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녀석이 좋다는데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형님.”
“허허 대단한 녀석이군. 자네가 이런 말을 하게 만들다니.”
제갈인겸은 순수하게 감탄을 했다.
제갈인섭은 제갈세가주답게 무척이나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감성적인 부분이 바로 여식인 제갈현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조카를 이런 식으로 보낼 동생이 아님을 알기에 제갈인겸이 감탄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렇게 만든 이현성의 존재에 더욱 궁금함이 생겼다.
아무리 제갈현지가 목을 매어도 어지간한 자에게 자신의 딸을 줄 제갈인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잠시 가문을 비워도 괜찮겠는가?”
“형님께서 직접 다녀오시렵니까?”
제갈인섭의 물음에 제갈인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이현성의 검에 흥미가 있었는데, 이젠 이현성이란 인간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물론 자신의 검이 그에게 얼마나 통할지 역시 궁금했다.
“녀석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그렇고, 자네가 허락한 이상 혼사를 질질 끌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형님. 제 대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천지신검(天地神劍) 제갈인겸이 수년만의 침묵을 깨고 세가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혁련세가
“제갈 군사의 생각은 어떻소?”
무영대의 비밀연락망을 통해 전달된 또 다른 서신이 무림맹으로 전해졌다. 그 서신은 제갈윤호는 물론 백무강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개방에게 전해 받은 정보만 들었을 때,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묵과할 수 없습니다. 맹주님.”
“혁련세가란 곳이 암류의 한 줄기가 맞다면 그래야겠지.”
“예. 게다가 허창상단의 배후라면 분명 보통이 아닐 겁니다. 맹주님.”
제갈윤호는 이미 개방을 통해서 이가장이 습격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나 이가장의 저력을 알기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이가장은 습격을 잘 막아냈다.
허나 이가장에서 전해온 서신을 받고 깜짝 놀랐다.
서신의 내용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이현성은 아직 혈천의 이름을 거론하긴 이르다고 판단해서 정체불명의 세력. 즉, 암류의 한줄기 정도로 혁련세가를 정의했다. 그러나 그가 제갈윤호를 과소평가한 게 그들이 허창상단이 배후임을 밝혀냈다.
그때는 몰랐다. 천중산에서 벌어진 혈사가 이가장을 습격하기 위한 시선 뺏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북경에서 급히 오던 중이었기에 이현성은 천중산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놀랄 노자로세. 이 무림맹의 턱 밑에 비수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니 말일세.”
“‘그들’의 한축이 맞다면 정말 위험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무림맹 총단이 위치한 허창현이었다.
그런 이곳에 암류의 한 줄기로 추정되는 혁련세가가 있단 말은 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허창상단의 예를 생각하면 본맹에 아직 그들의 간자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섣불리 움직이면 그들이 눈치챌 수 있고, 모른 척하자니 뒤가 걱정되는군.”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결성된 무림맹이지만, 그들 역시 인간인지라 이상만 품고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일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눈과 귀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탐욕에 눈이 먼 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좋은 기회였다. 지금은 탐욕에 눈이 시뻘개질 때가 아닌 무림을 수호할 시기라는 것을.
“제갈 군사가 보기에 청룡당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청룡당은 본맹 최고의 무력대입니다. 허나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장로님들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사신당은 별동삼대보다 상위집단이었다.
그중 청룡당은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구성된 집단답게 사신당 중에서도 최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청룡당은 당주 아래 열 개의 대(隊)로 구성되었고, 다시 다섯 개의 조(組)로 나뉘어서 총 오백 명으로 구성되었다.
소림의 원로이자 소림삼신승의 한 명인 천수신승 공운대사가 당주를 맡았으며, 십대주는 물론 조장들조차 절정고수들이었다. 나머지 삼신당보다 월등한 청룡당이 어찌 부족하겠는가.
그럼에도 제갈윤호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무림맹 장로들의 지원까지 언급했다.
“자넨 초절정고수가 여럿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니길 바라지만, 이가장을 습격한 인원 중에 초절정고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명색이 본가라면 그보다 못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백무강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말이 타당해 보였다.
문제는 누굴 청룡당에 지원해줘야 하는가였다.
무림맹의 수뇌라고 할 수 있는 장로, 호법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보가 샐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전음을 보내왔다.
그 순간 제갈윤호의 얼굴이 펴졌다.
이미 누군가의 기척을 읽은 백무강은 당황하지 않고 제갈윤호의 말을 기다렸다.
“맹주님, 하늘이 저흴 돕는 듯합니다!”
“자세히 좀 말해보게나.”
“천검(天劍)이 본맹에 오고 있다고 합니다.”
“천검이라면… 천중산의 그 말인가?”
제갈윤호는 천중산장에 밀사를 보냈으나 좋은 대답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탐이 나는 인재였다. 제갈윤호는 그를 포섭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본맹으로 오고 있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맞습니다. 아직 본맹에 정식으로 적(籍)을 둔 상황은 아니니 그들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무위야 이미 천중산에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이번 일이라면 그를 호법으로 추대할 명분으로도 부족함이 없겠지.”
