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이렇게 빨리 비무를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반응해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가솔들이 큰일을 당한 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닌지라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아닐세. 나는 어디든 상관없네.”
이현성은 제갈인겸과 함께 인근 산으로 왔다.
제갈인겸이 그에게 원하는 것이 가벼운 비무가 아닌 실전에 가까운 비무임을 알기 때문이다.
두 초절정고수의 비무.
그것도 실전에 가까운 비무라면 당연히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평범할 리가 없었다.
그들의 비무가 혁련세가의 습격으로 인해 전우이자 남편이자 아비를 잃은 가솔들에게 슬픈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수고스럽지만, 인근 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제갈인겸으로서도 중요한 것은 이현성과의 비무이지 자리 따윈 중요치 않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제갈인겸은 검을 뽑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선배의 아량으로 삼초를 양보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주게나.”
“괜찮습니다. 제갈 대협.”
자존심이야말로 정파인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제갈인겸은 삼초의 양보라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눈앞의 신검은 강호칠기에 속한 부친조차 인정한 강자였다.
이현성은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초를 양보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현실을 읽지 못한 채, 만용만 부리는 자일 테니까.
이현성은 그를 처백부가 아닌 제갈 대협이라 칭했다.
제갈현지와의 혼사를 파혼하겠단 의미가 아니었다.
처백부가 아닌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서 상대하겠단 의지였다.
그것을 알기에 제갈인겸은 오히려 마음이 뜨거워졌다.
호승심이 불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게!”
“…갑니다!”
제갈인겸은 이현성에게 선수를 양보했다.
그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현성도 거절하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는 그의 검은 빨랐다.
암천살무의 일점혈을 펼친 것이 아닌 기본적인 찌르기였다.
그럼에도 그 어떤 쾌검보다 빨랐다.
이미 그의 검은 형(形)과 식(式)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형과 식을 완전히 버린 무초식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허나 초식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검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단 뜻이었다.
챙!
“크윽!”
이현성의 빠른 검도 제갈인겸의 검에 막혔다.
허나 막아내는 충격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검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빠름 속에 무거움을 담고 있었다.
고차원의 무리가 담긴 검법이 아닌 기본의 검임에도 그러했다.
‘강하다! 정말… 강해…….’
일검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현성이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주눅이 들거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하합!!”
제갈인겸은 이현성처럼 기본의 검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는지 대천성검법을 펼쳤다.
제갈세가를 대표할 정도로 뛰어난 검법이었다.
수년 전, 제갈현도를 통해서 봤던 대천성검법과는 격이 달랐다.
그의 대천성검법이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면 제갈인겸의 대천성검법은 완성에 가까웠다.
채챙! 챙챙!!
이현성 역시 인정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기본의 검으로 제갈인겸의 대천성검법을 감당했다.
그렇다고 한들 제갈인겸은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했다.
후배임에도 자신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검이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감탄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보여줌세. 나의 검을…….’
그 순간 제갈인겸의 기세가 바뀌었다.
대천성신공을 거두고 천지호연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대천성신공과 천지호연심법은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없었다.
두 무학은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천성신공 대신 천지호연심공을 운용한 것은 바로 천지호연검법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그녀와 같은 기운이구나.’
제갈현지는 제갈인겸과 달리 하나의 심법만 익혔다.
그건 바로 천지호연심법이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제갈인겸이 천지호연심법을 운용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심법을 바꾼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에 이현성은 검파를 꽉 쥐었다.
제갈세가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지호연검법을 기본의 검으로 깨부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처백부가 될 제갈인겸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제갈인겸의 검에는 더욱 밝고 선명한 검강이 완성되었다.
“천지…호연……!!”
“흐흡… 후…….”
이름처럼 천지의 기운이 가득 찬 검법이었다.
하늘을 닮은 남궁세가의 검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 위대한 기운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도 이현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느릿하게 검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결코 여유롭지 않았다.
그 강렬함에 극한의 천지호연검법을 펼치고 있는 제갈인겸이 긴장할 정도였다.
“혼원(混元)…주천(周天).”
두 사람의 검이 충돌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강력한 검강들이 충돌했음에도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광음도 거대한 반발력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제갈인겸이 펼친 천지호연검강이 이현성의 검의 주변을 빠르게 돌더니 서서히 사라질 뿐이었다.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제갈인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도대체…….”
“후후… 생각보다 쓸 만하군.”
제갈인겸은 몰랐다.
지금 펼친 검술은 이현성도 머릿속으로만 익혔을 뿐 실제로 펼친 것은 처음이라는 사실을.
혼원주천(混元周天).
이현성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절세검법인 혼원검결의 한 초식이었다.
