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아닙니다. 장로님께서 본파에 방문하셨는데 당연하지요.”
신임 장문인 화천기를 보며 추풍개는 감탄했다.
위엄은 전대 장문인 화월천만 못하였지만, 그는 사람을 포용하는 힘을 가졌다.
그건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추풍개는 그런 화천기를 보며 화산의 저력과 미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 늙은이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오.”
“본파의 제자가 혹 실례라도…….”
“아,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소. 방주님의 명으로 확인할 게 있어서 왔소이다.”
“누굽니까? 장로님께서 찾는 본파의 제자가…….”
화천기는 궁금했다. 개방주의 명령과 추풍개 장로.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현영… 귀파의 제자 중에 그런 여제자가 있다고 들었소.”
“현영 사질을… 말입니까?”
화천기의 말에 추풍개는 의아했다.
장문인의 사질이라면 화산 일대제자란 뜻이었다.
그런 인물을 천하의 개방 장로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기에 이현영이란 화산 일대제자는 없었다. 허나 화산 장문인의 입에서 사질이란 말이 나왔다.
“불러줄 수 있겠소? 물어볼 것이 있소.”
“알겠습니다. 장로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장문 사백님.”
“인사 드리거라. 개방의 추풍개 장로님이시다.”
화천기는 이현영을 오가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그가 한두 번 그녀의 거처를 찾은 적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노개(老丐)를 보니, 그가 자신을 오게 한 이유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화산의… 제자, 이현영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개방의 늙은일세.”
그녀를 본 추풍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그녀의 미색 때문이 아니었다.
기세와 눈빛을 봤기 때문이다.
‘허! 검봉 말고 이런 아이가 또 있었구나. 그것도 화산에…….’
삼봉의 한 명인 검봉 화소군은 말이 필요 없는 여협이었다. 그런 그녀 못지않은 인재가 또 화산에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많은 제자를 두고 있는 개방에서도 이런 인재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추풍개가 부러운 것도 당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16년 전, 천중산에 간 적이 있는가?”
“……!!”
혹시나 하며 물은 추풍개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들은 이현영의 반응은 무척이나 격동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추풍개는 깜짝 놀랐다.
“…대답하기 곤란한 게냐?”
“…아…닙니다. 간 적이 있습니다. 저도 여쭙고 싶습니다. 어찌 그러한 사실을 아십니까. 장로님.”
어찌 보면 건방질 수 있으나 추풍개나 화천기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이 무척이나 격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를 곁에서 지켜본 화천기는 더욱 놀라웠다. 쉽게 감정 변화를 보이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방주님의 명령이었지만, 정확히는 맹의 총군사인 제갈 대협의 부탁이었네.”
“신산 제갈… 어르신께선 어찌…….”
“거기까진 나 역시 모르네. 난 방주님께 자네에 대해서 보고를 드릴 걸세. 그럼 제갈 대협께서 따로 연락하시겠지.”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이현영은 담담한 척했지만,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천중산(天中山). 그녀에게는 정말로 애증의 장소였다.
가족을 모두 잃은 장소가 바로 천중산이기 때문이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가 행방불명된 큰 오빠 이현성뿐이었다.
그런 천중산이 거론되었으니 어찌 그녀가 담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왜 나를… 천중산을 아시는 겁니까.’
* * *
“화, 화산입니까!”
“지, 진정하시오. 한 호법!”
이현영의 소재는 개방의 용두방주를 통해서 제갈윤호에게 전해졌다. 한승의 부탁으로 알아본 그녀가 화산의 제자, 그것도 일대제자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와 화산파 일대제자의 접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보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한승을 보니 더 당황스러웠다.
“죄, 죄송합니다. 총군사님.”
“괜찮소. 한 호법이 원한다면 화산파에 협조를 구해주겠소. 그 이현영이란 소저를 본맹에 보내달라고…….”
제갈윤호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한승이 말을 가로챘다.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화산에…….”
“부상도 완쾌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그래야 합니다. 제가 가야만 합니다. 총군사님.”
단호한 한승의 태도에 제갈윤호는 타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가슴 한편에 비밀 한두 가지는 묻어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꼭 직접 가야겠소? 외상과 달리 내상은 아직 치료가 필요한데 말이오.”
“의약당주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총군사님.”
그는 지금 천중산 장주가 아니라 무림맹 호법이었다.
게다가 총군사인 제갈윤호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훌쩍 떠날 순 없었다.
제갈윤호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그의 내상을 우려한 것이지만, 이렇게 원하는데 막는 것은 오히려 신뢰의 틈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좋소. 허나 한 호법 홀로 다녀오는 것은 허락할 수 없소. 주작당주에게 부탁해서 호위를 붙여줄 테니 같이 다녀오시오.”
