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리고 문태규를 노려봤다.
“뭐하느냐, 일어나지 않고?”
“예? 예…….”
독고혜는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차의 옆에는 이현성과 암월이 있었다.
장주로서 홀로 움직이는 것은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묵룡대를 대동할 수는 없었다.
흑룡대와 함께 이가장을 대표하는 무력대로 성장한 묵룡대였다. 허나 초절정고수인 이현성의 움직임을 따를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가장의 내원 경비를 담당해야 할 묵룡대까지 자리를 비우는 것은 곤란했다.
그렇기에 호법인 암월을 대동했다.
애초 그는 이가장 자체보다 암천주인 이현성의 호위에 의미를 둔 자였다.
떼어놓으려 해도 먼저 따라붙을 자이기도 했다.
독고혜는 이현성을 지그시 바라보곤 말했다.
“들어가 보게.”
“감사합니다.”
독고혜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이현성은 홀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쉼 없이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이 부어서 볼록해진 문교교가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현성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붉어진 뺨을 어루만졌다.
“미안하구나.”
“…….”
그의 따스한 한마디에 문교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애써 억눌렸던 서러움이 다시 복받쳤기 때문이다.
이현성은 그녀를 품에 꼬옥 안아주었다.
그의 이런 다정한 행동은 오랜만이었기에 문교교는 더욱 감정이 복받쳤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말거라. 내 곁에 있거라. 앞으로도 계속…….”
“오…라버니…….”
“네가 허락한다면 문 대인께는 내가 말씀드리마.”
“허, 허락해요! 허락하게 해주세요!”
이현성에게 안겨 있던 문교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힘차게 대답했다. 부운 얼굴로 방긋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이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에 기겁한 문교교는 다시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 역시 너무나 귀여웠다.
그러던 중 문교교는 흘리듯 말했다.
“언니는… 현지 언니는…….”
“아. 그게…….”
찔리는 게 있던 이현성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문교교는 그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언니와 함께라도… 그러니 제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물론 언니에게도요.”
“미안하구나. 그리고 고맙구나.”
그의 결정을 이해해준 문교교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 역시 한 심장에 두 사람을 새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영웅은 삼처사첩을 거느린다고 하지만 그는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념을 어길 만큼 그녀들은 너무도 좋은 여인들이었다.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그렇게 이현성이 합류한 마차는 북경의 문가장으로 향했다.
* * *
“혈살객이 서른 명이나 죽었단 말입니까!”
“생각보다 혈살객의 능력이 부족하단 뜻이군요.”
“그만큼 한천마녀가 강하단 말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자하검제의 여식이란 첩보도 있었습니다.”
혈천십삼세 중 상주하고 있는 몇몇 수뇌들이 긴급회동을 열였다. 혈살객의 능력을 확인하고자 보냈던 서른명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전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들, 천요후가 지원해준 초절정고수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다니 실망스럽군.”
의봉(醫鳳) 백인혜.
그건 성수 백우종의 여식을 연기하기 위한 가짜 이름에 불과했다.
그녀는 천요후(天妖后).
천요(天妖)라 불리는 강력한 요기가 가미된 그녀의 섭혼술은 여인의 마음까지 훔칠 수 있었다.
환희루주인 환희요후와 함께 혈천 이대요후에 꼽힌다.
부천주는 자신의 명령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지만,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 혈살객의 능력 부족을 꼬집었다.
수뇌들은 그걸 알면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괜히 부천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천요후가 지원해준 초절정고수도 한천마녀를 죽이려는 것을 실패했다고 하던데…….”
“천요후께서 보내신 서신에 의하면 백면탈을 쓴 괴한의 방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혈천의 대군사 문인윤걸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부천주가 이 일을 꼭 집은 이유를 아는 듯했다.
“한천마녀를 구할 정도라면 최소 초절정고수란 말인데… 화산이나 종남이 움직였단 말인가. 대군사?”
“천요후의 서신에는 무형검강을 사용한 고수라고 합니다. 화산과 종남에서 가능한 고수는 셋. 허나 그중 움직인 자는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섬서성의 초절정 이상의 고수는 열한 명.
그들 대부분이 화산파와 종남파의 진인이었다.
그런 화산파와 종남파라도 무형검강을 펼칠 수 있는 고수는 고작 셋이었다.
원로급에 해당되는 그들이 쉽게 움직일 리가 없다. 설사 움직였다 해도 혈천의 눈을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즉, 섬서성의 고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그 정도 고수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혈천의 정보망이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정보망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쾅!
“그럼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대군사. 본천의 정보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송구스럽습니다. 부천주님.”
혈천의 두뇌인 문인윤걸은 혈천의 정보를 총괄하고 있었다. 허나 그 정보의 원천은 곧 혈천십삼세의 정보력인 만큼 그만의 문제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애초 부천주의 표적은 대군사도 아니었다.
