는데 성공했다.
상부는 5인만 각성해도 혈살객 양성계획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철우는 혈살칠객 중 혈우살객(血牛殺客)이란 별호를 부여받았다.
상부는 각성한 혈살칠객에게 백여 명의 정식 혈살객을 수하로서 나눠줄 계획이었다.
임무 수행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몇몇이 이를 거부했다.
골칫덩이들은 바로 삼광(三狂)이었다.
“광견과 광오 녀석을 내 밑으로 붙여줄 거라면 고려해보겠소.”
“이 개…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삼광 전원이 혈살칠객에 속하게 되었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들이라서 의외의 결과였다.
그런데 초운비와 흑오 역시 철우와 같은 말을 했다.
그런 철우의 말에 마광수라는 결국 폭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저지한 인물이 있었다.
“부동주님. 제가 타이를 테니, 그만 고정하십시오.”
“허흠… 대주께서 그리 말하니… 참겠소.”
“감사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중년 사내의 말에 마광수라는 헛기침을 한 후 자리를 비켜주었다.
중년 사내는 그 역시 껄끄러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광수라가 떠나자 중년 사내가 철우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철우는 마광수라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