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이런! 유 형!”
“가, 가가!”
환호하는 관중들과 달리 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현성과 남궁설지는 사색이 되어서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유백을 업고 내려왔다.
의식을 잃을 정도의 충격과 내상을 입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목숨이 위협될 정도로 치명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때 한 사내가 다가왔다.
“적양신장 구 대협께서 다음 비무를 포기하셨습니다.”
“저희 역시 포기하겠습니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의식을 잃은 유백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만, 내상을 입은 상황이었다.
욕심을 부리다가 오히려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아쉽지만 이쯤 멈추는 것이 옳았다.
그렇기에 유백 대신 이현성이 비무 포기를 선언했다.
“가가…….”
아쉬워하는 이현성과 달리 남궁설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무사하다면 말이다.
그때는 몰랐다.
패배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 * *
“기대 이상이군. 수고했네. 혈살동주.”
“가, 감사합니다. 부천주님!”
베일에 싸인 혈천주와 달리 실질적으로 혈천을 이끌고 있는 부천주가 방문했다. 그의 등장에 혈살동주 혈강야차(血剛夜叉)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부천주의 격려에 혈살동주 이하 혈살동의 관장과 교두들은 기뻐했다.
허나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그런데… 몇몇의 연락이 끊겼더군.”
“그, 그건…….”
혈살동에서 육관의 17명과 사관의 84명을 제외한 오관의 68명이 차출되었다.
혈살객은 최소한 혈살사관을 통과한 자들에게 자격이 주어진다.
즉, 68명은 살수로서 제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문제는 연락이 끊긴 몇몇이었다.
“자네를 탓할 생각은 아닐세. 허나 몸 풀기에 불과한 이번 임무에서 이 정도 손실은 좀 안타깝군. 아직 백대고수급을 암살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혈천에서 혈살객에게 건 기대는 작지 않았다.
그만큼 돈과 시간을 많이 쏟았다.
따라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정말 곤란했다.
진짜라고 할 수 있는 혈살육관의 기재들이 남아 있긴 했다.
그럼에도 조금은 아쉬운 결과였다.
자신들의 잘못이라곤 할 수 없으나 혈천의 부천주가 분노한다면 자신들의 목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걸 알기에 그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허나 싼 똥은 직접 처리해야겠지?”
“무, 물론입니다. 부천주님.”
“한천마녀를 죽이고 독고구검을 회수하게.”
“……!!”
부천주의 명령에 혈강야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천마녀의 무위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초절정고수로 추정되었다.
혈살객들이 제법이긴 하지만 초절정고수를 벨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육관의 기재들이 혈천신단을 용해하고 출관한다면 몰라도 아직은 무리였다.
이 지시는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한천마녀의 발을 묶어줄 초절정고수를 보내주겠네. 그럼 가능하겠지?”
“부, 부천주님의 명을 기필코 완수하겠습니다.”
초절정고수를 보내주면서도 혈살객을 움직이려는 부천주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허나 불복은 불가능했다.
오직 복종할 뿐이었다.
지시를 내린 부천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흐흐흐.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기대하지.’
허창상단
“자네 비무를 잘 봤네. 난 선학문의…….”
“허허. 얼굴도 장부답군. 내 딸이 말일세…….”
적양신장 구연청과의 비무로 의식을 잃었던 유백이 깨어났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처음 보는 정파 명숙들이 치근덕거리니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고 축객령을 내리는 것도 힘들었다.
호의를 보이는데 단호히 돌아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구원자가 나타났다.
“선객들이 많군. 아무래도 다음에 와야겠어.”
“차, 창천검군(蒼天劍君) 남궁가주께서 여긴 어떻게…….”
“나, 남궁세가도 그에게 관심이 있단 말인가!”
한 무리가 들이닥쳤다. 귀빈석에 있어야 할 남궁영호와 제왕검대였다. 그의 등장에 유백을 탐내고 있던 중소방파의 수장 혹은 무림세가의 장로들은 바로 돌아갔다.
남궁세가가 낀 이상 자신들은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신룡표국의 유백입니다.”
“반갑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얼굴은 처음 보는군. 아, 몸도 불편한데 일어날 필요는 없네.”
남궁영호의 뼈가 있는 말에 유백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로서는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지옥엽을 채가고도 인사 한번 오지 않았다.
물론 유백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그는 여산 성수의가에 다녀온 후 신룡표국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런 핑계는 전혀 통하지 않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조, 조만간 인사드리러…….”
“그게 언젠데?”
“예? 그, 그게…….”
“아, 아빠!”
남궁영호의 압박에 유백은 더욱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했다. 그때 한 여인이 들어와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녀는 바로 남궁설지.
남궁영호의 여식이었다.
“정말 이러시기예요?”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느냐?”
부녀지간의 투덕거림에 유백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남궁영호의 매서운 눈빛이 유백에게 몰아쳤다.
“뭐가 우스운가?”
“아, 아닙니다. 아버님.”
“아버님~?”
“가, 가주님…….”
호통을 친 것은 아니지만, 말끝을 길게 끈 남궁영호의 말에 유백은 움찔했다. 그는 얼른 호칭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남궁영호는 혀를 찼다.