“감사합니다. 저는 총군사님께 신세만 지는군요.”
“아니오. 한 호법. 대신 일을 마치면 맹으로 돌아와 주셔야 하오. 한 호법이 맹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소.”
“그게… 알겠습니다.”
한승의 썩 개운치 않은 반응에 제갈윤호는 의아했다.
그를 겪어본 날이 길다고 할 순 없으나 한승은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신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맹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한승은 무림맹 그리고 제갈윤호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림맹의 호법으로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협(俠)과 의(義)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주저하는 반응을 보인 것은 다른 이유였다.
‘그녀가 제 목숨을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16년 전 그날, 자신이 한 결정은 죽어 마땅했다.
그렇기에 이현영이 용서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내어줄 생각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한승이었기에 제갈윤호의 말에 흔쾌히 대답할 수 없었다.
수심에 가득 찬 한승의 얼굴을 보며 제갈윤호는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란 말인가.’
* * *
“헉… 헉… 헉…….”
이현영은 지쳤는지 그녀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무척이나 강력한 파공음에 그 검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 그녀의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검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심란한 심정이 검술에 그대로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어찌 검이 그리 난잡해졌느냐?”
“사…부님?”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이현영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돌려보니 그곳에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바로 사부인 화옥령이었다.
화산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친인 자하검제 화월천의 명으로 평생 사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면벽수련을 명받았다.
그간의 죄를 씻어내란 의미였다.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받아서 사경을 헤매던 이현영이 화산원로인 원량진인의 치료를 받고 깨어났을 땐 이미 화옥령은 면벽수련 중이었다.
수개월 만에 만난 사부의 얼굴을 보자 반가움과 동시에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사부가 두문령(杜門令)과 면벽수련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사부를 못 본 지 몇 개월 되었다고 벌써 해이해진 것이더냐?”
“죄송해요… 사부님.”
엄한 사부의 목소리에 이현영은 움찔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화옥령은 움찔했다.
16년 전, 천중산은 그녀에게도 큰 의미가 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사실 면벽수련 중인 그녀가 잠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추풍개 장로가 화산에 방문한 이후 이현영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화천기는 고민 끝이 장문인의 직권으로 화옥령의 면벽수련을 중단시켰다.
물론 이현영을 달래준 후 다시 면벽수련을 해야 한다.
마음 같아선 누이인 화옥령에게 가해진 금제를 풀어주고 싶으나 전대 화산 장문인이자, 부친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면벽수련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것도 그로서는 큰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랬구나. 그랬어… 그래서…….”
“예? 무슨 말씀이세요?”
화옥령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아니, 장문인께서 널 달래주는 김에 한 가지 사실을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다.”
“장문 사백님께서요?”
“무림맹의 한승 호법께서 본산으로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씀하셨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한승 호법님께서요? 그분이 저를 왜…….”
귀에 익은 이름이었으나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러나 무림맹의 호법이란 분명 대단한 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런 분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화옥령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언젠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후… 지금까지 못 한 이야기가 있단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부님.”
“16년 전, 천중산에서 너를 구했을 때… 당시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단다. 다만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고, 너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생각하진 않았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런데 그 말씀을 지금 왜… 하시나요.”
화옥령의 말에 이현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이현영의 안색을 살피며 화옥령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렇기에 잊었던 것이고 지금까지 네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본산에 방문하신다는 한 대협께서 천중산장의 장주라고 하시더구나.”
“예?”
이현영은 화옥령의 말뜻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에 화옥령은 다시 설명했다.
“당시에 느낀 기척만으로 확실하지는 않으나 나 못지않은 고수 같았다. …내 생각에는 그 기척의 주인이… 그 한 대협이 아닌가 싶다.”
“예? 그게 정말이세요? 그, 그럼 도대체 왜 지켜만 보셨단 말이세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사부 못지않은 고수라면 자신의 가족들에게 그 추악한 짓을 한 자들을 단죄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지켜만 봤단 말인가!
자신의 옆에서 죽은 남동생 이현호가 떠올라서 화가 났다.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분노가 치밀어 몰랐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던 것이 있었다.
“사, 사부님 방금 천중산장의 장주라고 하셨나요!”
“그렇다. 왜 아는 곳이더냐?”
화옥령의 물음에 이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승의 이름이 왜 귀에 익은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6년 전, 그날… 저희 가족은 천중산장에 가고 있었어요.”
“그게 정말이더냐! 도대체 무슨 운명이란 말이더냐…….”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