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이가장. 그것도 장주의 아우라면… 으음…….”
표염춘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술 한잔 얻어먹고 감수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걸 모를 우양이 아니었다.
“표 대인, 나 호조참정입니다. 결코 표 대인께서 섭섭할 일은 없을 겁니다.”
“으음…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 정도 말에도 쉽게 넘어오지 않자 우양은 살짝 당황했다. 고작해야 무림세력인 이가장이었다.
천하의 병조참정이 이 정도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병조참의가 지휘사께 줄을 대려는 듯싶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도지휘사사는 위소(衛所)에 설치하여 각 성의 군정을 실시했다.
위소 중 위가 바로 위지휘사사였다.
지휘사는 위지휘사사의 수장으로 정3품의 고관이었다.
병조의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선 당연히 도지휘사사의 협조가 필요했다.
허나 실질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곳은 위소.
소에 해당되는 천호소의 수장인 정천호야 감히 병조참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휘사라면 상황이 다르다.
병조참의가 지휘사랑 짝짝꿍 한다면 자신들의 상관인 포정사가 어떤 평가를 내리겠는가. 황실에 보고라도 들어간다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황실 입장에서는 참의를 참정으로 올려서 시끄럽지 않게 만드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지휘사 어른은 물론 그 윗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필요한 것이 많을 겝니다.”
“우 대인께서 도와주시겠습니까?”
“표 대인께서 절 도와주신다면야…….”
결국 표염춘은 우양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이 잡은 동아줄이 사실 썩은 동아줄이란 사실을.
* * *
“현호가?”
의원에서 벌어진 일은 이현성에게도 보고되었다.
불한당 한 명 혼꾸멍 내준 일 정도로 이현성에게 보고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대의 배경 때문에 이번에는 예외였다.
“도련님께서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 공자께서 호조참정의 자제라서 본장을 귀찮게 할 수도 있어요.”
“으음…….”
정보를 관리하는 풍운각주인 제갈현지의 말에 이현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웬만한 관리들은 오히려 눈치를 보는 곳이 바로 이가장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종3품의 고관을 부친으로 두고 있었다.
게다가 육조 중 재정을 주관하는 호조의 수장이었다.
이가장이 무림세가였지만 중앙상단이나 신룡표국 등 여러 사업장을 운영한다.
호조참정이 마음먹고 일을 방해한다면 사업장 운영은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비 장인인 문종학에게 부탁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지만, 청렴하기로 유명한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병조참정과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병조참정까지? 본장을 제대로 압박하겠단 심산이로군.”
두 사람이 만난 장소는 정주의 고급기루인 쾌활림이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쾌활림은 이가장, 정확히는 이현성에게 속했다.
당연히 쾌활림에서 흘러나온 정보는 풍운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설사 쾌활림이 아니라고 해도 하급 관리 중에는 풍운각에 정보를 물어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그간 이가장이 풍운각에 많은 투자를 한 덕분이었다.
이현성은 병조참정까지 거론되자 무척이나 불쾌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읽었는지 제갈현지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호조참의를 포섭해볼까요?”
“가능하겠소?”
“마음 같아서는 포정사 어른을 포섭하고 싶으나 그분은 줄을 대기가 쉽지 않아요. 허나 참의라면 쉽진 않겠지만 해볼 만해요.”
호조참정이 호조의 수장이라면 호조참의는 호조의 부수장이었다. 품계도 종4품이었다.
호조참정만은 못하지만 그를 견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 참의의 임무가 참정을 보좌하며 동시에 어긋나지 않게 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의가 호조의 수장되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참정이 영전하거나 반대로 좌천되어야 한다.
즉, 참의에게 참정은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인 셈이었다.
“지원은 필요한 만큼 끌어 써도 좋소.”
“무조건 성공하겠어요.”
관리 등 권력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돈이 들었다.
물론 이가장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일부러 뇌물을 받칠 필요까진 없으나, 사업장들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선 어느 정도는 풀 줄 알아야 한다.
이현성이 추구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굳이 금지시킬 생각도 없었다.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의 정도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내 사람을 건든다면 나도 앞뒤를 안 본다.’
그 시각 그 귀한 해동청이 황궁의 담을 넘었다.
* * *
“이런 어리석은 작자들을 봤나!”
“고정하십시오, 마마.”
한 아름다운 여인이 외모와 어울리지 않은 강렬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녀는 비운의 공주라고 불리는 비화공주(秘花公主) 주가려였다.
외부에서 볼 땐 실권이 없는 그저 그런 공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신분을 모르는 자들의 옅은 생각에 불과했다.
그녀는 구룡검주. 바로 황실의 수호검이었다.
최근 벽을 깨고 초절정지경에 오른 그녀는 더 이상 구룡검이 버겁지 않았다.
물론 황실십대고수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했다. 허나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무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게 고정할 일인가! 가뜩이나 황실이 어지러운데, 그 작자들이 하는 행태를 보게! 이 일로 이 대협과 틀어지면 어떡하려는가!”
“마마, 이 대협이 도와준다면 좋겠지만… 그의 도움이 없다고 해도 폐하는 강하십니다.”
