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이에 그녀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매화도관주는 도호를 읊었다.
“태상노군이시여… 언젠가 일어날 줄 알았거늘…….”
매화도관주는 두루마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수백 년 전, 한 무림인이 매화도관에 귀의하면서 속세와 인연은 끊고 얻은 깨달음을 두루마리에 적어 태상노군께 진상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태상노군상의 두루마리였다.
“검마(劍魔) 노선배께서 귀의한 곳이 이곳이셨군요. 그보다 이제 어쩌실 예정이십니까? 그가 혼자 알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자들이 침범하게 될 터인데…….”
“화 여도우가 맡아주시겠습니까?”
“제…가 말인가요? 차라리 화산파에…….”
화옥령은 매화도관주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만큼 검마의 독고구검은 대단한 내력을 자랑하는 검학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한천마녀가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선대에서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당시 화산 장문인께서 말씀하시길… 화산과 인연이 없는 물건이라며 거절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선대의 연이 닿은 물건을 파기할 수도 없어서 지금까지 보관했을 뿐입니다. 여도우께서 보관해주셨으면 좋을 듯싶습니다.”
“무량수불…….”
순간 화옥령은 한천마녀가 아닌 화산파의 제자였던 시절처럼 도호를 읊었다.
그렇게 검마의 독고구검은 매화도관에서 화옥령에게 전해졌다.
화옥령과 이현영은 알지 못했다.
의도치 않게 혈천의 일을 방해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 * *
챙!
“큭!”
“신룡현현(神龍顯現)!”
사내는 다급히 칼을 휘둘렀으나 유백의 검격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칼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유백은 검을 거두고 대신 손을 내밀었다.
곧 심판의 선언과 함께 환호가 울려 퍼졌다.
“승자! 신룡표국의 유백!”
“와!!”
“잘한다!!
비무대회의 참가자 수천 명을 예선을 통해서 추리고 추렸다.
그 결과, 총 256명이 본선에 오르게 되었다.
다행히 이가장 대표로 나온 유백은 256명 중 한 명으로 뽑히게 되었다.
본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별동대 속할 자격이 생긴 셈이었다.
“끙… 젊은 친구가 제법이군. 허! 나도 이제 늙었군. 본선에 오르자마자 패배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허허. 농담일세. 내 몫까지 잘 싸워주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산서 태원에서 온 창파도(蒼波刀)의 격려 속에 유백은 128강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런 그를 이가장과 오랜만에 만난 남궁설지가 환영해주었다.
“수고하셨어요.”
“고마워. 지매.”
신룡대가 여산으로 떠난 이후 본가로 돌아갔던 남궁설지였다.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문제는 이곳에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었다.
“흠흠.”
“아…….”
“어머!”
누군가의 헛기침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민망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순진한 그들의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하… 나도 마음을 정해야 하나?’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현성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다.
제갈현지나 문교교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타도 혈천이란 목표를 위해 이성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지웠다.
그러다 보니 이성에 눈을 뜨는 것이 쉽지 않았다.
허나 자신을 맹목적으로 기다려준 그녀들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확실하게 정해야 했다.
이현성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다시 한번 굳게 결심했다.
그 무렵, 무림맹 수뇌들은 은밀하게 회동하고 있었다.
* * *
“이게 무슨 말입니까! 쌍연검(飛燕劍), 태룡도(太龍刀), 구환권(九環拳)이 죽다니요!”
“환광검객(幻光劍客)과 소요검로(逍遙劍老)께선 어떻고 말이오!”
밀려 들어오는 비보(悲報)에 무림맹 수뇌들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그들은 무림에 풍파를 일으킬 정도의 고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고 넘길 수 있는 하찮은 무인도 아니었다. 특히 소요검로는 무림원로라 해도 될 정도로 연배가 지긋한 전대 노고수였다.
비록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도 전대 고수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는 기인이었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라는 무자철권(無字鐵券)이 무이산장(武夷山莊)에 있었을 줄이야.”
“허… 만불상(萬佛像)은 어떻고…….”
수많은 기인들의 죽음과 기보들의 강탈.
문제는 무림맹의 발족 및 비무대회 때문에 무림의 시선이 이곳에 집중했을 때를 틈타 벌어진 사건들이란 점이었다.
이는 무림맹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자 무시였다.
문제는 사건이 너무 많아서 모든 것이 밝혀진다면 무림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단 점이었다.
“이걸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무림맹의 수뇌들은 골머리가 썩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두의 시선은 총군사인 제갈윤호에게 몰렸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장 공표한다면 혼란만 야기할 수 있지요. 우선 각 성의 대문파와 무림세가 그리고 지부에 연락해서 은밀하게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정황을 어느 정도 파악해야 공표를 해도 가닥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이정도 생각해내지 못할 자는 없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러워 당연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군사의 존재는 이런 상황에서 빛나는 법이었다.
“맹주님과 장로, 호법들께서 동의하신다면 신산각과 개방의 협조 하에 연락해주겠습니다.”
