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오늘 따라 자네가 더 보고 싶구려. 부인…….”
다음날 누군가 장주의 거처로 찾아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버지.”
바로 문교교였다.
그녀는 문종학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문종학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짓는 그녀를 보며 말을 잃었다.
“…….”
“…….”
부녀지간 사이에 그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아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문종학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그를 나눠 가져도…….”
“나눠 가지는 게 아니에요. 더 사랑하는 것뿐이에요. 아버지…….”
문종학은 그녀의 말에 실소했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학사인 그조차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지난 밤, 장모님께서 날 찾아오셨단다.”
“할…머님께서…요?”
세상에서 제일 서먹한 장서지간(丈壻之間)이 독고혜와 문종학이었다.
독고혜는 사랑하는 딸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문종학은 사랑하는 여인이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서로를 마주하기엔 너무도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래. 네 할머니께선 평생 후회하며 사셨다고 하셨다. 날 허락하지 않은 것이… 그러면서 말씀하셨단다. 나도 평생 후회하며 살 거냐고…….”
“아버지…….”
문종학의 눈물을 보며 문교교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길이 없었다.
“행복하거라. 넌 후회하지 말고… 원 없이 사랑하며 살거라. 사랑한다, 내 딸아…….”
“저도 사랑해요… 아버지. 그리고 죄송해요…….”
부녀는 처음으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사랑의 눈물이었다.
그런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자가 또 있었다.
‘아가. 너는 행복했더냐. 살아 있는 동안…? 미안하구나. 네가 일찍 허락해줬다면 좋았을 터인데… 사랑한다. 나의 딸아.’
* * *
“젠장, 어찌 그런 계집을 내게……!”
천씨 대장군가의 자랑인 천운현은 비록 둘째로 태어났으나 야망이 컸다.
형을 능가하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난 덕분에 야망을 꿈꿀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장자 계승을 들먹이며 장남 천운성을 지지하던 가신들이 대다수였다.
허나 그가 두각을 보이면서 비교적 젊은 가신들은 둘째지만 재능이 뛰어난 천운현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두 파벌의 차이는 근소해졌다.
물론 장자라는 명분 때문에 천운성이 근소하지만 우위에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천운성이 승부수를 던졌다.
도찰원의 수장인 우도어사(右都御司)의 여식과 혼사를 약속한 것이다.
황실의 감찰기관인 도찰원의 두 수장 중 하나인 우도어사는 황실의 외척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께서 황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황제와는 가깝다고 할 순 없으나 명색이 황족의 피가 섞인 만큼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신들의 지지가 다시 천운성에게 기운 것은 당연했다.
이 상황에서 천운현이 던질 수 있는 패는 얼마 없었다.
용불군 대장군 혹은 황족의 여식만이 답이었다.
아니, 한 명 더 있었다.
“아무리 내각대학사의 여식이라지만 그런 계집을…….”
육부조차 흔들 수 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내각대학사.
문종학 내각대학사가 천진룡 대장군을 버거워하듯, 천진룡 대장군 역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권력자가 바로 내각대학사였다.
그런 문종학을 장인으로 둔다면 천운성에게 기울었던 세력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미색은 한때 북경에서 유명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런 그녀가 현재 이가장이란 듣도 보도 못한 장원에 있다는 점이었다.
은연중에 마음에 든 사내가 있다는 것을 알린 셈이었다.
평생 받들어지며 살았던 천운현의 입장에선 문교교를 흠이 있는 계집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과 그녀를 이어주려는 부친의 뜻이 불쾌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절대 권력자인 부친의 뜻을 거역하는 일은 모든것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야망이 큰 그가 그런 도박은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가주가 되면 그년을 후원에 처박아두고 후실을 들일 수밖에…….”
불만스럽지만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천운현은 스스로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님. 대장군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줘봐.”
서신을 읽던 천운현의 눈이 뒤집어졌다.
문교교와의 혼사는 무산되었단 내용이었다.
그녀에게 알려지지 않은 혼약자가 있어서 거절되었단 간략한 부연설명이 적혀 있었다.
천진룡 대장군은 불쾌했지만, 내각대학사에게 빚을 지웠기에 만족했다.
이 빚은 분명 비싸게 써먹을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당사자인 천운현은 달랐다.
“감히 나 천운현을 무시하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교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그였다.
허나 자신이 거절을 당한 건 다른 일이었다.
천운현은 ‘감히 자신을 거부할 계집은 세상에 없다’는 편협한 생각을 했다.
불같이 화가 난 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고, 공자님! 어디가십… 컥!”
“감히 날 막아? 그놈! 그놈 면상을 보고 와야겠다!”
다음 대 군부를 이끌 신성이라고 불리던 천운현이지만, 그 실상은 오만하고 포악했다.
물론 그걸 눈감아 줄 정도의 실력과 재능, 그리고 배경을 가졌다.
천운현은 문교교에게 직접 따지는 것은 어려우니, 대신 야인인 이현성의 면상을 보겠다며 무작정 하남으로 향했다.