“누가 모르는가. 허나 폐하의 위엄에 손상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려면 이 대협의 도움이 필요하네.”
과거에도 강했으나 지금은 더 강해졌다.
그라면 충분히 황실 십대고수와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주가려는 이현성과의 관계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허나 어림군의 부군장이자 그녀를 보좌하는 태천광은 생각은 달랐다. 황제의 수호군인 어림군과 금의위 그리고 동창 등 황제의 힘은 막강했다.
게다가 구룡검의 맹약자들까지 있었다.
아무리 태태감이라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에게 목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굳이 이현성과 척을 져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네 이름이 거론되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은밀하게 좌도어사께 이 일을 알리게.”
“그가 일을 그르치기 전에 처리할 수 있게 언질 해두겠습니다.”
주가려는 황제의 여동생인 장공주였지만, 공식적으론 실권이 없는 존재다. 그런 그녀나 부군장이 이런 곳에서 거론되면 좋을 게 없었다.
그녀는 유사시를 대비해 존재하는 만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때까진 침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좌도어사(左都御史)는 딱이었다.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이 바로 도찰원(都察院)이고, 좌도어사는 우도어사와 함께 도찰원의 수장이었다.
게다가 주가려에게 이 일을 알린 인물은 도찰원의 감찰어사로, 하남성을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주가려는 이와 같은 일을 대비해서 감찰어사 한 명은 정주에 묶어두었다.
황실에서도 흔치 않은 천리신응이라고 불리는 해동청까지 맡겼다. 그렇기에 하루 만에 정주의 일을 그녀가 바로 알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잘 되었어. 이 일로 빚을 지워둔다면 내 도움을 거절하기 어려울 테니까.’
현재 황실은 겉으론 평화로우나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폭풍의 전야처럼 잠깐의 평화일 뿐이니까.
눈치 빠른 자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태태감의 침묵이 너무 길어졌고, 그가 침묵을 깰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동청 한 마리가 다시 하늘을 날았다.
* * *
“짐을 검사한다고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은 물론 헤집어놔서 못 쓰게 된 상품이 너무 많습니다.”
“상단의 운영에 대한 지적이 너무 많아서…….”
“상부의 특별지시로 이루어진 훈련이라며 미안하다는 부천호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예상대로 이가장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정주는 하남성의 성도인 만큼 출입에 대한 관리가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하다고 한들 상단, 특히 중앙상단에 대한 검사는 엄하지 못했다.
적당히 찔러주는 것도 있고, 중앙상단이 이가장의 상단임을 모르는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검사가 강화된 것은 물론 너무 헤집어놔서 상품들이 상하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가장의 사업장들에 대한 조사가 들어가면서 운영에 방해를 했다.
그나마 믿었던 천호소의 군사들이 관도에서 훈련을 하며 외부 통행까지 제한했다.
상부의 명령이었기에 정천호는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고, 실질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부천호는 이가장에 미안함을 전달했다.
이 정도로 흔들릴 이가장이 아니었지만, 장기간 지속된다면 이가장 입장에서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다들 방법을 강구해주게.”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각주, 참의는 어찌 되었소?”
“우 참정의 방해로 접촉이 쉽지 않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후… 알겠소. 조금 더 빨리 추진을 부탁하오.”
관의 일은 제갈현지도 쉽지 않은지 추진이 더뎠다.
생각보다 우양의 방해가 거셌다. 참정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운이 아님을 보여준 셈이었다.
이가장의 가신들과 머리를 맞대며 방도를 찾고 있으나 쉽지 않았다.
가신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현호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그럼 한 소저가 끌려가는 것이 옳았단 말이더냐! 네 행동은 옳았다.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라! 나 이현성의 아우가 이런 일로 기가 죽어서 쓰겠느냐.”
“형님…….”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장원의 문턱을 넘는 가신들을 봤으니까.
덕분에 자신이 너무 앞뒤 보지 않고 행동했나 싶었다.
무림이나 관이나 강자존의 세계였다.
허나 무림의 힘이 무력이라면 관의 힘은 권력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쓰기에 이현호는 너무 순수했다. 그렇기에 그가 마음에 담은 죄송함은 너무도 클 수밖에 없었다.
축 처진 이현호의 어깨를 보며 이현성은 더욱 화가 났다.
‘암살을 해버릴까. 후… 아니야. 암살은 최악 중에 최악의 상황까지 꺼내서는 안 되는 패야.’
우양을 암살하는 일 따윈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명색이 고관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도찰원과 동창이 움직일 것이고, 이현성과의 연결고리가 발견될 수도 있었다.
물론 이현성은 흔적을 남길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으나 도찰원과 동창은 만만하게 볼 자들이 아니었다.
황실과의 마찰은 장인인 문종학에게 흠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하… 일가를 이끈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구나.’
* * *
“자넨가, 독대를 신청한 자가?”
“감찰어사 윤평이 포정사(布正使) 어른을 뵙습니다.”
포정사는 승선포정사사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각 성의 최고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육조의 참정은 물론 안찰사나 도지휘사도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거물 중에 거물이었다.
그런 포정사에게 독대를 신청한 사람이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