반대하는 사람 하나 없이 신산각의 주도하에 개방과 공조하게 되었다. 중구난방으로 손을 써봤자 혼란만 야기할 뿐임을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로 신산각에 주도권을 넘기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허나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나은 선택은 없기에 좌중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윤호 역시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무지막지한 녀석들이란 말인가…….’
천하의 신산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에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유백은 128강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64강에 오르게 되었다.
* * *
“적양신장(赤陽神掌)… 구 노사께서 왜 이곳에…….”
“허허…… 그렇게 되었네.”
유백의 눈이 커졌다.
눈앞의 노인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적양신장이라 불리는 극양장법의 대가인 구연청은 사천당가의 칠대빈객 중 한 명이다.
참가의 제한은 없으나 암묵적으로 무림 백대고수급이나 오대세가급에선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암묵적인 약속을 보기 좋게 깨버린 셈이었다.
물론 사천당가의 가인(家人)이 참가한 것은 아니니, 완전히 약속을 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탄받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비무대회는 중소문파 출신 및 숨겨진 기인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가주님께선 그럴 분이 아니야. 대공자의 짓인가?’
자존심 강한 독종 당철영이 칠대빈객을 비무대회에 내보내는 비겁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건 오히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적양신장 구연청을 비무대회에 보낸 것은 당철영의 짓이 아니었다. 허나 당천수 정도가 칠대빈객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
바로 소가주인 당자성의 수작이었다.
암군(暗君) 당자성의 청이었기에 구연청은 거절하지 못한 채 비무대회에 나왔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렇게 나왔으니 후회 없이 싸워보세.”
“예. 구 노사님.”
그의 말이 옳았다.
그가 비무대회에 나선 이유는 이제 상관이 없었다.
결국 강자가 위로 오르고, 약자는 물러날 뿐이니까.
마음가짐이 바뀌니 눈빛이 바뀌었다.
그 모습을 본 구연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로서 삼초를 양보함세.”
“감사합니다. 구 노사님.”
유백은 구연청의 양보를 거절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구연청의 실력은 진짜였다.
아무리 유백이 급성장을 했다고 해도 버거운 상대임은 사실이었다.
유백은 검을 뽑는 동시에 빠르게 찔렀다.
“신룡현현(神龍顯現)!”
삼초를 양보 받았다고 해서 헛되이 사용할 유백이 아니었다.
견제가 아닌 곧바로 신룡검법을 펼쳤다.
강력하거나 화려한 검초는 아니었지만 신룡검법의 정신이 그대로 깃든 신룡현현이었다.
구연청은 이를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일초에 이어서 이초, 삼초까지 펼쳤으나 구연청의 옷자락조차 벨 수 없었다.
과연 적양신장이라 불릴만한 실력이었다.
양보한 삼초가 끝나자 구연청의 양손에 붉게 변했다.
“훌륭했네. 후배.”
“아직…입니다!”
쾅!
구연청의 적양신장과 유백의 신룡검법이 충돌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유백의 패였다.
이보(二步) 물러난 구연청과 달리 그는 오보(五步)나 물러났다. 허나 구연청은 놀라는 눈치였다.
“훌륭하군. 허나…….”
유백의 재능과 실력은 인정했다.
자신의 인생에 절반도 살지 않은 유백의 검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허나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구연청의 장법이 몰아칠 때마다 유백은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믿으며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눈빛이 살아 있군. 아까운 청년이군. 하필 당가와 악연을 맺어서…….’
당가 아니, 정확히는 당자성과 당천수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구연청으로서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렇다고 한들 사천당가에 신세를 지고 있는 이상, 그들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미안하네.’
당자성의 청은 비무대회에서의 우승이었으나 당천수의 청은 조금 달랐다.
건방지게 당가와 등을 진 유백의 팔다리를 부러뜨려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만나게 될 줄 몰랐기에 수락했는데,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사천당가의 빈객으로 있는 것에 회의감이 들던 참이었다.
“미안하네!”
“…신룡난무(神龍亂舞)!”
극성에 달한 적양신장과 신룡검법 제 육초인 신룡난무가 충돌했다.
일장(一掌)에 극양의 기운을 집중시킨 적양신장과 분산시킨 검으로 몰아치는 신룡난무.
너무도 다른 초식들의 격돌이었다.
콰쾅!!!
강렬한 폭발과 함께 두 사람이 튕겨나갔다.
구연청은 물론 유백은 비무대의 반대로 날아갔다.
두 사람 모두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를 확인한 심판의 무승부 선언으로 인해 분위기가 한층 더 뜨거워졌다.
“와와!!”
“이게 말이 돼? 최고다!!”
모두들 적양신장 구연청의 승리를 점쳤다.
그는 비무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으니 당연했다. 그에 반해 유백은 신룡표국이란 듣도 보도 못한 표국의 주인이었다.
객관적으로 적양신장 구연청의 승리가 거의 확실했다.
그럼에도 무승부라는 이례적인 결과가 나왔으니 관중들이 환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유백이 개천에서 난 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자신들이 이긴것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
이 순간 유백은 영웅이 된 셈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