그야말로 하늘이 그들에게 준 선물과 같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네놈들이 본맹을 이리도 우습게 보다니…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 * *
“청룡당이 긴급출동을 준비한다고?”
“그들을 정주로 보내려고 한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가장의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주님.”
제갈윤호의 예상대로 혁련세가는 청룡당의 긴급출동을 사전에 연락받았다.
허창상단의 비밀장부를 통해서 썩은 상처를 도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무림맹에 끈이 남아 있었다.
허창은 혁련세가의 권역이고, 허창상단이 아니라고 해도 움직일 수 있는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이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청룡당 전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안 돼. …떠날 준비는 얼마나 되었지?”
“명하신대로 기밀문서를 파기했으나 본가의 재물을 전표로 바꾸는 것은 3할도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혁련용후는 세가의 비밀고수들이라면 충분히 이가장을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초절정고수 중 셋이나 자리를 비웠으며, 이가장을 대표하는 무력집단인 흑룡대 역시 부재중이었다.
그렇기에 강호칠기의 한 명인 장강어옹 규염과 그보단 못하지만 초절정지경에 근접했다는 적양신장 구연청만 제거하면 이가장은 별것 아니었다.
미리 이가장에 심어둔 순찰호법과 혁련세가에서도 몇 없는 초절정급 원로가 있는 이상 어렵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특히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순찰호법인 풍마참도 육태언의 기습이라면 어렵지 않게 구연청을 제거할 수 있다.
그 후 원로와 합류해서 규염 역시 제거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게 계획의 전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하고 말았다.
적양신장 구연청의 무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함이 첫 번째 실수였고, 이가장의 저력을 가볍게 본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세가의 비밀고수들이라면 여차하면 자결을 해서 정보유출을 막겠지만, 예감이 좋지 않은 혁련용후는 본가를 비우고 비밀거점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으음… 본가의 재화를 전부 전표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현재 준비된 전표만 챙기고 나머진 대리인을 통해서 은밀하게 처분하는 것으로 하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창의 상권을 암중에 지배하는 혁련세가였다.
그들이 대대로 축적한 부는 사대상단만은 못하지만 십대상단에 뒤지지 않는다. 그 부를 운용하던 곳이 바로 허창상단과 예하 상단들이었다. 허창상단과 함께 상권과 재화 일부를 잃게 되었으나 혁련세가를 주저앉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허창 곳곳에 그들의 땅과 수많은 점포들이 남아 있으며, 비밀창고에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다.
양지는 물론 음지에 흐르는 재화까지 긁어모은 덕분이었다. 그런 막대한 재화를 단기간에 처분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했다.
3할이나 전표로 만든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 설마 원로님까지 대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줄이야. 도대체 이가장의 저력이 얼마나 되는 거야!’
혁련용후의 입지가 무척이나 약해진 상황이었다.
허창상단의 일로 그는 상당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힘들게 움직인 원로까지도 잃게 되었다.
혁련세가에서도 몇 없는 초절정고수를 잃은 것이다.
그로인해 가주로서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우려의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가신들만 아니라 그나마 그에게 힘을 실어주던 원로들까지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본가를 버리고 비밀거점으로 이동하는 극단의 선택까지 했으니, 그의 퇴임이 거론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었다.
‘기필코 이 빚은 갚고 만다. 기필코!’
혁련중광이라는 거대한 산에 가려져서 그 존재가 퇴색되었으나 혁련용후는 분명 뛰어난 자였다.
그렇기에 혁련세가라는 웅크리고 있는 거대세가를 이끌 수 있던 것이며, 천하를 꿈꿀 수 있었다.
허나 그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 가주님!”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더냐!”
헐떡이며 가주전에 들이닥친 수하를 향해 혁련용후 대신 그의 심복인 잠혼이 호통을 쳤다.
가주의 심복일 뿐만 아니라 가신 서열도 높은 편인 잠혼의 호통에 수하는 찔끔했다.
“되었네. 무슨 일이더냐?”
“무, 무림맹! 무림맹의 청룡당이 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잠혼은 물론 혁련용후 역시 경악했다.
불길한 예감은 그저 예감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어버렸다.
“젠장! 늙은 구렁이에게 당했군! 몽혼혈등(夢魂血燈)에 불을 피우고, 비밀통로를 통해서 빠져나가라!”
“조, 존명!”
허창상단에 설치되었던 몽혼혈등의 몽혼혈라진.
허나 심처에만 간이로 설치된 허창상단과 달리 혁련세가의 본가는 전역에 설치되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요되었으나 세가를 한번 구할 수 있다면 결코 헛된 돈이 아니었다.
물론 몽혼혈라진이 완벽하게 가동되었다는 전제하에서.
콰쾅!!
“아미타불…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리오! 수많은 생명을 구함이니, 청룡당의 형제님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십시오.”
혁련세가의 고수들이 몽혼혈등에 불을 붙이는 것보다 무림맹 청룡당이 들이닥치는 것이 더 빨랐다.
공운대사는 출발하기에 앞서 제갈윤호로부터 몽혼혈등에 대해서 들었는지 일단 석등부터 부쉈다.
허창상단이 정말 혁련세가의 하부집단이라면 이곳 역시 몽혼혈등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