그는 슬쩍 한 사내를 바라봤다.
중년 사내는 표정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이에 부천주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쉽군. 아쉬워. 저놈을 흔들 좋은 기회였는데… 대군사가 흔적을 잡아낼 가능성은 너무 낮아. 내가 혈뢰검마(血雷劍魔) 저놈을 너무 쉽게 봤어. 명색이 혈궁주인 놈인데 말이야.’
혈천주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혈궁(血宮)은 혈천십삼세의 하나였다.
그 혈궁의 이대궁주가 바로 중년 사내인 혈뢰검마였다.
혈천의 호법이자, 혈천십삼세 중에서도 젊은 측에 속하면서도 실력은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였다.
혈천주에게 도전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혈뢰검마의 약점을 조사하던 중 그와 한천마녀의 악연을 우연히 알게 된 부천주는 함정을 팠다.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판 함정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혈뢰검마가 걸려들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던 그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는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왔다.
함정을 기획한 부천주는 맥이 빠지도록 허무했다.
‘그래도 그의 약점을 발견한 것으로 만족하자. 그년이 화산파에 들어갔지만, 언젠가 기회가 있을 테니까… 크크크.’
천하일통, 혈천영세를 외치면서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는 이를 가는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혈천이 유지되고 있었다.
혈천주라는 베일에 싸인 절대자의 존재 때문이다.
혈천주. 그는 도대체 얼마나 괴물이란 말인가!
천중혈사
“오랜만이오. 이 대협.”
“그간 강녕하셨습니다. 대인.”
이현성은 이가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북경 문가장으로 향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현성은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강녕했다고 말하긴… 어렵구려.”
“그, 그러시군요.”
순수한 학사로서 신념이 곧은 문종학에게 황실은 무척이나 피곤한 곳이었다.
권력이란 마물은 청학(淸鶴)이라 불리던 문종학의 신념까지 흔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중심을 잡고 있으니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강녕하지 못한 것은 황실의 일만이 아니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고, 가정이 평온하지 못한데 어찌 국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품을 떠난 여식의 걱정되었지만, 평온하다는 소식 덕분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허나 여식의 혼사 문제는 계속해서 그의 평정심을 깨뜨렸다.
이현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천진룡 대장군께서 교교를 며느리 삼고 싶어 하신다고…….”
“그렇소. 대장군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구려.”
문종학의 입에서 들으니 이현성은 가슴이 무거웠다.
그는 문교교를 데려가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높다고 한들 넘어야 할 산이었다.
“아무리 대장군이시라도 이미 혼사를 약속한 혼약자가 있다면 이해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우리 교교는 혼약자가 없소만?”
천진룡 대장군의 자존심 상 혼약자가 있다면 떼를 쓰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문제는 문교교에게 혼약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현성은 침을 꿀꺽 삼키곤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제가… 그 혼약자가 되겠습니다. 교교를 제게 주십시오!”
“……!!”
넙죽 엎드린 이현성을 보며 문종학의 눈이 커졌다.
사실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여식이 혼자 좋다고 이가장에 2년이나 신세를 졌다.
하지만 이현성도 아예 마음이 없다면 받아줬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문교교와 함께 북경에 왔다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심증을 뒷받침해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천하의 문종학도 순간 당황했다.
허나 내각대학사로서 수많은 고위관리들을 상대하는 문종학이었다.
곧 그는 신색을 회복했다.
“그 아이를 너무 오래 힘들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런 만큼 더 오래, 더 많이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
문종학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현성의 입안은 바짝바짝 말랐다.
허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자신의 품을 떠나 2년이나 이현성의 곁에 있던 여식이었다.
아비로서 딸의 행복을 막고 싶지는 않았다.
“좋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사위.”
“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문종학의 허락에 이현성은 다시 넙죽 인사를 했다.
그런 그를 보며 문종학은 마음이 편해졌다.
허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었다.
천진룡 대장군에게 보낼 거절 의사만이 아니었다.
이현성은 다시 무릎 꿇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고할 게 있습니다.”
“으음. 말해보게.”
조금 전까지 기뻐하던 이현성의 표정이 다시 굳자 문종학 역시 덩달아 진지해졌다.
이 상황에서 고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혼사를 치를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이현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갈 소저와도 혼사를… 치를 생각입니다.”
“…….”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현성은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도 이렇게 답답한데, 문교교의 아비인 문종학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교교… 그 아이도 같은 생각인가?”
“죄송합니다.”
“허…….”
문종학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에 문종학의 진심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돌아가 주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나.”
“예.”
이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더 이상 변명할 자격도 없었다.
어느 아비가 딸이 다른 여인과 함께 부군을 섬기길 원하겠는가.
이현성이 물러간 후에도 문종학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정적이 흐른 후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