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보다 천검이라…? 그 이름을 이곳에서 듣게 되다니… 크크크. 역시 세상은 재미있다니까.”
혁련용후는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놀랍게도 그는 한승이 익힌 천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무림에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절세검학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검마, 그자가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한승의 사부가 천검비록을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그 괴한들은 바로 혈궁의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습격을 주도한 인물이 아직 혈궁주의 자리를 물려받기 전의 혈뢰검마였다.
허나 그는 끝내 천검비록을 확보하지 못한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었던 한승의 사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혈뢰검마의 몇 안 되는 치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버님이라면… 잘 이용하실 수 있으시겠지. 그보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는데…….”
천중산의 일은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수백의 중원무림고수들이 사라졌다.
하나 같이 일류급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그만큼 중원무림의 정기가 약해지고 있단 뜻이었다.
물론 그들 수백여 명이 사라진다고 해서 중원무림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런 사건이 몇 번만 더 일어나 준다면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결정적으로 천중산의 일은 다른 임무를 위한 시선 돌리기에 불과했다.
“절망한 네놈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구나. 이가 애송아.”
이가장 습격
“안 돼!!”
문교교는 혼사 준비 등 문가장 내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북경에 남았다. 칠현마금 독고혜와 흑룡대 역시 문교교의 호위를 위해서 북경에 잔류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암월만 대동한 채 빠르게 남하했다.
호북성에 있는 제갈세가의 본가에도 다녀와야 한다.
문교교만이 아니라 제갈현지의 일도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북성의 북경에 이어서 호북성까지 다녀오려면 장원을 비울 시간이 늘어난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동행한 사람이 초절정고수인 암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초절정고수도 인간이었다.
배를 채우고 잠을 자야 한다.
그렇기에 잠시 들린 객잔에서 음식과 함께 쉬던 중, 출처를 알 수 없는 서신을 받았다.
[이가장 습격.]
서신의 내용은 무척 짧았으나 그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평소라면 서신을 전한 자부터 조사할 테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허나 암월은 다르다. 먼저 떠난 이현성을 대신해서 서신을 전한 자를 찾았다.
“컥! 왜, 왜 그러십니까. 사, 살려주… 커억!”
“누구냐. 서신을 전한 자가…….”
사내는 암월에게 멱살이 잡힌 채 발버둥질 했다.
그는 괴로워했으나 암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차하면 벨 기세였다.
덕분에 사내는 어설픈 연기 따윈 버렸다.
“흐, 흑점주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흑…점? 흑점주가 왜 이런 서신을 전한 거지?”
쉽게 동요하지 않는 암월조차 당황할 정도로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흑점(黑店).
개방, 하오문과 함께 천하 삼대 정보집단이었다.
성질은 하오문과 비슷하지만 그들보다 더 질이 나쁜 자들이 바로 흑점이었다.
그로인해 수많은 원한을 산 집단이 흑점이었다. 반대로 그들의 정보력을 탐내 수작을 부린 자들도 있었다.
허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만큼 흑점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게다가 흑점은 점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흑점 하나를 습격하면 다른 흑점과 연결고리가 끊겨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총점주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흑점은 삼대 정보 집단 중에서도 가장 신비에 싸인 세력이었다.
그런 흑점이 거론되니 암월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쿨럭. 소, 소인은 명령에 따를 뿐…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신의 내용은 사실인가?”
“소인은 서신의 내용을 모릅니다. 알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실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
하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흑점은 거짓 정보를 내놓을 정도로 어설픈 집단이 아니었다.
걸리는 점은 이쪽에서 먼저 요구하지도 않은 정보를 그들이 내놓은 이유였다. 허나 눈앞의 사내는 그 이유를 알 정도로 지위가 높아 보이지 않았다.
애초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자라면 정보원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암월은 멱살을 잡고 있던 사내를 놔주었다.
“실례를 했군. 허나 이게 수작이라면… 흑점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비웃었다.
흑점이 어떤 집단인데, 감히 지옥을 운운한단 말인가.
허나 사내는 너무 몰랐다.
눈앞의 암월의 무서움과 이가장의 지독함을.
그렇게 암월은 이현성을 뒤쫓아 이가장으로 향했다.
* * *
“수련은 잘 되는가? 이번에는 묵룡대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나?”
“후. 어디 그게 쉽나? 신룡표국이나 패룡대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이가장 경비대이자 외원 경비를 맡고 있는 잠룡대원들의 목표는 상위 무력집단에 들어가는 것이다.
허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룡대원으로서 성실함과 열의 그리고 가능성을 인정받아야 상위 무력집단으로 보직이동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인정받아서 상위 무력집단에 들어간다면 봉급만 2배에서 5배까지 올라간다.
게다가 뛰어난 무공까지 전수받는다.
물론 그만큼 강도 높은 수련과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감당할 가치는 충분했다.
특히 이가장 최고의 무력대라는 묵룡대와 흑룡대는 정주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힌다.
그러므로 혈기왕성한 사내로서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이번에는 기필코 시험을… 누구냐!”
잡담을 나누면서도 잠룡대원들은 외원 경비에 소홀하지 않았다. 때문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창과 칼을 겨누었다.
