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일반적으로 칼(刀)과 검(劍)이 충돌하면 십중팔구 검이 부러진다.
그러나 심사관의 검은 몇 배는 더 두꺼운 도와 충돌했음에도 멀쩡했다.
유백의 검이 신룡유가의 보검이기 때문도 있으나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월등한 탓이 컸다.
귀풍도는 일검에 고꾸라졌다.
“검등으로 쳤으니 곧 깨어날 겁니다. 다른 분들 중 마음이 바뀌셨으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예를 차리면서도 단호한 손속은 그가 결코 무른 인물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귀풍도는 인성과 달리 제법 실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신룡대주는 너무나 가볍게 제압했다.
지금 상황을 통해서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과연 이가장이 정주 제일인 이유를 알겠군’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어진 심사를 무척 신중하게 임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에잉~ 아깝군! 아까워.”
“역시 장주가 보통이 아니야. 이렇게 손을 쓰다니…….”
그들은 바로 남궁무백과 제갈윤호였다.
두 사람 모두 유백을 노리고 있었다.
이현성의 친구답게 뛰어난 인재였다. 또한 몰락했으나 명가의 후예였기에 탐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가문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던 차에, 그가 이가장의 무력대를 맡게 되었단 것을 알기 되었다.
식객과 무력대주는 입장이 다르다.
아무리 탐이 나도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알려지면 오대세가의 횡포란 추문만 돌 테니까.
“그보다 언제까지 있을 겐가?”
“안 그래도 조만간 돌아갈 생각이네. 그러는 자넨 안 돌아가는가?”
“나 역시 돌아가야지.”
손녀의 일 때문에 이가장에 눌러앉았지만, 언제까지 이가장에서 신세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두 사람은 검왕과 신산이었다.
‘조만간 장주와의 약속을 지켜야겠군.’
* * *
“열 명이라…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군.”
유백은 지원자 열셋 중 열 명이나 합격시켰다.
애초 허정이 1차적으로 선별한 인재들이었기에 합격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열 명 중 셋은 일류고수이고, 나머지 일곱은 이류무인이었다.
실력이 선별 기준은 아닌지, 탈락한 셋은 모두 일류고수였다.
“물론 유 형… 아니, 유 대주가 직접 뽑은 자들이니 잘 키워보십시오.”
“맡겨주십시오.”
이현성은 신룡대에 한해서는 유백에게 일임했다.
허정에게 묵룡대를, 마 집사에게 가솔들을 맡긴 것처럼.
“묵룡대의 수련 성과는 어떤가?”
“죄송합니다. 아직 보고드릴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이현성의 물음에 허정은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진척을 보이기 아직 이른 것은 아네. 허나 무한정 기다릴 순 없네. …그래, 자네를 자극할 만한 말을 해주지. 내가 북경에 있을 때, 거둔 이들이 있네. 현재 모종의 장소에서 수련 중이지. 그들은 흑룡대라 이름 지었네. 그러고 보니 묵룡대, 신룡대 다 용(龍)자가 들어가는군. 아, 사설이 너무 길었나? 어쨌든 난 묵룡대가 흑룡대보다 못하단 평가를 받지 않았으면 하네.”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허정의 눈에 호승심이 엿보였다.
아직 본적 없는 주군의 첫 번째 무력대.
명칭조차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경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셈이었다.
그렇게 허정을 자극한 이현성은 반대편에 있는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북로상회를 맡고 있는 만홍규였다.
“만 상회주, 본장이 도와줄 것이 있소?”
“없습니다. 다만 원활한 업무를 위해 상회에 상주하는 무인들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음… 고려해보겠네.”
“감사합니다. 그 외에는 괜찮습니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만홍규다.
굳이 이가장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현성은 북로상회에 신경을 끌 수 있었다.
이현성은 만홍규의 곁에 있는 마 집사를 바라봤다.
“마 집사님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허심탄회하게 하십시오.”
“아직 없습니다. 나중에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주님.”
중책을 맡고 있는 그들이 각자 맡은 임무를 문제없이 수행해주고 있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씩 갖추어가는 이가장의 모습에 이현성은 내심 흐뭇했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만족은 성장을 더디게 만들 뿐이었다.
‘…음? 어르신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슬슬 회의가 마무리될 때쯤 누군가의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회의를 마친 이현성은 어딘가로 향했다.
바로 연공실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검왕 어르신.”
그가 느낀 기운의 주인은 바로 검왕 남궁무백이었다.
같은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사람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남궁무백의 기운은 남궁장천이나 남궁설지와는 달랐다.
삼라만상을 익힌 덕분에 누구보다 기에 민감한 이현성이 그가 자신을 부른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조만간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네.”
“그러셨군요.”
“그전에 약속을 지키려고 하네.”
“약속이라시면… 아!”
이현성은 그가 말한 약속이 뭔지 깨달았다.
남궁장천의 검을 봐주는 대신 남궁무백 그가 직접 이현성의 검을 봐주겠단 약속을.
두어 달이란 시간동안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많았다.
덕분에 장주인 이현성은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잊고 있었는데, 검왕이 먼저 이렇게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준비는 끝났으니 적당히 하게나.”
“고맙네.”
“신산 어르신?”
남궁무백에게 한마디 툭 던진 제갈윤호는 연공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주변 기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황하는 이현성을 보며 남궁무백이 말했다.
