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138화 (138/314)

138화.

홀로 남은 독안귀는 턱을 쓰다듬었다.

“드디어 때가 된 것 같구나.”

독안귀는 아무도 없음에도 홀로 중얼거렸다.

허나 진짜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생겨났다.

독안귀는 앙상한 스스로의 손을 바라봤다.

“허허. 내 손이 많이 녹슬지 않았어야 하는데…….”

* * *

검은 그림자 두 개가 어느 장원의 담을 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놈의 말대로군. 대주는 이각 후에 이가장을 지워라.”

“예. 방주님.”

그들은 흑혈방주와 흑혈방의 정예인 흑혈대(黑血隊)였다.

다른 세력이 눈치채기 전에 이가장을 제거하고 이권을 흡수하기 위해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천사교의 환야를 죽인 고수는 부상이 깊다고 하니, 이가장주란 애송이만 제거하면 손쉽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환야를 죽인 것이 이현성이란 소문을 믿지 않은 탓이었다.

식객이 된 두 노인에 대해서 알았다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텐데, 의도적으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차단했기에 흑혈방주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흑혈방주에게 최대의 불운이었다.

“너무 조용한데?”

독안귀는 정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였다.

게다가 동행한 귀매는 독안귀가 직접 키운 뛰어난 살수였다.

그런 두 사람을 아무런 소란도 없이 제압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흑혈방주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콰쾅!!

“자, 장주님께서! 피살당하셨다!!”

그때 장원 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제야 흑혈방주의 굳은 얼굴이 펴지며 밝아졌다.

“크크크… 그럼 그렇지… 모두 죽여라. 독안귀와 귀매 모두…….”

“존명!”

흑혈방주의 명에 서른 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고작 서른 명이지만 전원이 일류고수인 흑혈방 최고의 무력대인 흑혈대였다.

특히 흑혈대주는 흑혈방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였다.

정주의 패권을 쥐기 위한 흑혈방주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흑혈대가 이가장의 담을 넘자 바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사, 살려줘!!”

흑혈방주에겐 소름끼치는 비명조차 즐겁기만 했다.

그는 독문수법인 흑혈마수(黑血魔手)를 펼쳐서 이가장의 문을 부셨다.

콰쾅!!

상당히 두터운 나무문이라서 맨손으로 부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정주에서 손꼽히는 고수답게 그 어려운 일을 간단히 해냈다.

웃으며 이가장 안으로 들어간 흑혈방주의 얼굴은 이내 일그러지고 말았다.

“뭐…야… 이건…….”

“감히 본장을 노리다니… 내가 너무 점잔을 떤 건가?”

곳곳에 횃불을 붙여놔서 밤이었지만 안을 보는데 어렵지 않았다.

죽은 시체와 제압된 사내들이 흑혈방주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흑혈대였다.

조금 전 비명 소리는 이가장의 무사들이 아닌 흑혈대가 내지른 비명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피살되었다는 이가장주 이현성이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흑혈방주는 순간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한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눈이 커졌다.

흑혈대보다 먼저 이가장의 담을 넘은 독안귀와 귀매로 추정되는 복면인이었다.

부상은커녕 제압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주님, 저놈은 제가 죽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귀 노사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제야 흑혈방주는 지금의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독안귀는 이미 이가장주에게 굴복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함정을 판것은 자신이 아니라 저들임을 알게 되었다.

“독안귀 늙은이, 언제부터 이가 애송이에게 꼬리를 흔들었지? 그보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너희를 상잔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을…….”

“귀면, 그 금수만도 못한 놈이 네놈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부터지.”

그랬다.

독안귀가 오늘 이가장의 담을 넘는다는 정보를 흑혈방주에게 넘겨준 자가 바로 그의 심복으로 알려진 귀면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흑혈방주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흑혈방주의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피가 끓는 그와 달리 노쇠한 독안귀는 현실에 안주할 뿐 야망을 펼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독안귀를 제거하고 야망을 펼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뛰어난 고수였다.

감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절정고수.

그래서 그의 분노는 민초들에게 향했고, 독안귀에 대한 악명은 귀면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흑혈방주가 손을 내밀었다.

독안귀를 제거하게 도와주면 그 자리를 주겠다고.

귀면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그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지. 모두 죽일 수밖에…….”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흑혈방주의 손에 검붉은 기운이 번들거렸다.

정주 사파제일 고수다운 범상치 않은 기운이었다.

그것을 보며 독안귀는 검을 쥐었다.

정주에서 손꼽히는 고수라는 독안귀에게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검이었다.

하지만 귀검(鬼劍)이라는 섬뜩한 검명(劍名)을 가진 명검이자 귀물(鬼物)이었다.

순간 두 고수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쾅!

“큭!”

“흐흐흐… 주제 모르는 늙은이가…….”

귀검을 쥔 독안귀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허나 흑혈방주의 실력은 그 이상이었다.

특히 위력적인 면에서 독안귀의 검격을 상회했다.

애초 독안귀는 검을 놓은지 제법 되었다.

그럼에도 이 정도 검술을 펼칠 수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죽어라!”

“어림없다!”

흑혈마수의 강력한 위력을 앞세운 흑혈방주의 공격에 독안귀는 연신 밀리고 말았다.

흑혈방주의 무위가 알려진 것보다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독안귀의 실력이 소문보다는 다소 손색이 있는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밀리는 것은 독안귀 쪽일 수밖에 없었다.

“허명은 아니군. 허나 그뿐이지.”

소문만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안귀가 녹록한 자는 아니었다.

