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그런 무영대원이 몇 명이나 사라졌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허창상단에 이상함을 느낀 직후에 사라진 거라면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본맹의 고수를 움직이면 좋으나… 그럼 정보가 샐 가능성이 있네.”
“제가 움직인다면 최소한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은 낮겠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찾아보죠.”
“정말인가! 고맙네.”
“아닙니다.”
무림맹주가 직접 한 부탁인 만큼 웬만해선 거절할 수 없었다. 무림맹주에게 빚을 하나 지운다면 결코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무영대원들이 사라졌단 것 역시 신경이 쓰였다.
또한 그 역시 의심 가는 부분이 있었다.
‘허창상단이라… 설마… 아니겠지.’
* * *
“역시 무영대였나.”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랫것들을 관리 못 한 제 책임입니다.”
살이 포동포동 찐 중년 사내가 부복한 채 바짝 엎드렸다. 그런 그를 혁련용후가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되었네. 무영대 놈들이 더 파고들어도 문제였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가주님.”
“허나 이 일로 무림맹이 움직이면 귀찮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상단주.”
“의심 살만한 자료는 전부 파기하고 있습니다. 가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중년 사내의 이름은 원표.
허창상단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삼대째 혁련세가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신(家臣)이다 보니 웬만한 일로는 그를 징치할 수 없었다.
“뒤탈 생기지 않게 처리하게나.”
“예, 가주님.”
물러난 원표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가 물러난 후 혁련용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건방진 놈. 아버님의 사람이기에 놔두고 있었지만, 본가의 가주는 나라는 것을 잊으면 곤란하지.”
가주 자리에서 물러났음에도 세가 내 혁련중광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 워낙 강성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지 제법 되었음에도 혁련용후는 세가의 힘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그가 외부세력이나 인물을 기용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온전하게 그에게만 충성하는 가신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가주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혁련세가의 가주는 혁련용후, 그였다.
“휘를 믿고 날뛰겠지만… 개는 결국 개라는 것을 잊으면 곤란하지. 그리고 후 녀석도 있고 말이야.”
장손인 혁련휘를 후계자로 생각하는 혁련중광과 달리 혁련용후는 오히려 혁련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형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 발악하는 차남 혁련후.
허나 워낙 혁련휘가 혁련중광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혁련용후는 대놓고 혁련후를 지지할 수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원표는 자신의 딸을 혁련휘와 엮으려고 하고 있었다.
원가의 지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때 혁련용후가 나직이 말했다.
“무림맹의 움직임은 어떤가? 잠혼(潛魂).”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럼 곤란한데… 기껏 냄새까지 피워뒀는데 말이야.”
허창상단은 혁련세가에 중요한 돈줄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원표는 가신들 중에서도 제법 영향력이 있었고 나아가 혁련휘의 장인을 꿈꿨다.
그만큼 허창상단의 존재는 혁련세가에도 중요했다.
그런데 가주인 혁련용후가 허창상단에 해가 될 만한 일을 꾸미고 있었다. 혁련용후의 그림자이자 그만 따르는 몇 안 되는 가신들 중 하나인 잠혼을 움직여서 말이다.
“원표도 그만큼 철저한 자이니 쉽지는 않겠지. 준비는……?”
“허창상단이 드러나도 실질적인 피해가 없게 조치해뒀습니다. 다만 시간을 끌면 그가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하게.”
“예, 가주님.”
혁련용후는 부친인 혁련중광과 권력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가주로서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자신만의 권역을 구축하려 했다.
그것은 혁련중광 역시 암묵적으로 인정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가주 자리를 넘긴 시점에서 그의 목적은 혈천이었다.
그렇기에 혁련용후는 원표의 콧대를 꺾는것으로 혁련세가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신들에게 각인시키려고 했다.
“후. 녀석이 제 몫을 해줘야 할 텐데…….”
* * *
“크아아악!!”
혈천신단을 복용한 혈살육관의 인재들은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혈천신단은 비약(秘藥)인 동시에 마약(魔藥)이었다. 약효를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다면 단기간에 내공과 무위가 높아진다.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면 한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혈천신단이라는 비약을 보유했으면서도 지급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제조가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육관의 17명 중 벌써 넷이 죽은 상황이었다.
“이 정도로…! 이 정도로! 난 죽지 않아!!”
혁련후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눈빛은 전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에 몸을 맡긴 채 혈천신단과 싸웠다.
과거의 그는 혈천신단을 완벽하게 흡수하면서 혈검살객이 되었다. 반대로 약효를 버티지 못한 자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했다. 혈살오객이 어린 나이에 그냥 초절정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두 내 거야! 모두 내가 차지할 거야!”
* * *
‘확실히 수상하군. 일개 상단의 경계수준으로 보긴 어려울 정도이니…….’
비무대회로 모든 시선이 무림맹에 집중되었을 시각, 이현성은 은밀히 무림맹 총단을 빠져나왔다.
