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화천기는 안타까웠다.
화산파 일대제자의 대사형이란 위치 때문에 험난한 길을 선택한 누이를 돌보지 못함이.
‘밉구나… 저런 아이에게 한천(恨天)이란 흉흉한 별호를 갖게 만든 그자가…….’
칠매신검 화천기의 누이는 바로 한천마녀(恨天魔女) 화옥령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는 어여쁜 여인은 그녀의 제자인 이현영이었다.
화옥령은 제자인 이현영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한편, 원수를 찾기 위해서 천하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그만큼 이현영에 대한 애정과 원수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사문이자 집인 화산을 등질 정도로.
그런 그녀도 부친이 장문인의 자리를 내놓는다는 말에 귀를 닫을 수가 없었다.
세대교체를 거의 이룬 무림세가들과 달리 구파일방은 아직 전대 고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구파일방 역시 서서히 세대교체를 준비했다.
곤륜파의 경우 이미 신임 장문인이 자리를 잡았다.
화산파 역시 무림맹 창설을 앞두고 신임 장문인을 세우기 위해서 장로회의가 며칠째 진행되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칠매신검 화천기가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잠깐! 이걸 가져가거라!”
떠나려는 그녀들을 보며 화천기가 다급히 붙잡았다.
그리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의 정체를 눈치챈 화옥령은 거절했다.
“오라버니… 그건 아니 됩니다!”
“되었다. 자소단이 귀해봤자, 너만 하겠더냐. 그리고 영이를 생각해서라도 갖고 있거라.”
그 속에 담긴 것은 놀랍게도 자소단이었다.
무림성약인 소림의 대환단과 비교하면 약간 손색이 있지만, 무림에서 손꼽히는 상급 영단이었다.
그런 자소단이 흔할 리가 없었다.
화천기는 화산파의 제자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 덕분에 한 알을 하사받았다.
그런 귀한 영단을 누이를 위해 내놓은 것이다.
그는 거절하는 화옥령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오라버니…….”
“잊지 말거라. 넌 아니, 너희는 화산의 딸이다.”
두 사람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화산을 내려갔다. 그런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천기가 나직이 말했다.
“아버님… 저 아이를 용서하소서…….”
* * *
“빨리 잡아! 여산을 오르기 전에!!”
낙양 호연방을 떼어났다고 해서 신룡대가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오히려 습격은 더 잦아들었다.
의마현(義馬縣)에 터를 잡고 있는 풍운마장(風雲馬場), 민지현(澠池縣)의 비연당(飛燕堂).
그리고 삼문협(三門峽) 일대에서 위명을 떨치는 삼문삼귀(三門三鬼) 등.
낙양 호연방만은 못하지만,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중소방파 혹은 절정고수였다.
습격을 받을 때마다 부상과 피로가 쌓이는 신룡대 입장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강기를 억지로 운용한 탓에 더욱 상태가 악화된 위지천의 도움 또한 바랄 수 없었다.
다행히 겨우겨우 도망쳐서 하남성을 벗어나 섬서성에 도달했다.
과연 화산파였다.
화산의 앞마당이라는 화음현(華陰縣)에 도달하자, 무섭게 쫓아오던 무리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듯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안 되겠어요, 유 대주. 먼저 가세요. 여산에 도착하면 저들도 더 이상 쫓을 수 없을 거예요.”
“벽 여협, 안 됩니다!”
화음현에 도착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추격자들이 생겨났다.
바로 섬서무림의 방파들이었다.
“주군의 명을 거부할 건가요!”
“그래도 안 됩니다! 벽 여협께서 홀로 희생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함께 가겠습니다.”
신룡대는 전원이 사내였다.
허나 유백과 언쟁을 하는 인물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독안귀의 양녀였던 귀매(鬼魅)였다.
신룡대만 보낸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은 이현성이 뒤늦게 귀매를 보낸 것이다.
그녀가 늦게나마 합류하지 못했다면 신룡대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귀매는 원수를 갚아준 이현성을 주군으로 삼았다.
그런 주군의 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려 했다.
“벼, 벽 여협! …신룡대는 부장주님을 무사히 여산까지 모셔라!!”
“대, 대주님!!”
귀매가 타고 있던 말의 머리를 돌려서 추적 중인 무리를 향해 되돌아갔다.
이에 유백은 신룡대를 그대로 보낸 후 귀매를 뒤따라갔다. 임무완수를 위해서 그녀를 희생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 대주…….”
“혼자 가시는 것은 안 됩니다. 당신도 이가장의 식구가 아닙니까.”
유백의 말에 귀매는 혼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친부를 잃은 이후 가족이 되어 주었던 양부 독안귀가 죽었으나 새로운 식구들이 생겨났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검을 쥘 힘이 생겼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수십 아니, 족히 이백은 되어 보이는 무리가 달려왔다. 말이 이백이지,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절정고수라도 벅찬 상황이었다.
“미친 연놈들이군. 우릴 막으려고 하다니 말이야.”
“흠흠…! 연 대협께서 어리석은 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저는 마차를 추적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들은 좌 대협께서 맡으시지요.”
이백의 무리는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다.
운검장(雲劍莊), 섬풍각(閃風閣) 등 맹검 위지천을 베었다는 명성을 노린 불나방들이었다.
허나 모두가 위명을 노리는 것은 아니었다.
“저 악적이 도망치는데 언제까지 시간을 끌 거요!”
“형님! 아버님의 원수를 갚으러 갑시다!”
수월쌍걸(水月雙傑).
