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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살수-173화 (173/314)

173화.

평생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아온 그의 유일한 오점이며, 평생의 한이 바로 그녀를 구하지 않은 점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가주의 청 때문에 살려서 제압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혁련중한은 검강 사용을 자제했다.

한승을 살려서 제압해 달라는 혁련용후의 부탁 때문이다. 그는 혁련용후의 의중을 알기에 가능하면 한승을 살려서 제압할 생각이었다.

초절정고수는 그만큼 무리를 해서라도 제압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생각이 바뀌었다.

피를 봤기 때문인지 그를 죽이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혁련중한의 뜻을 받아들였는지 다른 두 원로 역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들의 검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어렸다.

검기가 실처럼 가늘어졌다. 바로 검사(劍絲)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검사가 다시 검을 휘감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검사는 검강이 되었다.

물론 깨달음 없이 막대한 내공으로 검강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만… 죽어라!!”

세 원로가 펼친 검강들은 당장이라도 한승을 난도질할 것만 같았다. 실제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한승은 시체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승은 왼손으로 검두(劍頭)를 바쳤다.

오른팔의 상처로 인해 검을 놓칠 것을 염두에 뒀다.

그렇다.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한승은 최후의 일검을 펼쳤다.

“후… 천검…무적(天劍無敵)!”

콰쾅! 콰콰쾅!!

네 고수가 펼친 검강의 향연은 거대한 충격을 일으켰다. 몽혼혈라진으로 보호받고 있는 공간이 순간적으로 흔들릴 정도였다.

하물며 그 중심에 있던 네 사람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한승은 물론 혁련세가의 세 원로들은 나가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기절하거나 피를 토하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우웩!!”

“으흠… 죽여… 주마!”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 있었으나 이미 움직일 여력이 없는 한승과 달리 혁련중한은 검에 의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한승의 목을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인 셈이었다. 느릿느릿 한승의 곁으로 간 혁련중한은 검을 추켜세웠다.

“그만 죽어…….”

콰쾅!!!

혁련중한이 한승의 목숨을 취하려는 순간 광음과 함께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결코 혁련세가 고수들의 기척이 아니었다.

믿기지 않았으나 그들은 무림맹 고수들이었다.

조금 전 광음과 함께 몽혼혈라진이 깨진 탓이다.

한승 등 네 고수들의 격돌로 몽혼혈라진이 흔들린 덕분에 무림맹 고수들이 몽혼혈등을 부술 수 있었다.

“젠장! 네놈이라도 죽이고… 큭!”

“아미타불… 한 시주시오? 그만 쉬셔도 됩니다. 뒤는 저희가 맡겠소.”

혁련중한은 한승의 목만은 취하려고 했으나 누군가의 방해로 인해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청룡당주인 공운대사였다. 그만은 한승의 존재를 언질받았기에 적으로 오인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한승은 공운대사의 자비로운 목소리에 그제야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놔버렸다.

물밀듯이 들이닥친 청룡당 고수들은 죽거나 다친 주작당 고수들과 한승을 보호하는 한편, 혁련세가 고수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탈출 준비를 하던 혁련세가 고수들은 무방비하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놈들!!”

“안 됩니다! 가주님! 고정하십시오!!”

외원고수들에 이어서 내원고수들까지 잃을 판이었다.

외원에 비해 그 수는 절반도 되지 않으나 내원고수들은 하나 같이 정예였다. 저들까지 잃는다면 혁련세가를 다시 일으킬 시기가 한참 뒤로 미루어진다.

그러니 침착한 혁련용후라도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잠혼 놔라! 저놈들을 한 놈도 살려둘 수 없다!!”

“아니 됩니다! 가주께서 떠나셔야 합니다! 후일을 도모하소서!”

혁련용후는 알려진 것보다 더 뛰어난 고수였다.

그라면 저들 중 절반을 안고 갈 수 있었다.

허나 그래선 아니 된다.

무림맹 고수 일부를 죽이는 것보다 그가 살아 돌아가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으로 혁련세가를 위한 일이었다.

혁련용후라고 그걸 모를 리 없으나 저들을 놔두고 도주하기에는 이 치욕을 참을 수 없었다.

빠드득.

“후… 가세나. 잠혼.”

결국 혁련용후는 분노를 억눌렀다.

후일을 도모해 복수하는 것을 선택했다.

혈천의 대호법인 부친의 도움을 받으면 복수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테니까.

“…먼저 가십시오. 시간을 벌겠습니다.”

“잠혼!!”

혁련용후의 심복인 잠혼은 그와 함께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떠날 수가 없었다.

혁련용후가 비밀통로로 떠날 시간을 벌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잠혼은 혁련용후의 외침을 무시한 채 움직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혁련용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심복인 잠혼까지 포기하면서 제 목숨을 건사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네 복수는 기필코 내 손으로 해주마.”

그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혁련용후는 떠났다. 그러는 사이 잠혼이 외쳤다.

“본가의 자랑스러운 무인이여! 전원 혈안공(血眼功)을 운용해라!”

“존…명!”

잠혼의 명령에 아직 제압되지 않은 혁련세가 고수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들의 눈이 붉게 변했다.

허나 단순히 눈동자의 색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기세 자체가 바뀌었다. 진원진기를 끌어올린 부작용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고작 눈이 붉어지는 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혈기가 뇌까지 영향을 주어서 마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대신 평소의 세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정예라고 할 수 있는 혁련세가의 내원고수들이었다.