잠입은 밤에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셈이었다.
그는 삼라만상 덕분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허창상단의 담을 넘었다. 상단 외원을 지나 내원에 도달한 이현성은 다시 한번 수상함을 느꼈다. 중소상단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경계수준이었다.
‘눈에 보이는 경비무사만 수십에, 은신하고 있는 일류고수도 스물이 넘는 곳이 어찌 중소상단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기관장치라…….’
거대 상단도 이정도 경계를 할까? 싶을 정도였다.
반대로 말하면 강도 높은 경계를 해야 할 이유가 이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고 내원 깊숙이 잠입했다.
곧 무려 절정고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미쳤구나. 아니지. 이러니 무영대원들이 사라지게 된 거겠지.’
은신과 암행에 능한 무영대원들이 사라졌다는 말은 저들이 예상보다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현성은 더욱 신중해졌다. 여차하면 자신의 몸 하나 빼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실패를 한다면 경계는 더욱 철저하게 아니, 비밀장부를 파기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조건 완수해야 한다.
‘음? 설마… 기문진법(奇門陣法)! 도대체 언제…….’
갑자기 공간이 변했다. 상식적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기문진법이라면 말이 다르다.
자연의 법칙을 이용해서 상전벽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문제는 삼라만상을 익힌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기문진법에 갇혔다는 것이다.
‘잠깐… 아…! 그 등불이 설마? 함정!!’
그가 익힌 삼라만상은 기환술의 대가라는 모산파의 기환십이결을 모태로 두고 있었다. 아니, 기환십이결을 뛰어넘은 또 다른 공부였다. 그런 삼라만상으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기문진법에 갇힌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현성은 뒤늦게 그 이유를 눈치챘다.
내원을 중심으로 곳곳에 피워진 등불. 어두운 밤도 아닌데 등불을 켜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이다.
‘몽혼혈등(夢魂血燈)라니… 설마 했는데, 정말 혈천이었어.’
겉보기에는 평범한 등잔이지만, 그 속에 은은하게 펴진 연기는 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몽혼혈등은 몽혼혈라진이라는 천고의 진법을 운용하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물건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은 몽혼혈라진에 갇혔단 말이었다.
‘곤란하게 되었어.’
* * *
“몽혼혈라진이 가동되었다고?”
부하의 보고에 원표의 눈빛이 번쩍였다. 몽혼혈라진이 가동되었다는 말은 침입자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설마 해가 중천에 뜬 낮에 침입한 자가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원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방환위(四方幻衛)의 기감조차 속이고 침입했다면 보통 놈이 아니군.”
사방환위는 사라진 무영대원들을 제압한 원가의 절정고수들이었다. 몽혼혈등은 사방환위의 너머에 존재했으니, 침입자는 그들에게조차 들키지 않고 잠입했다는 뜻이다.
사방환위로서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또한 그들의 실력을 믿고 있던 원표로서도 짜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방환위에 걸리지 않고 몽혼혈라진에 갇힌 자라면 보통 고수가 아니란 말인데… 빌어먹을! 그렇게 돈을 받아 처먹고 일을 이따위로 해!”
원표는 허창상단주로서 무림맹의 재정지원만이 아니라, 무림맹 간부들에게 뇌물을 주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연히 그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은 허창상단의 편의를 봐주었다. 무영대가 허창상단의 주변을 맴돈 것도 누군가의 귀띔을 해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방환위조차 눈치채지 못할 고수가 움직였음에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열불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사방환위에게 포위만 하라고 해! 괜히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진법 안에 들어가서 일을 그르치지 말고!”
“그, 그게…….”
“미친! 벌써 들어갔단 말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저희의 말을 듣는 분들이 아니니…….”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방환위가 뛰어난 고수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합공은 초절정고수도 감당할 수 없다는 평을 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자유롭고 고집 있는 성격 때문에 관리가 어려웠다. 그나마 원표의 명령은 듣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명령도 내리기 전에 독단으로 움직이고 말았다.
“젠장! 가주가 알게 되면 조소를 짓겠군!”
아무리 자신이 혁련중광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한들, 혁련세가의 가주는 혁련용후였다.
그에게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빌미까지 제공했으니 짜증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침입자를 처리하는 대로 장부부터 옮겨야겠어.’
문제가 될 만한 서류는 다 처분했으나 허창상단의 비밀장부는 처분하지 않았다.
비밀장부는 그의 최후의 한 수이기 때문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보관해두었다.
몽혼혈라진의 중심에. 누구도 손에 넣을 수 없는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몽혼혈라진이 천고의 기문진법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 * *
‘듣던 것보다 더 뛰어난 진법이구나.’
과거 혈영살객이라 불렸던 이현성도 몽혼혈라진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몽혼혈라진은 몽혼혈등이라는 기물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이 몽혼혈등의 제작은 쉽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혁련세가의 비전이기에 혈천과도 공유하지 않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