수면 위에 비친 달을 벴다는 수월대협(水月大俠)의 자식들이었다.
일대 대협으로 알려진 수월대협은 패악을 저지르는 무리를 베었다. 문제는 그들이 천사교 예하인 잔살당의 무리였다는 점이었다. 천사교는 보복 차원으로 고수들을 파견했다.
그중 한 명이 당시 호교사자였던 맹검 위지천이었다.
당시에는 그 역시 초절정지경에 오르기 전이었던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허나 결국 수월대협은 맹검 위지천의 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존경하는 부친을 잃은 수월쌍걸은 부친의 도법을 갈고 닦으며 원수를 갚을 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열일을 제치고 달려온 것이다.
채~앵!!
“비켜라!!”
“큭! 미안하나, 그럴 수 없소.”
수월쌍걸은 철천지원수인 맹검을 코앞에 두고 이성 잃고 무작정 달려갔다.
그리곤 방해하는 유백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 역시 부장주인 위지천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마차를 쫓는 것을 막아야 했다.
수월대협의 도법은 극쾌를 추구한다.
때문에 그의 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쾌도인데 반해, 한이 쌓인 수월쌍걸의 도법은 극강을 추구하는 도법이었다.
덕분에 유백은 그들의 칼을 막아내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이익!!”
챙! 챙! 콰쾅!!
한명 한명이 자신 못지않은 고수였다.
유백은 수월쌍걸의 합공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 채 수세에 몰렸다. 그간 쌓인 피로와 상처가 더해지니 목숨까지 위험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귀매는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차를 쫓으려는 무리를 막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결국 유백은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악적을 감싸는 네놈 역시 악적이다!”
“…신룡난무(神龍亂舞)!”
신룡검법의 여섯 번째 초식으로, 검왕 남궁무백의 가르침 덕분에 단초를 깨달았다.
그러나 아직 미완성의 초식이었다.
제대로 수련이 되지 않은 초식을 섣불리 실전에서 펼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유백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신룡검법의 첫 번째 초식부터 다섯 번째 초식은 한 명의 적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초식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수월쌍걸, 두 사람 모두를 상대해야 했다. 신룡난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콰쾅!!
“크윽!!”
“커억!”
“헉… 헉…… 우웩!”
수월쌍걸은 예상치 못한 유백의 반격을 간신히 막아냈으나 그 충격으로 나가떨어졌다.
문제는 유백이었다.
완성하지 못한 신룡난무를 펼친 대가로 내상을 입고 피를 토했다. 적은 수월쌍걸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조차 무찌르지 못한 채 내상을 입었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귀매 역시 위급한 상황이었다.
“흐흐… 뒤를 맡기겠소!”
“젠장! 연자흠. 이 쥐새끼 같은 놈!”
수월쌍걸과 운검장 등이 유백과 귀매를 상대하고 있을 때, 섬풍각주인 연자흠이 수하들이 이끌고 떠나버린 것이다. 기회를 놓친 운검장주 좌보는 이를 갈았다.
때문에 귀매와 유백이라도 죽여서 분을 풀 생각이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것들이 감히 본장을 방해하다니!”
운검장주와 운검장 고수들은 흉흉한 살기를 뿜었다.
운검장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릴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 그들로서는 분노하는 것이 당연했다.
허나 대의가 아닌 자신의 위명을 위해 검을 든 것은 결코 옳지 않았다.
하늘도 허락지 않았는지 운검장의 뜻을 막았다.
“죽어… 헉!”
쾅!!
어디선가 강렬한 기운이 날아들었다.
운검장주는 물론, 운검장 고수들이 거의 동시에 나가 떨어졌다.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들은 검을 쥐고 사방을 경계했다.
“어, 어느 고인께서 본장에 가르침을 주시려는 겁니까?”
“하찮구나.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하다니!”
한껏 긴장한 운검장주를 보며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중년 미부와 묘령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검장주는 그녀들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일개 여인의 검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었다.
그는 당연히 이것을 노고수의 기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을 꾸짖은 자는 한낱 여인에 불과했다.
운검장주는 자존심이 상했다.
“누군지 모르나 남의 일이 끼어들다니… 서방이 그런 것도 가르치지… 컥!!”
“감히 사부님을 모욕하다니……!”
그나마 무림여협이 존중받는다고 하지만 현재의 풍토상 여인은 그리 존중받지 못했다.
실제로 운검장주는 상대가 여인이라는 점만으로 조금 전 그 강력한 검기를 무시한 채 두 여인을 폄하했다.
그 대가로 그는 어린 여인의 검에 의해 나가떨어졌다.
“끄응! 이, 이년이 감히!!”
“감히 본녀의 제자를 모욕하다니… 죽고 싶나보구나.”
“계집이 검을 다룬다고…? 음… 헉! 하, 한천…….”
어린 여인의 검에 나가떨어진 운검장주 좌보는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시뻘게졌다.
운검장주의 욕설에 중년 미부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녀의 차갑고 섬뜩한 기세에 움찔한 운검장주는 이내 표정을 굳히며 기겁을 했다.
중년 미부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본녀가 누구인지 알았나 보군. 꺼려라. 아니면…….”
“아, 아닙니다.”
“자, 장주! 저년이 누구이기에… 큭!”
운검장 고수의 거친 언사에 좌보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을 맞은 삼대는 당황했다.
허나 오히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좌보였다.
만약 그녀가 화가 났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살아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닥치고 모두 물러난다!!”
“조, 존명!”
여인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