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주로 검을 나누긴 하지만 분명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시간은 적지 않았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이성적인 감정인지, 강자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향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부장주님의 내상 치료 때문이니, 시일은 알 수 없을 것 같더라.”
“그렇…군요.”
동요하는 남궁설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할 제갈현지가 아니었다.
신산 제갈윤호조차 인정한 화술의 대가가 바로 그녀였다.
제갈현지는 슬슬 남궁설지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너도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부장주님은 천사교 출신인 사파고수야. 아무래도 많은 은원관계를 맺었겠지. 물론 원한이 더 많을 테고… 그래서 성수의가로 다녀오는 길이 만만치는 않을 거야.”
“…….”
제갈현지는 남궁설지를 살짝 힐끔거렸다.
입을 다물고 있으나 그녀의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백 님… 아니, 유 오라버니께서는 절정고수이시니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지…….”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음? 알겠어.”
남궁설지가 밖으로 나가자 제갈현지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가 부추기긴 했으나 네 마음을 응원하는 것이니 잘못은 아니지.”
그렇게 제갈현지는 강력한 연적이 될 수 있는 남궁설지를 정리했다.
* * *
“아… 들었어? 장주님의 부탁을 받았어.”
유백은 이미 이현성에게 위지천의 호위임무에 대해서 들었는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정파출신으로서 사파고수인 위지천에 대한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파출신이라 해서 모두 악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지친은 그냥 사파고수가 아니었다.
친구인 이현성의 의형이며, 장원의 부장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파출신이라는 점이 호위임무를 거절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위험할 수 있는 임무란 것은 알고 있나요?”
“아무래도 부장주님께서 천사교의 호교사자셨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니 나와 신룡대가 호위하는 거고.”
임무를 부여받기에 앞서 위험성 역시 고지 받았다.
그렇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림인으로서 위험하다고 피할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믿고 부탁한 이현성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동행하겠어요.”
“뭐, 뭐?! 위험해!”
“그러니 동행하려는 거예요. 제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저는 검화(劍花), 남궁세가의 여식이에요. 제가 동행한다면 습격하려는 무리가 없을 거예요.”
“…그래도 안 돼. 널 그런 위험 속에 노출시킬 수 없어.”
남궁설지의 설명을 들었으나 유백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말대로 남궁설지의 존재만으로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허나 줄일 수 있지, 아예 없어진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부장주의 호위를 맡은 이상 유사시 그의 안위가 우선된다.
즉, 그녀까지 챙기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유백은 거절하는 것이다.
“왜… 안 되죠? 오라버니만 못하지만 저도 검사(劍士)예요. 제 한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어요.”
“널 무시하는 게 아니야. 허나…….”
“왜… 왜… 저랑 함께 가는 게 그렇게 싫으신 건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어. 나야 당연히…….”
평소와 다른 남궁설지의 반응에 유백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에 남궁설지는 더 세게 밀어붙였다.
“당연히? 뭔가요?”
“아, 아니다.”
“뭐가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싫다면…….”
“싫다니! 좋아한다. 헉!”
얼떨결에 고백을 한 유백은 물론, 엉겁결에 고백은 받은 남궁설지 역시 당황했다.
허나 곧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만발했다.
“정말… 제가 좋으신가요? 오라버니.”
“그게… 후… 그래… 하지만… 그뿐이야.”
“뭐가 그뿐이에요?”
“명맥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문의 후예인 내가… 대 남궁세가의 여식을 감히 언감생심…….”
짝!!
그 순간, 별이 번쩍였다.
유백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뺨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궁설지가 자신의 뺨을 때린 것이다.
허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어때서요… 오라버니가! 뭐가 어때서 그래요!”
“설지야…….”
그녀의 손이 붉게 부어오른 유백의 뺨을 어루만졌다.
두근두근.
남궁설지의 눈동자에 유백의 얼굴이 비쳤고, 그의 눈동자에 남궁설지가 비쳤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유백의 얼굴이 비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무언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유백, 그의 입술이.
두 사람 사이에 찰나가 억겁과 같고, 억겁이 찰나와 같은 시간이 흘렀다.
입술이 떨어지며 남궁설지가 물었다.
“…가가라고 불러도 되나요…….”
“…지매…….”
떼어졌던 입술은 다시 겹쳐졌다.
긴긴 밤이 지날 때까지…….
