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내가 언제 천진룡 대장군을 모욕했더냐! 대장군을 모욕한 것은 네놈이다! 아비 이름에 빌붙어서 사는 놈이 제 아비의 얼굴에 똥칠을 했으면서 어디서 감히 큰소리를 치는 것이더냐!”
그의 호통은 천신의 고함처럼 객당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었다. 태어나서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던 천운현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천운현이 검을 뽑았다.
비록 이현성에게 아비 이름에 빌붙어서 산다는 말을 들었지만, 명색이 천진룡 대장군의 아들이자 천씨세가의 미래라고 불리는 그였다.
친형인 천운성과 가주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립의 나이로 백호소를 맡은 것은 단순히 가문의 입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능력이 백호(百戶)로서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술이나 지휘능력에 한한 말이 아니었다.
무위 역시 절정지경에 오른 뛰어난 고수이기도 했다.
천운현의 분노가 담긴 검은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현성을 베려고 했다.
“이리도 쉽게 평정심을 잃다니. 무인으로서도 지휘관으로서도 부족하군.”
“크윽…! 놔, 놔라!”
호위장수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검기가 어린 검을 손가락만으로 잡아낸 이현성은 그들의 눈에는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에 잡힌 검을 빼내려고 낑낑거리는 천운현을 보며 이현성은 손가락을 벌렸다.
그러자 당기던 힘에 의해 천운현은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또 없었다.
결국 눈이 뒤집어진 천운현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고, 공자님!”
“진정… 진정하십시오!”
발광하는 천운현을 보며 호위장수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힘으로 제압하려다가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현성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천운현의 검을 피하기만 했다.
그도 사람인지라 천운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를 도발하긴 했으나 상대는 천진룡 대장군의 아들이었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귀찮아질 수 있기에 피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그의 검 때문에 객당 여기저기가 베이고 부서지니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할 수밖에…….’
그의 진상 짓을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었던 이현성은 결국 손을 쓰기로 결정했다.
“죽어! 죽어! 죽으라고!”
“후… 내 잘못이 아니오. …음?”
이현성이 손을 쓰려는 순간 그의 기감에 잡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인간, 그것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수의 기척이었다. 살기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현성은 손을 쓰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후한 분위기의 노인이었다. 그는 눈이 뒤집어져서 발광하는 천운현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이현성은 이 노고수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뒤에 있던 호위장수들이 노고수의 정체를 밝혔기 때문이다.
“집사장님께서 여긴 어일 일로 …컥!”
“무능력한 놈들! 도련님도 잘 보필 못 해서 가주 어른께서 노하게 만들어!”
“죄, 죄송합니다. 집사장님.”
“요, 용서해주십시오.”
집사장이란 노고수에게 정강이를 차인 호위장수들은 낑낑거리며 오히려 용서를 구했다.
노고수는 바로 천씨세가의 집사장이었다.
집사란 천씨세가의 직계혈족을 보필하는 자들로, 하나 같이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특히 눈앞의 집사장은 전대 가주의 부관으로 은퇴 후 천씨세가의 집사장이 된 인물이었다. 초절정고수인 노고수가 집사장으로 있단 말은 천씨세가의 저력을 다시 한번 일깨주었다.
“저희 도련님의 무례를 이 늙은이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공자께서 무례하셨으나 어찌 어르신께 사과를 받겠습니까. 없었던 일로 할 테니, 그만 공자님을 데려가셨으면 합니다.”
현역시절에는 장군이라고 불렸으며 현재는 천씨세가의 집사장으로서 수많은 후학의 존경을 받는 그였다.
그런 자신 앞에서 천운현의 무례를 꼬집는 행동은 무척이나 건방지다고 볼 수 있으나 집사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대 가주를 보필했고, 당대 가주의 봐온 자로서 이현성에게서 그만한 자격과 그릇을 엿봤기 때문이다.
“가주 어른께서도 시끄럽게 만들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다. 장주께서도 허락하시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어르신.”
집사장이 천운현을 안고 나가자 그 뒤를 호위장수들이 뒤따랐다. 그들이 장원을 벗어나지 이현성은 한숨이 나왔다.
“괜한 짓을 벌였나. 안 그래도 신경 쓸데가 많은데…….”
관과 무림이 불가침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다.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가장이 아무리 정주 관리들조차 조심스러워한다고 하지만 좌군도독이자 동부 총사령관인 천진룡 대장군은 버거운 상대였다.
천운현이 문교교와 혼사를 치를 뻔했다는 것이 떠올라서 도발한 것인데, 일이 커질 뻔했다.
그 역시 인간이며 사내였던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 * *
“이런 머저리 같은 놈!”
지급으로 전해진 집사장의 서신에 천진룡 대장군은 불같이 화를 냈다.
물론 그의 분노가 집사장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문종학에게 지운 빚이 다 소용없게 되었잖아!”
늦기 전에 천운현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집사장을 움직였다. 가문의 일로 남의 손을 빌릴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늦었는지 이미 사고를 친 후였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천운현이 이가장을 찾아가서 난리를 피운 일이 내각대학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각대학사의 사과가 담긴 서신을 받으며 빚을 지웠다.
