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그렇기에 장원 식솔 모두 아는 사실을 그만 모르고 있었다.
제갈현지가 장주 부인이 될 여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형수님…이셨군요. 제가 형수님께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셨으면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주셨으면 해요. 도련님.”
예상치 못한 제갈현지의 직설에 이현호는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아무리 존경하는 형님의 부인이 될 사람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감히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말로 그녀는 아직 정식으로 형수가 된 것도 아니다.
허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이현호는 얼굴이 굳어졌다.
“가가께서 무척 힘들어 하셔요.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가솔들이 많이 상한 것을 스스로 책망하시거든요. 게다가 아가씨를 진즉에 찾지 못함을 한탄하세요. 저로선 가가의 힘이 되어드리지 못하는 부분도 있답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 도와주세요. 도련님은 가가의 친아우시잖아요.”
그렇다. 힘든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형님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괴로움에 주변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이현호의 눈에 자신에게 미안해하며 말하는 제갈현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가 얼마나 고민해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현호는 부끄러웠다.
감히 형수님을 탓하려는 어리석은 마음이 너무 부끄러웠다.
“죄송해요. 도련님… 제가 주제 넘는 말을 해서…….”
“아닙니다. 형수님. 감사합니다. 절 일깨워주셔서…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아직 형님의 얼굴을 뵙기에는 제가 아직 떳떳하지 못합니다.”
괜찮은 척하며 이현성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속에 남은 앙금을 모두 씻어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형님을 만나고 싶었다.
제갈현지는 이현호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이에요. 그리고 오늘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가가께 제가 혼이 난답니다.”
“걱정 마십시오. 형수님.”
제갈현지가 돌아간 후 이현호는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참 못났구나. 나는… 주변에 걱정만 끼치고…….”
이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거처로 들어갔다.
그는 몰랐다. 그런 자신을 지켜보는 여인이 있음을.
“후… 저 역할은 원래 내가 했어야 했는데…….”
여인은 얼마 전부터 이가장에 신세를 지고 있는 한은설이었다.
장주인 이현성으로부터 이현호에게로의 접근을 금지 당했기에 이렇게 멀리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이현성이 묵인해줬을 뿐, 그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그녀의 존재를 이현호가 모를 수 없었다.
한은설도 나이에 비해 뛰어나지만, 이현호처럼 절정지경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의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이기에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현아… 미안해. 내가 아버지 대신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 * *
“왜 안 된단 말인가!”
혈천의 대호법인 혁련중광이 대군사인 문인윤걸을 찾아왔다.
회의를 열기 전에 그와 협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무위는 화경에 오른 혈천 삼대고수에 미치지 못하지만, 대군사의 직위는 그에 견줄 만했다.
그렇기에 그만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회의가 제법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군사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혈살객은 십삼세(十三勢) 어느 한 곳을 위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대호법께서 원하시는 수준은 육관의 혈살객들입니다. 아시겠지만 그들은 아직 각성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후. 녀석은 내 손자일세. 그 아이는 각성하지 않았는가! 더 많은 지원도 아니라 그 아이만 지원해 달라는 말일세.”
혈살육관의 열일곱 명에겐 혈천신단을 복용시켰다.
문제는 혈천신단을 복용했다고 모두 약효를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체질은 물론 경지가 올려주는 만큼 약효를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했다.
괜히 혈살육관에 오른 인재에게만 복용시킨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열일곱 중 벌써 일곱이 혈천신단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혈천에선 혈천신단의 기운을 소화한 경우를 각성(覺醒)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단 한 명이 각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바로 혁련후. 혁련중광의 차손이었다.
친형인 혁련휘조차 아직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는 비록 혈천신단의 힘을 빌렸다고 하지만 초절정지경에 오른 것이다.
혁련중광이라면 아무리 귀하다고 한들 혈천신단을 구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혁련휘에겐 복용시키지 않았다.
각성에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신단을 아끼는 장손에게 복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잔혹한 말이지만, 같은 손자임에도 그는 여전히 혁련후보다 혁련휘를 더 아꼈다.
“각성했으나 아직 기운을 완전히 소화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게다가 그는 대호법님의 손자이기 이전에 혈살객입니다. …저는 대호법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네… 끝까지 나와 척을 지겠단 말로 이해해도 되겠는가?”
자신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도 끝까지 거절하는 대군사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결국 실력행사라도 하려는지 압박을 가하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대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힘으론 그에게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도와드리려고 해도 부천주님과 대장로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자네에게 도와달라는 것이 아닌가!”
“…손풍각을 움직일 수 있게 도와드린 것으로 저 역시 비난을 받았습니다. 혈살객까지 지원한다면 아무리 저라도 힘듭니다. 양해해주십시오.”
“끙… 후… 알겠네.”
혁련중광은 더 이상 대군사 문인윤걸에게 부탁할 수 없었다.
