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안 좋은 소문이 좀 나면 어때요? 저나 아버님은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요.”
“하긴 문 대인이시라면…….”
유학을 배운 학사들은 고리타분한 편이지만, 사고가 깨어있는 문종학은 사고가 자유로운 편이었다.
아무리 은공이라도 무림인인 이현성을 가까이 둔 것부터가 다른 학사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오래 있지는 말거라. 아무리 문 대인께서 신경 쓰지 않으신다고 한들, 외인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해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예…….”
괜히 안 좋은 소문이 나서 그녀의 혼사에 지장이 갈 것을 우려한 말이었다.
허나 그런 배려가 오히려 문교교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둘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그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방문했다.
“장주님. 문 소저께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현성이 문밖에 서 있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문교교를 향해 말했다.
“아, 제갈 소저 기억나지? 하북팽가에서 만나 적이 있으니까. 제갈세가의 제갈현지 소저가 본장에 머무르고 있다.”
“예? 제갈 소저께서요? 그분이 왜…….”
당황해하는 문교교를 대신해서 이현성이 제갈현지의 방문을 허락했다. 별채 안으로 들어온 제갈현지를 본 문교교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제갈현지가 이가장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녀가 이가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가 어쩌면 단순한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네요. 문 소저.”
“예, 그러게요. 일 년만인가요? 제갈 소저.”
하북팽가에서 개최한 봉황지회가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 처음 대면하는 것이니, 일 년만에 만나는 것이 맞았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두 여인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연적(戀敵)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서로를 바라보며 진한 경계심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문교교는 이현성에겐 여전히 어리고 귀여운 누이였지만, 누가 보아도 어엿한 여인으로 자랐다.
외형은 물론 심적으로도 모두 성장했다.
예전처럼 쉽게 마음을 꺾던 문교교가 아니었다.
그걸 증명하듯 제갈현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많이 변했네… 하. 정말 당신은……!’
제갈현지는 한숨만 나왔다.
강력한 연적이 될 수 있던 남궁설지를 치웠더니, 이젠 문교교가 나타났다.
예전과 같은 여리기만 한 소녀라면 신경 쓰이지도 않겠지만, 눈빛만 봐도 많이 단단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눈치 없는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제갈 소저. 교교를 동생처럼 잘 챙겨주십시오. 교교 너도 제갈 소저를 언니처럼 잘 따르고.”
“예… 장주님.”
“네… 오라버니…….”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현성의 한마디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경계심을 거두었다.
괜한 시기를 보냈다간 그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현성이 빠져나가자 방에는 두 여인만 남게 되었다.
한 사내에게 연정을 품은 두 여인이었다.
“잘 부탁해요. 문 소저.”
“저 역시 잘 부탁드려요. 제갈 소저 아니, 언니.”
제갈현지는 그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물론이야. 동생.”
* * *
“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소.”
“수고하셨소, 성수.”
성수(聖手) 백우종은 꽂혀 있던 금침을 회수했다.
그의 진료를 받은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중년 소경이었다.
허나 평범한 소경은 아니었다.
그는 백대고수에 드는 맹검 위지천이었다.
그가 성수의가에 온 지 보름이 지났다.
천하 삼대 신의인 성수의 진료를 받으면 당장이라도 내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그의 내상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환희요후의 극락환희무는 요사스러운 사술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도가의 공부처럼 현묘함이 깃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서장밀교의 한 자락이 닿았다.
이것은 사파고수인 위지천의 무학과는 성질이 맞지 않았다.
또한 무리하게 강기까지 운용하면서 기혈이 다시 한번 엉켜버린 탓도 있었다.
“차도가 눈에 뛸 정도는 아니나 분명 좋아지고 있으니, 조바심 내지 마시고 정양하셔야 완쾌하실 수가 있소.”
“알겠소. 본인도 본인이지만, 함께 온 녀석들도 잘 부탁드리오.”
“걱정하지 마시오.”
신룡대 중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다.
허나 멀쩡한 자도 없었다.
옅은 외상부터 팔을 잃은 대원까지 있었다.
성수의가의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은 덕분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나, 위지천의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살리겠다고 움직였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니 말이다.
성수 백우종이 나가자 위지천 역시 밖으로 나갔다. 곧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의가(醫家)에서 검은 어울리지 않으나 성수의가는 평범한 의가가 아니었다.
성수에게 은혜를 입고 잔류한 사천왕과 보은단은 물론, 치료를 희망하는 무림인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그러니 수련하는 자가 있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으윽! 젠장!!”
한 사내가 검을 휘두르다 말고 자신의 오른팔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그의 오른팔은 피가 묻어나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이대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 사내의 이름은 여송.
신룡대원 중 한 명이자 섬풍각주 연자흠에게 한쪽 팔을 베인 인물이었다.