“정체를 밝혀라!”
그들은 긴장하면서도 훈련 받은 대로 대처했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즉결처분… 아! 죄, 죄송합니다!”
“수고들 많군. 죄송할 게 뭐가 있는가. 자네들은 임무를 수행한 것인데.”
“그런데… 호법님께서 이 시각에 이곳에는 어인 일로…….”
“잠도 오지 않고 해서… 내, 외원 경비 상태를 점검하고 있네. 그런데… 자네들이 잡담을 하고 있더군.”
그의 말에 잠룡대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눈앞의 사내는 호법이란 높은 직위를 가진 존재였다. 자신들이 야간경비 근무 중에 잡담을 하고 있단 사실을 잠룡대장에게 고한다면 승급시험을 볼 자격이 박탈된다.
자칫하다가는 잠룡대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잠룡대는 여타 무력집단과 달리 계약에 의해 고용된 상태였다.
즉, 잠룡대 기간은 정식으로 이가장의 식구가 되는 시험 기간인 셈이었다.
그걸 알기에 사내들은 사색이 되었다.
허나 그런 그들을 보며 사내는 피식 웃었다.
“걱정 말게. 잠룡대장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호법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쉿! 다들 깨울 생각인가?”
사내의 말에 잠룡대원들은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기껏 잡담했던 일을 무마했는데,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컥!”
“왜, 왜……?”
잠룡대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며 쓰러졌다.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사내의 눈에는 착잡함이 어려 있었다.
“미안하네. 나 역시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네. 부디 죽어서는 좋은 곳에 가게나.”
그는 죽은 잠룡대원들에게 넋두리를 하곤 이가장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리곤 은밀하게 정문을 열었다.
정문이 열리자 복면을 쓴 수십 아니, 족히 백여 명은 되는 자들이 장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 유일하게 복면을 쓰지 않은 노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수고했네. 어옹은 내가 맡을 테니, 적양신장은 자네가 맡게.”
“예. 원로님.”
이가장의 호법은 단 세 명뿐이었다.
이현성과 함께 북경에서 오고 있는 암월.
무림맹의 비무대회 후 이가장에 투신한 적양신장 구연청과 풍마참도 육태언이 그 셋이었다.
그렇다. 잠룡대원들을 죽이고 이가장의 정문을 연 자는 놀랍게도 풍마참도 육태언이었다.
비록 무공 사승이 사파계열이었지만, 협객으로 유명한 육태언이 간자일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방심이 오늘의 이가장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미안하지만… 나 역시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소.’
* * *
이가장에서 장주의 거처 다음으로 중요한 곳은 바로 풍운각이었다.
중요한 정보를 취급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제갈현지의 거처이기도 했다.
이가장의 안살림을 맡았던 대총관 문교교의 부재로 업무가 가중된 제갈현지는 늦은 밤에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마 집사가 있으나 그에게 행정업무까지 맡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지봉이라고 불리는 제갈현지 답게 풍운각주의 임무는 물론 대총관의 업무까지 소화해낼 수 있었다.
물론 대총관을 보좌하는 서기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제갈현지의 거처인 풍운각에 은밀하게 잠입한 자들이 있었다.
“컥!”
“이런! 죽여라!”
풍운각에 잠입한 괴한들이 제갈현지를 노렸다.
정확히는 그녀를 인질로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괴한을 벤 자가 있었다.
바로 귀매(鬼魅) 벽하연이었다. 친부와 양부의 복수 이후 이가장에 충성을 맹세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풍운각의 부각주인 동시에 제갈현지의 호위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제갈현지 본인도 고수였지만, 풍운각의 임무 특성상 은밀하게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했다.
암월 호법을 제갈현지에 붙여주기 어려워, 차선책으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귀매 벽하연이었다.
이가장의 장로, 호법들이 워낙 대단한 고수들이라서 그렇지, 귀매 역시 평범한 고수가 아니었다.
대주급인 절정고수였다.
챙! 채챙!!
“고수! 조심… 컥!”
“으아악!!”
괴한들 아니, 혁련세가의 비밀고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들은 몇 가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귀매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심야까지 제갈현지의 호위를 서고 있었다는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인질로 삼으려던 제갈현지 역시 고수란 점을 간과한 것이다.
잠에서 깬 제갈현지는 지체하지 않고 귀매를 보조하며 적을 베었다.
―제압하긴 어렵겠군. 차선책으로 간다. 죽여도 좋다.
―존명!
―존명!
흠칫!
제갈현지와 귀매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괴한들의 기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표적을 은밀하게 제압하는 것에서 제거로 명령이 바뀌었기에 더 이상 기세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마음속에 필살(必殺)을 담자 살기가 저절로 풍겨났다.
고수인 그녀들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살기가 강했다.
―부각주님,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이곳으로 잠입할 때까지 아무런 낌새가 없었던 것도…….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각주님.
―규 장로님께서 오실 수 있게 무리하지 말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겠습니다.
―존명.
그녀들은 몰랐다. 장강어옹 규염은 물론 적양신장 구연청 역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