중간중간 흑혈방주조차 놀랄 정도의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푸욱!!

“쿨럭… 우웩!!”

“흐흐흐… 잡았다!”

이변은 없었다.

흑혈방주의 손이 독안귀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대라신선이 와도 목숨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그 순간 독안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죽…어라!”

“미, 미친!”

콰직! 퍽!

독안귀가 돌연 쥐고 있던 검으로 흑혈방주를 찔렀다.

다 끝났다고 방심했던 흑혈방주는 기겁했다.

본능적으로 평소 주로 사용하는 오른손을 사용해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독안귀의 가슴에 꽂은 손이 잘 빠지지 않았다.

뒤늦게 왼손으로 막으려 했으나 이미 옆구리를 찔린 후였다.

흑혈방주는 그대로 독안귀의 머리를 부쉈다.

뇌수가 터지면서 확실하게 독안귀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그제야 옆구리를 밀고 들어오던 검이 멈추었다.

내장이 다칠 정도로 깊숙이 찔리지는 않았으나 고통은 보통이 아니었다.

“으윽… 미친 늙은이가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퍽! 퍽! 퍽!

분노한 흑혈방주는 죽은 독안귀의 육신을 발로 찼다.

그때 한 줄기의 빛이 번뜩였다.

조금 전까지 독안귀에 곁에 있었던 복면인, 귀매의 검격이었다.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독안귀 늙은이의 제자였군. 크크크… 사제 모두가 내 손에 죽다니.”

흑혈방주는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다.

귀매의 검술은 독안귀의 검술과 흡사했다.

아니, 같았다.

애초 그에게 검술을 배웠으니 당연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솜씨가 죽은 독안귀 못지않았다.

허나 부상을 입었다 해도 흑혈방주는 무위가 별로 줄지 않았다.

덕분에 십여 합 만에 결판이 나고 말았다.

쾅!

“꺄!”

“오호~! 이제 보니 계집이었군.”

귀매의 입에서 나온 비명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귀매는 거추장스러운 복면을 벗었다.

제법 미색을 갖춘 중년 여인이었다.

“그런데 눈에 익군. 어디서 봤지?”

“아버지의 원수…….”

“뭐야? 독안귀의 딸년이었어? 아니, 딸년이 있었는지는 몰랐군.”

놀랍게도 귀매, 그녀는 독안귀의 여식이었다.

원수의 입에서 부친이 언급되자 귀매는 분노했다.

“저분은 내 양부이시다! 그리고 내 친부께서도 네놈의 손에 죽었지!”

“오호. 그렇단 말이지? 내 손에 죽은 인간이 워낙 많아서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섬전객(閃電客) 벽홍, 그분이 내 친부이시다!”

“아~ 그놈. 오호라~ 네년이 그때 그년이었구나.”

섬전객 벽홍.

그럴듯한 별호와 달리 이류무사에 불과했다

그런 벽홍에게 자랑거리가 있었다.

바로 하나밖에 없는 어여쁜 여식이었다.

아비의 눈에만 어여쁜 것이 아닌지 여러 가문에서 매파를 보내올 정도였다.

허나 그게 화근이었다.

그녀를 원하는 자가 있었다.

바로 젊은 시절의 흑혈방주였다.

그는 귀매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인 벽홍을 죽이고, 그녀를 범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흑혈방주는 섬전객이 몸담고 있던 조양문을 칠 명분이 필요해서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거였다.

그런데 조양문은 일개 조장 한 명과 그의 여식을 위해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결국 그들 부녀는 개죽음을 당한 셈이었다.

아니, 벽홍의 여식은 마음과 달리 육신은 죽지 않았다.

허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독안귀가 그녀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양녀로 삼았다.

심복인 귀면조차 모르는 비밀이었다.

“양부께서 내게 내공을 넘겨주지 않으셨다면… 네놈 따위에게 당하지 않으셨을 텐데…….”

“흐흐흐… 어쩐지 늙은이 솜씨가 시원찮다 싶더니 그래서였군. 설사 내공을 네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해도 내 손에 죽는 것은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흑혈방주는 귀매과 죽은 독안귀를 비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분한지 귀매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였다.

“더 이상은 귀가 더러워져서 안 되겠군. 암월 호법. 저놈을 꿇리시오.”

“감히 누굴… 컥!”

이현성의 말에 흑혈방주는 버럭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현성의 지시를 받은 암월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암월의 검집에 맞은 흑혈방주는 나가떨어졌다.

죽이는 것이 아닌 꿇리라는 지시 때문에 검집 채로 가격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라지만 공격을 허용했다는 사실에 흑혈방주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터트릴 기회가 없었다.

암월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했다.

“으으…윽! 죽여버리… 큭! 겠다… 커억!”

천하의 흑혈방주가 개 맞듯이 맞고 있었다.

아무리 흑혈방주가 정주에서 손꼽히는 강자라고 해도, 천웅방의 전(前) 팔패이자 암천의 호법인 24대 암월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가장의 무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암월 호법이 천웅방 암월영패였단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귀매의 놀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내가 누구… 으아악!!”

“네놈이 누구인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얼마나 오지게 맞았는지 오히려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저항할 능력을 상실시켰다고 판단했는지 암월은 구타를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자의 목숨은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귀 노사와 약속한 대로…….”

“감…사합니다. 장주님.”

이현성에게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한 귀매는 검을 쥐고 흑혈방주에게 다가갔다.

흑혈방주의 눈은 절망감에 물들어 있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너무 심하게 맞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