“가르침을 주겠다고 화두 한두 마디 던지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지. 직접 몸으로 배우는 것이 자네도 더 낫겠지?”
“물론입니다.”
“그럴 줄 알았네. 해서 저 친구에게 부탁했네. 진법을 설치해달라고 말이야. 힘 조절이야 하겠지만, 이곳이 내 힘을 감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셨군요.”
제갈세가의 자랑 중 하나가 바로 뛰어난 기문진법(奇門陣法)이었다. 지형지물과 천지조화를 통해 상전벽해를 구현하는 공부였다.
기문진법에 따라서 시각이나 청각을 차단하거나 환상을 보게 만들 수도 있었다.
남궁무백의 부탁으로 제갈윤호가 설치한 기문진법은 내부에서 일어난 충격이 외부에 전달되지 못하게 막는 일종의 결계였다.
허나 화경은 초인지경(超人之境), 상식이 통하지 않은 존재였다. 아무리 대단한 기문진법이라 해도 과연 화경고수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검을 쥐게. 자네 실력부터 보세나.”
“…감사합니다.”
남궁무백의 말에 이현성은 자신의 검을 쥐었다.
암천의 투박한 외형 때문에 보검이라 생각하기 힘들다.
허나 껍데기가 아닌 내면의 본질을 보는 남궁무백이었다.
그의 눈에는 암천의 진가가 보였다.
“오호~! 좋은 검이군.”
“어르신의 제왕검(帝王劍) 못지않은 녀석이지요.”
이현성의 암천과 달리 남궁무백의 손에 들린 검은 누가 봐도 보검임을 알 수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주 신물인 창천(蒼天)과 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검이 바로 제왕이었다.
그리고 검왕의 상징이기도 했다.
허나 이현성은 제왕검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암천검이야말로 자신의 반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암천검을 바라보는 이현성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갑니다!”
“오게!”
후배이자 하수인 이현성이 먼저 움직였다. 손이 움직인 순간 이미 검은 남궁무백을 향하고 있었다.
챙!
특별한 절초를 펼친 것이 아님에도 이현성의 검은 빠르고 강했다. 그럼에도 남궁무백에게 위협은커녕 긴장감조차 주지 못했다.
이현성이 신검이라 불린다지만 상대는 무려 검왕.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른 존재였다.
채~챙! 챙!
합의 수가 늘어났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현성의 얼굴은 초조하지 않았다.
애초 그에게도 몸 풀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순간 이현성의 기세가 바뀌었다.
“일점혈(一點血)!”
“이제 좀 낫군.”
암천살무의 일점혈.
살수천자의 검술답게 은밀하면서도 빨랐다.
회귀 전에 익혔던 수많은 무공이 있지만, 이현성은 암천살무를 택했다. 어중간한 검을 펼치는 것은 검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절대쾌검이라고 자부한 일점혈이었으나 검왕은 모두 막아냈다.
남궁세가는 중검(重劍)으로 유명하지만 쾌검 또한 있었다. 게다가 만류귀종이라고 검왕의 수준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무의미한 것이 아닌 듯 검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제야 그 역시 흥이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검왕의 반응에 이현성 역시 자극이 되었는지 검이 더욱 빨라졌다.
채챙!!
이현성의 검은 빨랐지만 상대는 검왕이었다.
검왕은 그의 검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일점혈을 펼쳤다.
“이제 그만… 헉!”
“천중…비화.”
빠름으로 승부를 보던 이현성의 검이 바뀌었다. 흡사 화산파의 검을 보는 듯한 매우 아름다운 검이었다.
허나 그의 천중비화는 화산의 검과는 전혀 다르다.
일천 개의 꽃잎이 흩날리는 듯하지만, 실상은 검강의 향연이었다.
혈천의 초절정고수인 손풍각주와 천사교의 환야 역시 천중비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콰콰쾅!!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제갈윤호가 설치한 기문진법으로 보호받고 있음에도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껄껄껄…! 과연… 허나 아직 부족하다!”
“헉… 헉… 저 역시…….”
과연 검왕 남궁무백이었다. 초절정고수들조차 속절없이 당했던 암천살무의 천중비화를 받아내고도 무사했다.
그에 반해 이현성은 숨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위력만큼이나 내공소모가 극심한 천중비화를 펼쳐서였다.
허나 눈빛은 여전히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역시 아직 끝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현성은 검을 다시 휘둘렀다. 여전히 빠르지만 조금 전과는 속도가 현저하게 차이 났다.
챙! 챙!
이현성의 검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고 있음에도 검왕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이현성의 눈빛이 매우 진중했기 때문이다.
빠름이나 위력은 다소 약해졌지만, 검왕은 오히려 더 신중하게 대응했다.
어느 순간 이현성의 검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유(柔)의 무리를 담은 검술을 펼친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역시 신검합일(身劍合一)이군!”
검과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로, 진심으로 검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이룰 수 있었다.
무아지경의 일종이기에 의식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무위가 높다고 무조건 신검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군! 좋아! 오냐! 나 역시 보여주마! 나의 검을!!”
방어 위주로 검을 펼치던 남궁무백의 기세는 물론, 검의 움직임 역시 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왜 검왕이며, 화경을 초인지경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허나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제왕검형(帝王劍形)!”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