혈안공을 운용한 그들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었다.

“죽어… 큭!”

“헉! 이 괴물들은 뭐야!”

청룡당 고수들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혈안공을 운용한 혁련세가 내원고수들은 이미 괴물들이었다.

따라서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아미타불……!”

“으윽!”

“커억!!”

심상치 않음을 느낀 공운대사가 사자후(獅子吼)로 불호를 읊었다. 마를 제압하는 소림의 사자후는 잠시나마 혁련세가 내원고수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 짧은 시간도 청룡당 고수들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비밀통로로 도주하던 혁련용후 역시 공운대사의 사자후를 들었다.

‘이 빚… 기필코 갚아주마! 기필코!’

암류

“허… 설마 이 정도로 큰 희생이 날 줄은 몰랐군.”

“죄송합니다. 맹주님. 제 계산 착옵니다.”

혈천의 한축인 혁련세가를 무너트렸다.

무척이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발생한 청룡당의 피해 역시 극심했다.

일백 이상의 희생과 일백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나머지 역시 차이는 있으나 멀쩡하진 못했다.

무림맹 최고라는 청룡당이 입은 피해였기에 가슴이 아팠다.

만약을 대비해서 초절정고수인 한승을 지원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그만큼 혁련세가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주에게 반발심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물어뜯을 명분을 준 셈이기도 했다.

“아닐세. 제갈 군사의 잘못이 아니네. 적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니. 한 줄기에 불과한 혁련세가를 무너트린 대가가 이 정도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를지 모르겠군.”

“…맹주님.”

백무강은 더 많은 피를 요구해야 한다.

무림평화라는 명분 아래에 그래야만 했다.

대의임에도 그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화경고수인 그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한 호법은 어떤가?”

“생각보다 부상이 심각한 듯합니다. 그래도 의약당주이신 약선이시라면 능히 치료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무림맹 의약당주는 강호칠기의 한 명인 약선(藥仙)이다.

강호칠기 중 무위는 가장 낮으나 그의 전공은 무학이 아닌 의술.

특히 약초술과 약제술에 한해서는 3대 신의보다 뛰어나다는 인물이었다.

그런 약선이라면 비록 부상이 극심하지만 한승을 무사히 회복시킬 거라고 판단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네. 신경을 써주게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의 약속도 곧 이행시킬 생각입니다.”

한승이 무림맹 호법 위를 받아들인 유일한 조건이 바로 이현영이라는 여인의 소재를 찾아주는 것이다.

무림맹 지부를 통한다면 시일은 걸리겠지만, 지키지 못할 약조도 아니었다.

그의 가치를 생각하면 무조건 해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름이 귀에 익지?’

제갈윤호는 이때만 해도 깨닫지 못했다.

이현영의 이름이 귀에 익은 이유를.

* * *

“하합!!”

아름다운 여인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펼친 검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쉽지 않구나… 독고구검… 최상승 검학다워.”

검마의 독고구검(獨孤九劍).

절대검학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검법이었다.

그런 독고구검을 익히고 있는 여인은 바로 이현영이었다.

화산원로인 원량진인의 치료를 받은 그녀는 이제 다시 검을 쥘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의 사부인 화옥령이 면벽수련 중이란 점이었다.

참오를 통해서 지난 잘못을 뉘우치라는 화월천의 명이었다.

화옥령은 면벽수련에 들기에 앞서 이현영에게 독고구검을 익히기를 권했다.

한월검결은 화산을 뿌리로 두었으나 이미 전혀 다른 검이었다.

그렇기에 화산파의 다른 무학을 익히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허나 독고구검은 다르다.

형과 식으로 이루어진 검법이 아니었다.

무당의 태극혜검(太極慧劍), 남궁세가의 제왕검형(帝王劍形)처럼 깨달음의 무학이 바로 독고구검이었다.

독고구검의 깨달음은 그녀의 검술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었다.

문제는 보통 검학도 아닌 독고구검을 독학으로 익히는 것이 쉬울 리 없단 것이다.

검마의 사후 독고구검을 익힌 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가르침을 줄 자 또한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어.”

이현영은 한월검결에 독고구검을 담으려고 사력을 다했다.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오직 검만 생각하고 검만 휘둘렀다.

그녀는 화산파의 제자였지만, 다른 제자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그렇기에 화산파의 일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무량수불… 검이 뜻대로 펼쳐지지 않더냐?”

“아… 소손 이현영이 사조님을 뵙습니다.”

그녀의 처소에 오는 사람은 화소군 정도였다.

비슷한 나이에 무위도 비슷하기에 간혹 비무를 하러 왔다.

화산 장문인 화천기 역시 한두번 찾아온 적이 있으나 그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화산파 전대 장문인이자 화산파의 전설. 그리고 사부의 부친인 자하검제(紫霞劍帝) 화월천이었다.

그의 방문에 이현영은 급히 검을 거두곤 예를 다했다.

“되었다. 예가 과하구나.”

“예. 사조님.”

이현영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상당히 긴장했다.

화월천이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이나 애매했다.

이현영은 그를 사조라고 부른다.

사부의 부친이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화산파의 제자로 인정받았다.

허나 화산파의 무학을 익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화산파의 내공심법인 냉천한월공과 비전 경공술인 암향표를 익혔으나, 한월검결로 인해 이미 화산의 것과 달랐다.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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