문종학, 그가 누군가. 실무 행정을 지휘하는 육부조차 움직일 수 있는 내각대학사였다.
그에게 지운 빚은 분명 크게 쓰일 것이 분명했다.
헌데 멍청한 아들놈이 다 망쳐놓았다.
그러니 그가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관!”
“예! 대장군!”
천진룡 대장군의 부름을 받고 중년 무장이 다가왔다.
대장군을 보좌하는 부관이자,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당연히 동부군만이 아니라 천씨세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놈을 군에서 파면시키고, 본가에서 근신시켜! 내가 허락할 때까지 본가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하고!”
“대장군. 파면 대신 휴직으로 마무리 지으시지요.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대장군의 힘이라면 일개 장수를 파면시키고 복권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도 있기에 부관은 파면 대신 휴직을 권했다. 천운현의 흠은 곧 부친인 천진룡 장군의 흠이 될 테니까.
“끄응… 그렇게 하게.”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렇게 천운현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천씨세가의 절대권력자인 천진룡 대장군의 눈 밖에 난 이상 그가 미래를 꿈꾸는 것은 허락되지 않을 테니까.
“후… 용불군 그놈을 넘어서기 위해선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는 건가.”
대장군 중에서도 최고라고 칭송받는 천진룡 대장군조차 넘지 못한 벽이 있었다. 그는 바로 용불군. 용씨세가의 주인이자 북방군의 총사령관.
대대로 두 가문은 비교되었다. 그 차이는 종이 한장 차이만큼 작기에 감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천씨세가는 그들에게 경쟁의식이 강했다.
하늘의 태양은 오직 하나라 생각해서였다.
천진룡 대장군. 그리고 천씨세가의 오랜 꿈이 바로 용씨세가를 발아래 두고, 군부제일의 칭호를 독식하는 것이다. 강한 열망이 그의 눈을 어지럽히는지 천진룡 대장군은 건너서는 안 되는 결정을 내리려고 했다.
* * *
“몸은 좀 어떻소. 한 호법.”
“많이 좋아졌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림맹 청룡당 고수들이 혁련세가를 공격한 지도 족히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이란 시간 동안 무림맹 안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갑작스러운 청룡당의 출동과 어마어마한 피해.
그리고 그에 대한 후속조치 등 많은 일이 있었다.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총군사인 제갈윤호의 몫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혁련세가 공격의 큰 공적을 세운 한승은 치료를 받았다.
초절정고수와 그에 근접한 고수들의 합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그가 입은 내상은 한두 달만으로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명의 중의 명의라는 약선의 의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움직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맹을 위해서 한 호법이 해줘야 할 일이 많소. 빨리 회복해서 도와주시오.”
“절 너무 높게 평가하시니,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수라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겸양을 보여주는 한승의 모습이 제갈윤호는 마음에 들었다.
한승 역시 자신을 인정해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기 위해 제갈윤호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아니오. 한 호법은 그럴 자격이 있소. 그건 그렇고 한 호법이 부탁한 일은 개방에 협조를 구했으나 아직은 이렇다 할 보고가 없소.”
“그렇습니까.”
한승은 무림맹의 호법으로 활동하기에 앞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16년 전 사라진 이현영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무척이나 수고스러운 일이었지만, 초절정고수 한 명을 영입하기 위한 조건으로선 무리한 조건도 아니었다.
제갈윤호는 흔쾌히 수락했고, 실제로 개방을 통해서 조사 중이었다. 허나 1, 2년도 아니고 무려 16년 전의 일이기에 아무리 개방이라도 조사가 쉽지 않은 듯싶었다.
한승 역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지 크게 실망하는 기색도 없었다.
“개방에서 신경을 써주기로 약속했으니 언젠가는 찾아낼 것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호법의 딸은 아닐 테고… 중요한 사람이오?”
“중요하다… 그렇지요. 매우 중요한 사람이지요.”
대답하는 한승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모습에 제갈윤호는 더 이상 묻는 것은 큰 실례일 수 있단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하…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미 지난 과거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후회스러웠다. 당시의 그런 어리석은 선택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용서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 내 목숨이라도…….’
* * *
“많이 아프셨을 텐데, 이렇게 될 때까지 참으셨어요? 다음부터는 바로바로 오세요. 언제든 치료해드릴 테니까요.”
이가장의 별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의독선생 종리우와 한은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이가장의 무인들을 위시한 가솔들이 그들의 치료를 받았다.
그러더니 신룡표국, 중앙상단 등 이가장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가솔들까지 찾아왔다.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술 실력이 워낙 좋으니 본가인 이가장에 모여든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면 다행인데, 이젠 이가장과 연관 없는 정주 백성들까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부인을 장원에 무분별하게 들일 수 없기에 통제를 했다.
허나 모여드는 사람이 많자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가장 바로 옆에 아예 의원(醫院)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의원에도 경비대원을 세우고, 전문약초꾼들을 대거 고용하는 수고가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