정확히는 기존의 혼원검결을 토대로 여러 무리를 접목시켜 한층 더 진화되었다.
특히 남의 힘을 빌려서 상대를 공격하는 차력미기(借力彌氣)의 무리가 담겨서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무서운 검술은 없었다.
천라지망(天羅地網) 등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만족하셨습니까? 처백부님.”
“하… 졌네. 완전히 졌어!”
비무가 끝났기 때문인지 그를 부르는 이현성의 호칭 역시 바뀌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자신과 달리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를 보며 제갈인겸은 혀를 내둘렀다.
‘이미 괴물이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거 더하잖아. 하… 부끄럽네. 같은 신검인데… 이리도 차이가 나다니. 아니야. 그라면 언젠가 검신이라고 불릴 테니 그럴 필요가 없나.’
제갈인겸은 이현성의 신위에 다시 한번 놀랐다.
처음부터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명할 줄은 몰랐다.
현 무림에서 신검이란 별호를 가진 자는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천지신검(天地神劍) 제갈인겸, 칠매신검(七梅神劍) 화천기.
그리고 신검(神劍) 이현성.
그 외에도 몇몇이 더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이현성과 견줄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니, 무림원로 중에서도 흔치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언젠가 그는 검신이라 불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검(神劍)과 검신(劍神).
고작 글자 순서의 차이뿐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달랐다.
신검이 잘 벼려진 검이라면, 검신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검의 극치였다.
즉, 검신이야 말로 천하제일검이었다.
‘이런 녀석이 내 질서란 말이지?’
이현성이 제갈현지 외에 문교교와도 혼사를 치른다는 점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그였기에 제갈현지 혼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갈인겸은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물었다.
“그래. 우리 현지와 언제 혼사를 치를 생각인가?”
* * *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숙부님.”
제갈인겸은 규염을 찾아갔다.
문안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규염은 제갈세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부친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었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까지 제갈세가에서 지내기도 했다.
게다가 초절정고수인 제갈인겸에게 가르침을 줄 사람은 부친 아니면 규염뿐이었다.
제갈세가의 혈족 중에서 규염과 친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그래서 예전부터 숙부라 부르며 나름 친분을 과시했다.
“빨리도 물어본다. 이 녀석아.”
“죄송합니다.”
규염의 핀잔에 제갈인겸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책망이 담긴 말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런 속 좁은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보다 어떤가. 우리 장주는?”
“기대 이상 아니,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숙부님.”
“그렇지. 우리 장주가 대단하지. 하하하.”
제갈인겸은 규염의 말에 기분이 묘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제갈세가에서 빈객으로 지낼 때도 최소한의 선을 유지했다.
물론 제갈현지는 제외되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우리 장주’라는 말이 나오니 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한참 웃던 규염의 얼굴이 진중하게 변했다.
“겸이 네 녀석도 알겠지만, 요즘 무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예. 가주에게 들었습니다.”
“이 늙은이의 감으로는 곧 난세가 찾아올 걸세. 난세는…….”
“…영웅을 탄생시키지요.”
제갈인겸의 말에 규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의 평화는 제법 길었다.
평화는 나태함과 방심을 일으킨다.
나태함과 방심은 결국 틈을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난세라는 혼돈의 시기를 부른다.
“대비하지 않는다면 난세라는 괴물에 먹혀버릴 것이고, 이겨낸다면 영웅이라 불리게 될 걸세. …장주는 분명 영웅이라 불리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네. …영웅의 곁은 가장 위험하지.”
“아버님과 가주 역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제갈인겸의 말에 규염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네. 아니, 그 이상일세. 제갈세가의 기반이 흔들릴지도 모르네. 각오가 되어 있나?”
“…본가의 무력이 다른 오대세가에 비해 부족함에도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각오 그리고 대비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갈세가(諸葛世家).
분명 오대세가의 한 가문이지만, 나머지 네 가문에 비하면 무가(武家)로서의 수준 차이가 컸다.
오히려 십대세가라 불리는 다른 다섯 가문과 비슷하거나 조금 열세였다.
그럼에도 제갈세가는 당당히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의 진정한 힘은 칼이 아닌 붓과 혀이기 때문이다.
“좋아!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어. 이제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한잔하세나.”
* * *
“그렇게 멀뚱히 있지 말고 차를 드셔도 돼요. 한 소저.”
한은설은 예상치 못한 제갈현지의 부름을 받고 풍운각으로 왔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친분이 없는 제갈현지의 의도를 알지 못해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차를 권해주니 한은설은 자신에게 내어준 차를 마셨다.
“한 소저께서 식솔들에게 의술을 베푸셨다고 들었어요.”
“아… 주제가 넘었다면…….”
당황해하는 한은설을 보며 제갈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