그의 무책임한 성미를 잘 아는 천운현의 부관은 급히 대리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 * *
“끄응. 혈천신단을 날름 처먹고, 일을 이 따위로 처리해!”
혁련용후는 짜증이 났다.
감정조절이 능한 그답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거스르는 원표를 길들이기 위해 꾸민 일이 꼬이고 말았다.
그 결과 은밀하게 포섭했던 끈을 대거 잃게 되었다.
원표가 숨겨둔 비밀장부로 인해 생긴 일이었다.
그나마 불길한 예감에 사전에 대비하지 않았다면 그 피해가 혁련세가까지 미칠 뻔했다.
가주 자리를 내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지가 흔들릴 정도로 곤란해졌다.
그나마 간자를 통해서 내막을 알아낼 수 있었다.
무림맹주와 총군사가 주관으로 벌인 일임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실행자였다.
그들의 숨겨진 검을 알아내기 위해서 고생을 한 덕분에 한 사람의 존재가 포착되었다.
이현성, 눈엣가시와 같은 이가장주였다.
물론 가능성이 높은 것뿐,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히 그럴싸했다.
총군사인 신산 제갈윤호의 손녀가 이가장에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가장을 뒤집어 버리고 싶었지만, 당장 그건 어려웠다.
알려진 것보다 이가장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혁련세가의 실체가 드러날 각오를 한다면 몰라도 본가의 존재를 숨기고 상대하기에 이가장은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태태감을 움직여서 내각대학사의 여식을 쫓아내는 것이다.
물론 칠현마금 독고혜를 이가장에서 떼어내기 위함이었다.
“이가놈과 칠현마금을 잠시지만 이가장에서 떼어냈기는 한데…….”
태태감이 혈천신단의 대가로 천진룡 대장군을 움직였을 때만 해도 ‘역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각대학사의 여식과 칠현마금이 이가장을 떠나 북경으로 향했다.
초절정고수이자 음공의 대가인 칠현마금 독고혜는 제법 성가신 존재였다.
그녀 한 명을 떼어낸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성과가 아니었다.
내각대학사가 천진룡 대장군에게 거절의사를 전했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혈천신단은 혁련세가라도 손에 넣기 힘든 비약이었다.
그런 무리를 하면서까지 준비한 계략이 무산되었다.
그러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현성이 직접 문가장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놈이 암월만 이끌고 북경으로 떠났다고 했지? 그렇다면… 장강어옹만 처리하면 이가장도 정리할 수 있겠군.”
이가장의 저력은 탄탄해진 재정과 동원할 수 있는 무림인의 숫자로 끝나지 않았다. 무림에서도 흔치 않다는 초절정고수가 넷이나 된다는 것이다.
말석이라지만 구파일방의 하나인 공동파조차 초절정고수가 넷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가장의 초절정고수 중 셋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가장을 노릴 최적기라고 할 수 있었다.
초절정고수인 장강어옹을 제거하고 이가장의 기반을 무너트려 놓는다면, 이현성이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 일어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만큼 통쾌한 복수가 어디에 있겠는가.
허나 놀라운 점은 이현성만 아니라 암월까지 동행한 사실을 혁련용후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혁련세가의 정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그놈이 돌아오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데…….”
첩보에 의하면 이현성이 북경을 떠났다고 한다.
그것도 서두르기 위해서 홀로 떠났다.
문교교와 독고혜는 잠시 문가장에 남기로 했다.
혼사를 진행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현성은 암월을 대동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초절정고수들의 복귀는 혁련용후가 우려하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이가장을 무너트리기 위해 혁련세가에서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한정적이었다. 즉, 이현성이 이가장에 도착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전에 무림맹의 눈부터 돌려야겠지…….”
허창상단이 발각된 이후 무림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물론 혁련세가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으니 더욱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들의 눈에 발각되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그렇기에 혁련용후는 무림맹의 눈부터 돌릴 생각이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뭐, 어차피 써먹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니까. 아까울 것은 없지.”
그렇게 혁련용후는 이가장을 치기 위해서 준비하는 동시에 무림맹의 눈을 가릴 계략을 꾸몄다.
* * *
“빨리 고수를 파견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사파 놈들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무림맹은 발칵 뒤집어졌다.
한가지 소문 때문이다.
[역천마라경이 나타났다! 천중산에…….]
역천마라경(逆天魔羅經)은 신공절학급의 마공서였다.
게다가 마교의 마공인 만큼 속성과 파괴력은 보장된 셈이었다. 따라서 기연을 꿈꾸는 무림인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천중산은 하남성의 남부. 무림맹 총단이 위치한 허창에서 고작 육칠 일이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무림맹 입장에선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인근 지부의 고수를 움직였습니다.”
“지부의 고수들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천중산 인근 현에도 무림맹의 지부가 있었다.
문제는 대문파급이 아니란 점이었다.
대문파가 움직인다고 해도 수백의 고수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헌데 그보다 작은 중소문파급의 지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