“저런 녀석이 뭐가 마음에 든다고 아버님과 저 녀석은… 그보다 이제 어쩔 생각인가?”
“표, 표국으로 돌아가서…….”
“이 아이와 어쩔 생각이냐고!”
“해,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황한 유백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의 말에 남궁설지는 얼굴이 붉어졌다.
남궁영호도 그제야 얼굴이 조금 펴졌다.
“내 딸, 그냥 못 준다!”
“아, 아빠!”
“몸 좀 회복되면 본가로 오게. 내 딸을 지켜줄 수 있는지 좀 보겠네.”
“곧 찾아뵙겠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이라는 말에 남궁영호는 한 소리 하려다가 말았다. 사실 그 역시 반쯤은 마음을 열어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룡유가라는 명가 출신이라도 지금은 일개 표국를 맡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배경이야 차차 만들어주면 그만이고… 그보다 좀 아쉽군. 신검이란 청년을 기대했는데 말이야.’
유백도 충분히 마음에 들 만한 인재였다.
허나 이현성은 격이 다르다.
부친인 검왕이 혀를 내두른 정도였다. 유백이 남궁영호를 만나고 있을 때, 이현성은 제갈현호의 소개로 무림맹주를 만나게 되었다.
* * *
“허허.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더니, 자네 같은 친구가 있을 줄이야.”
“아직 멀었습니다. 맹주님.”
백의무제(白衣武帝) 백무강의 진심 어린 말에 이현성은 겸양을 떨었다. 아니, 겸양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백의무제가 누구인가.
오제(五帝)의 한 명이었다. 아무리 이현성이 대단해도 그의 앞에서는 아직 멀었다.
팔왕(八王) 위에 오제가 있다. 팔왕조차 그에겐 높고 높은 산이니 백의무제는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십정과 칠사를 제외하곤 적수가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겸손도 과하면 욕이 될 수 있네. 그리고 자넨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맹주님.”
오만하지 않으면서 비굴하지 않았다.
거기에 담담한 여유까지 느꼈다. 그런 이현성이 마음에 드는지 무림맹주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는 단순히 격려하기 위해서 이현성을 은밀하게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자넬 부른 것은 부탁이 있기 때문일세.”
“부탁이시라면…….”
“자네가 본맹의 감찰단을 맡아줬으면 하네.”
“죄송합니다. 장원을 비우고 장기간 무림맹에 상주할 순 없습니다.”
감찰단은 내부를 감사(監査)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만큼 상당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동시에 가장 미움을 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웬만한 사명감을 가지지 않고는 맡을 수 없는 자리였다. 무림맹주는 그런 감찰단주 자리를 이현성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을 했다.
그럼에도 무림맹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거절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럼 대신이라곤 말하긴 그렇지만, 하나의 물건을 가져와주겠는가?”
“물건이라시면…….”
무림맹주는 애초부터 이현성에게 감찰단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진짜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선수를 친 셈이었다.
이현성은 눈치챘음에도 당해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가 무슨 부탁을 할지 궁금했다.
“허창상단의 비밀장부.”
“……!!”
무림맹주의 말에 이현성은 깜짝 놀랐다.
백의무제라고 불릴 정도로 정(正)이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답지 않은 부탁에 이현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허창상단은 이곳 허창현을 거점으로 둔 토착 상단일세. 무림맹의 재정을 지원해주는 상단 중 하나이기도 하네.”
“그런 상단을 조사한다는 것은…….”
상단에서 무림맹에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은 좋은 일에 대한 격려가 아니었다.
무림맹의 위세를 빌어서 사업을 번창하겠단 뜻이다.
실제로 무림맹의 재정을 지원하는 상단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단 중 하나인 허창상단의 비밀장부를 입수하겠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도로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외부에선 무림맹이 힘으로 상단을 뺏으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허창(許昌)은 ‘번창이 약속된 땅’이란 뜻을 담고 있지. 실제로 정주 못지않은 자금이 유입되는 지역이기도 하고… 그런 허창에서 대대로 터를 잡은 허창상단이 삼대상단이나 십대상단은커녕 중소상단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더군. 이상하지 않나?”
“허창에는 허창상단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맞네. 허나 이름만 다를 뿐, 실질적으론 허창상단의 하부 상단에 불과하다는 정황이 나왔네. 문제는 너무 완벽하게 서류조작을 해놔서 정황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네.”
“그렇다고 한들, 무림맹에서 조사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수상하긴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삼대상단의 견제를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정황과 달리 하부 상단이 아닌 그저 협력관계일 수도 있다.
아직은 이렇다고 할 확실한 증거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네. 무림맹이 상계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조사를 하던 무영대원들이 사라졌네.”
“네? 무영대원이 말입니까?”
“은밀하게 조사 중인데, 알아낸 것이 없네. 한가지 공통점은 허창현을 조사 중 허창상단에 이상함을 느낀 직후 사라졌단 것일세.”
“…….”
그제야 무림맹이 허창상단을 의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영대(無影隊)는 무림맹의 하부조직이 아니었다. 제갈세가의 숨겨진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비선조직이었다.
정보망의 방대함은 삼대 정보집단에 미치지 못하지만, 무영대는 세밀한 정보수집에는 오히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