* * *
“부장주님께서도 틈틈이 가르침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분명 신룡대에게도 좋은 시간이 될 것이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이가장의 비밀통로 앞에 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신룡대의 첫 임무를 떠나기 위해서였다.
임무의 정확한 목적과 목적지는 호위책임자인 유백만이 알고 있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한 고육지계였다.
이현성은 미안한 마음을 전음으로 전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오, 유 형.
―아닙니다. 오히려 저를 믿고 맡겨줘서 고맙습니다. 이 형.
마땅한 전력이 없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으나 이현성으로서는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생각보다 위험한 임무가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말의 희망이었던 남궁설지의 동행도 무산되었다.
그녀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남궁설지의 동행만으로도 위험도가 급격히 줄어든다.
그렇기에 제갈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허나 결국 그녀는 신룡대와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 형, 내 대신 그녀를… 지매를 잘 부탁합니다.
―……!!
이현성은 유백의 전음에 눈이 커졌다.
별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변화는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급변했다는 사실을.
―…남궁 소저는 걱정 마시오. 유 형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제가 잘 보살필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이 형.
이현성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남궁설지가 유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애틋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눈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다려줘.”
유백의 목소리가 크진 않았으나 가까운 위치에 있던 이들은 모두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대해 눈치챈 이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둘에게는 그들의 반응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싶었다.
특히 남궁설지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에 달아주세요.”
“…소중히 간직할게.”
그녀가 건넨 것은 붉은 수실이었다.
유백은 그녀에게 받은 붉은 수실을 자신의 검파에 달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설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흠흠… 대주님.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합니다.”
“아, 출발하죠.”
“예. 대주님.”
신룡대원의 말에 유백은 약간 머쓱해하며 출발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위지천을 태운 마차와 십기의 인마(人馬)가 이가장을 떠났다.
섬서성 여산의 성수의가를 향해.
멀어지는 무리를 남궁설지는 애틋하게 바라봤다.
‘가가… 무탈하게 돌아오세요. 언제까지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 * *
“안 그래도 슬슬 손을 쓸까 했거늘… 알아서 나왔다?”
혁련용후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을 정리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방해한 이가장을 징치하기 위해 천사교를 이용하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펼쳤다.
허나 어처구니없게 이가장이 습격 온 천사교의 교수들을 무찌르고 말았다.
맹검 위지천이 쓰러졌다고 하지만 혁련용후로선 만족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럼에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신산 제갈윤호에 이어서 검왕 남궁무백이 이가장에 눌러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보를 차단했다고 하지만 혁련세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제갈윤호도 문제였지만 남궁무백이 이가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초절정고수도 손을 쓰는데 조심스럽다.
하물며 화경고수는 혁련세가라도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제갈윤호와 남궁무백이 이가장을 떠났다.
이제 다음 수를 쓰려던 찰나에 위지천이 이가장을 벗어났다.
따라서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맹검에게 이를 가는 자가 많긴 한데…….”
천사교 호교사자였던 위지천이었다.
그와 은원, 특히 원한을 가진 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은 이를 갈면서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위지천이 호교사자이자 초절정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입장이 다르다.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탈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내상까지 입었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라면, 혹은 명성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정파고수가 좋겠지?”
사파사세는 같은 사파무림의 세력임에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그러다 보니 맹검 위지천이 상대한 적은 같은 사파사세 혹은 그들 휘하의 사파방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맹검 위지천과 악연을 맺은 자는 대부분 사파고수였다.
허나 사파고수만은 아니었다.
그의 목을 원하는 정파고수 역시 적지 않았다.
상대하는데 정사(正邪)가 무슨 의미냐고 할 수 있지만 지금 그의 입장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천사교 호교사자였던 시절에는 거칠 것이 없었지만, 이가장의 부장주가 된 지금은 입장이 달랐다.
정파고수와의 분쟁은 그만이 아니라 이가장에게도 부담을 지우게 될 수 있었다.
그걸 알기에 혁련용후는 맹검의 은밀한 외유를 정파고수들에게 흘릴 생각이었다.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맹검. …물론 이가 애송이 놈도…….”
혁련용후는 맹검 위지천뿐만 아니라 이현성 역시 노리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현성을 더욱 노리고 있었다.
다만 위지천이 먼저 기회를 만들어줬을 뿐이었다.
위지천의 섬서 여산행은 예상 이상으로 험난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가장을 향한 혁련세가의 발톱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듯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