애초 혈살객. 그것도 각성한 혈살객을 지원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자신은 팔각 중 손풍각을 움직인 전력이 있었다.
손풍각이라도 온전했다면 몰라도 전멸한 이상 더 이상 억지는 통하지 않았다.
억지를 허용할 부천주와 대장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혁련중광은 짜증이 났다.
“멍청한 놈, 본가를 잃다니…….”
혁련중광이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혁련세가의 본가가 무너진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자는 있었다. 허나 그 수가 고작 수십에 불과했다.
본가의 무인이 수백이나 되었음에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친아들인 혁련용후의 능력을 믿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실책이었다.
물론 그간 혁련용후가 손을 써서 하남성 곳곳에 포섭한 세력 및 고수들도 남아 있고, 혈천 총단에서 혁련중광을 보좌하는 고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혁련세가의 본가를 잃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간 혁련세가에서도 몇 없는 초절정고수 둘과 근접한 원로들. 그리고 가신들을 여럿 잃었다.
혁련중광이 없었다면 혈천십삼세의 자리조차 유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하남성을 포기할 수 없으니… 환마십검(幻魔十劍)을 보낼 수밖에…….”
혈천십삼세의 주인들은 혈천 내에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혁련중광 역시 다르지 않았다.
혁련세가의 정예이자 혁련중광의 친위대인 환마검위대는 물론 혈천삼십육대 중 넷을 휘하에 두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환마십검이란 비밀병기를 탄생시켰다.
오욕칠정을 제거당한 채 오직 명령에 따르는 인검(人劍)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감정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으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진정한 인검이었다.
혁련중광이 숨겨준 비장의 패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깝지만 혁련중광은 그들 환마십검을 내놓을 생각이다.
혁련용후를 아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뒤를 단단히 받치지 못하면 자신의 꿈은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망할 놈…! 마지막 기회조차 망친다면 네놈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친아들조차 권력의 도구로 생각하는 혁련중광.
그만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모여 있는 욕망의 바다가 바로 혈천이었다.
욕망이야말로 혈천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 시각 이가장은 또 한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허험… 만나서 반갑네.”
머쓱한 얼굴로 인사를 하는 인물은 바로 제갈인겸.
제갈현지의 백부이자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검객인 천지신검이었다.
제갈세가가 호북성의 북부에 있다고 한들, 하남성 정주까지 한 달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물론 민초들의 걸음 속도 기준이었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보름 만에 이가장에 온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는 이현성을 만나고 싶었다.
이현성의 검술도 기대가 되었지만, 그간 폐관수련으로 쌓은 자신의 검술이 얼마나 통할지 역시 기대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가장을 이끌고 있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이현성은 처음이란 표현을 했으나 사실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니었다.
진주언가의 전대 가주인 권군 언규철의 고희연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제갈인겸이 언규철에게 선물 받은 보검(혼원신검)을 빼앗기 위해서 유령살군이 습격을 했다.
그때 그를 구해준 복면인이 바로 이현성이었다.
다만 복면 때문에 제갈인겸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가장의 일은 이미 질녀의 서신을 통해 알았네. 허나 혼사와 같은 큰일을 마냥 기다릴 수 없기에 내가 왔네. 부담스럽지 않지? 질서(姪壻).”
“물론입니다. 처백부(妻伯父)님.”
제갈세가의 보물이라는 제갈현지가 다른 여인과 함께 한 사내를 모신다는 점이 걸렸지만, 본인은 물론 부친인 동생까지 수락한 마당에 자신이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갈인겸은 혼사를 허락한다는 의미로 질서(조카사위)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에 이현성 역시 그를 처백부라고 부름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정해졌다.
이 상황에서 가장 당황하는 사람은 바로 제갈현지였다.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 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식은커녕 혼사조차 하지 않은 제갈인겸이었기에 질녀인 자신을 무척 아꼈다.
그렇기에 혹시 반대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너무 얼렁뚱땅 허락하니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다.
“흠흠… 네가 이가장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한가하냐?”
“예? 그건 아니에요. 다만… 백부님이 오셔서…….”
“난 질서와 할 얘기가 있으니, 넌 네 볼일을 보거라.”
“예? 예… 알겠습니다.”
오늘 따라 이상한 백부의 축객령에 제갈현지는 이현성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눈짓으로 허락하자, 제갈현지가 인사를 한 후 풍운각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현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처백부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하십시오.”
“흐흠… 티가 많이 났던가? 그럼 질질 끌지 않고 말하겠네. 나와 비무를 해주게나.”
머쓱해하면 제갈인겸은 용무를 밝혔다.
두 사람의 혼사 허락은 어차피 빌미에 불과했다.
그의 목적은 바로 이현성과의 비무. 그것을 밝혔다.
무림맹에서 이미 제갈인섭에게 그와의 비무를 부탁받았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처백부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이 없기에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하하… 고맙네.”
자신이 부탁한 것이지만, 이현성 역시 일가의 주인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