늦지 않게 성수 백우종에게 치료를 받아서 팔을 이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신의 의술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성수 백우종조차 그의 팔을 잇는 것은 성공했으나 검을 쥘 수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검을 쥔다는 것, 곧 검술을 펼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았다. 힘줄과 근육도 문제였지만, 기의 흐름이 동반되어야 한다. 여송의 상태는 끊어진 힘줄과 근육을 간신히 이은 상태였다.
때문에 검을 쥔 채로 강하게 휘두르는 것은 물론, 기를 주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검객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여송은 포기할 수 없었다.
최소한 단전이 깨진 것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검을 쥘 수 없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검을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인 팔에서 오는 고통과 자유롭게 다룰 수 없는 왼손이 여송의 마음을 괴롭혔다.
“팔을 간신히 이었다고 들었거늘… 이게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부, 부장주님…….”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휘두르던 여송은 위지천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자신의 치부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화가 났다.
자신이 이런 꼴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인데 자신에게 어리석다 말하는 것일까.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공명심에 눈이 먼 자들의 잘못이라는 것을. 허나 위지천의 탓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위지천이 손을 내밀었다.
여송은 순간적으로 그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검…….”
“아! 예…….”
위지천의 말에 여송은 얼떨결에 제 검을 건넸다.
여송의 검을 쥔 위지천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예전에 한 검객을 만난 것이 기억나는군. 제법 쓸 만한 쾌검을 다루던 자였지. 허나 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내 검에 팔이 베였지. 그런데 한 오 년쯤 지났을 때, 한 외팔검객이 나에게 도전을 했다.”
“…….”
여송도 알고 있는 일화인지 입을 다문 채 위지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난 깜짝 놀랐네. 좌수검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좀처럼 상대하기가 쉽지 않더군. 결국 그는 내 검에 목숨을 잃었으나, 그 이후 좌수검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있네.”
위지천의 오른손에 있던 검이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의 좌수검(左手劍)은 매끄럽지만 왠지 모를 미묘한 굴곡을 가진 검로(劍路)를 보여주었다. 이를 본 순간, 여송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막았으나 막을 수 없고, 피했으나 피하지 못하지. 난 이것을 환환미종검(幻幻迷終劍)이라고 이름 지었네.”
“환환…미종…검…….”
우수검과 좌수검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검의 움직임은 물론 기술까지 우수검과는 궤를 달리한다.
게다가 검객들은 대부분 우수검을 익힌다.
우수검객들은 당연히 우수검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좌수검을 상대하는 것은 그들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무의식적으로 우수검객을 상대하는 것처럼 대응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일부는 좌수검을 사도(邪道)로 칭하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좌수검은 흔치 않은 무서운 검이었다.
“여송.”
움찔.
지금까지 위지천은 그를 ‘자네’ 혹은 ‘너’라고 불렀지, 이름으로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름 따윈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지천은 정확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선 부상부터 회복하게. 비록 좌수검이라도 오른팔이 그 모양이라면 제대로 익힐 수 없다.”
“그, 그 말씀은……?”
“자네에게 전수해줌세. 환환미종검을…….”
“아… 감사… 감사합니다.”
억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반은 오기였다.
검을 놓고 싶지 않은 검객으로서의 오기.
그런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환환미종검이라는 좌수검은 한줄기에 빛과 같았다.
자신을 위해 창안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여송은 위지천의 손에서 펼쳐진 환환미종검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내가 고맙네. 포기하지 않아 줘서.”
“…….”
위지천은 검을 돌려준 후 돌아갔다.
거처로 돌아온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고작 검 한번 휘두른 것으로 이런 고통이라니……!”
비록 내공을 운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검을 휘두를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걸 알지만 여송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무리를 한 대가였다. 그러니 고통 때문에 분개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 때문이다.
“강해져서 돌아간다! 기필코…….”
* * *
“맹검이라니… 이런 대어는 참 오랜만이구나.”
“그렇지요. 절검지(切劍指) 이후 처음이니까 말입니다.”
성수의가의 모처에 일남일녀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딸뻘로 보이는 어린 여인에게 깍듯이 존대했다. 반대로 여인은 중년 사내에게 자연스럽게 하대했다. 더 놀라운 점은 중년 사내가 신의라고 불리는 성수 백우종이라는 점이다.
“보은단에 맹검이 더해지면, 본가의 입지도 달라지겠군.”
“허나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절검지보다 더 만만치 않은 자였습니다.”
절검지는 지법의 대가로, 그의 손가락에 부러진 검이 수백에 이른다고 알려진 초절정고수였다.
그는 보은단의 수좌인 사천왕의 맏이기도 했다.
성수의가가 무림성지로서 무림의 분쟁에서 빗겨나갈 수 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의 존재 덕분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