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상회주의 자리는 그가 준비한 가장 강력한 패였다.
그것마저 전혀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제법 규모가 큰 상회의 경우는 다르지만 북로상회와 같은 신생 상회는 상회주의 권한이 그리 크지 않았다.
여러 상인 중 한 명일 뿐, 상회에 대한 장악력이 형성되지 않아서였다.
물론 만홍규가 아닌 이가장의 대리인이 상회주를 맡게 된다면 다르겠지만, 이가장의 입장에서 그리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상회 전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뿐입니까? 절 설득할 상회주님의 제안이…….”
“아, 아닙니다. 저희 북로상회에서는 겨, 경비대의 양성 및 운영을 위해서 상회 운영비의… 2할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이, 이가장에서 저희 북로상회와 계약을 맺으신다면 경비대의 제반사항을 위임하겠습니다.”
“…상회 운영비는 어느 정도 규모입니까?”
“본 상회에 가입된 점포들의 매출 1할을… 상회 운영비로 낼 예정입니다.”
회원의 수가 열이 넘는 만큼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다고 할 수 있는 금액은 더더욱 아니었다.
보통 흑도조직이 자릿세 및 보호비 명목으로 뜯어가는 금액은 그것의 몇 배였다.
따라서 이현성을 설득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만홍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제안을 했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이현성은 오히려 흥미롭게 만홍규의 말을 기다렸다.
“무, 물론 그건 기본 운영비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가입회원들의 점포에 공급되는 물자유통을 북로상회에서 맡을 예정입니다. 이는 상회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한 방안으로, 이 과정에서 창출되는 이익 역시 상회 운영비로 책정될 예정입니다.”
상인들의 안전을 지키는 집단인 동시에, 물자를 유통하는 상단의 역할도 수행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니, 조금만 규모가 커진다면 상단으로 바뀐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북로상회의 상회주 자리를 이가장에게 주겠단 뜻이니, 조금 전과 달리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 있었다.
“…나쁘지 않네요. 아니, 매력적인 제안이군요.”
“그렇다면!”
“허나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만홍규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를 꺼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북로상회의 상회주를 본장에서 내세운 대리인에게 맡기겠다고 하셨지요?”
“그, 그렇습니다. 장주님.”
눈에 띄게 긴장하는 만홍규를 보며 이현성은 피식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대리인을 만 상회주가 맡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예?”
만홍규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되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를 보며 이현성은 다시 이야기를 했다.
“귀하가 그대로 상회주를 맡아주십시오. 저의 가신(家臣)으로서 말입니다.”
“저, 절… 거둬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이현성의 말에 만홍규는 눈이 커졌다.
생각지 못한 큰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신이란 가솔들을 관리하며, 가주를 보좌하는 중책이었다. 현재 이가장에서는 묵룡대주인 허정과 마 집사가 그에 해당된다.
만홍규가 북로상회주라는 감투를 쓰고 있지만, 결국 소상(小商)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이가장은 정주의 중심에 설지도 모를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북로상회는 이가장의 그늘 안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런 이가장이란 호랑이 등에 올라탈 수 있다면, 대상(大商)이 되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니었다.
허나 그건 상인 만홍규가 아닌 이가장의 가신 만홍규로서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시간을 줘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장주님의 가신이 되겠습니다! 되고 싶습니다!”
결국 만홍규는 이현성의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그는 몰랐다. 지금의 결정이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그가 한 선택 중 가장 잘한 것임을.
북로상회가 이가장이란 호랑이의 등에 업히는 순간 정주는 발칵 뒤집어졌다.
북로장악
“아이고~ 만 상회주님 오셨습니까!”
“점주님, 잘 지내셨지요?”
만홍규를 대하는 상인들.
특히, 북로상회 소속 점주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북로상회가 이가장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 모두 그의 공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보다 그가 이가장의 가신이 되었단 소식이 퍼진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실제로 그의 곁에는 이가장의 무사로 보이는 사내 둘이 따르고 있었다.
북로상회주라고 해봤자 점주들의 대표일 뿐이지만, 이가장을 대표하는 가신이라면 입장이 다르다.
덕분에 그를 대하는 점주들의 태도가 무척이나 살가웠다.
“이 깃발을 간판 옆에 달아주십시오. 본 상회 소속이란 의미입니다.”
“네. 당장 달겠습니다!”
점주들은 만홍규가 무슨 의미로 이 깃발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흑도 무리가 패악을 저지를지도 모르니 확실하게 북로상회 소속임을 알리라는 뜻이었다.
그와 동시에 북로상회로서의 소속감을 고양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깃발을 단 점포들에 흑도 무리가 얼씬도 못 한다면 다른 점주들 역시 북로상회에 가입하고 싶어지겠지.’
북로상회의 깃발이 강력한 힘과 신뢰의 상징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점주들 역시 북로상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북로상회의 일원이 된다면 상회의 규모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발생할 힘과 이익 역시 커지게 된다.
실제로 현재 북로상회에 가입한 십여 점주 외에 타 점포의 점주들은 북로상회의 깃발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북로상회에 가입하면 안 되나?”
“주, 주인어른! 그러다가 큰일 납니다요!”
“후… 하긴. 독안귀 그 양반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타 점포의 점주.
특히 독안귀의 관리를 받는 중앙북로 나머지 점주들은 더욱 아쉬워했다.
북로상회 경비대 무사들이 정기적으로 순찰을 하는 모습은 물론이고, 소란을 피운 자를 단번에 쫓아내는 모습을 그들은 직접 봐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북로상회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독안귀가 얼마나 잔혹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점주 및 총관들의 동요는 중앙북로에 한해서만이 아니었다.
중앙북로 외에 동서남로의 점주들 역시 큰 관심을 보였다.
모두 눈치만 볼 뿐, 먼저 움직이는 모험을 하는 자는 없었다.
허나 이런 분위기조차 분개하는 자들이 있었다.
* * *
“젠장! 이래서 내가 손을 잡고 이가장 놈들을 쳐내자고 했던 것인데!”
정주 사대문 중 서문(西門) 구역에서 큰 성세를 이루고 있는 흑혈방.
흑혈방주는 지금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흑혈방은 정주안가가 몰락하면서 중앙로에 진출했다.
정주안가가 관리하던 중앙서로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말이다.
그로 인해 재정 상태는 좋아졌으나 위세는 더 줄어들었다.
예상치 못한 이가장의 득세가 문제였다.
특히 이가장이 북로상회란 별 볼 일 없는 집단에 가입하면서 상황이 우습게 되었다.
“자신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개지랄을 떨더니, 결국은 이렇게 뒤통수를 쳐!”
흑혈방주는 어이가 없었다.
정체 모를 이가장의 고수들이 두려웠던 점도 있었다.
하지만 중앙로의 이권에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기에 방심한 게 더 컸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흑사당을 앞세워 보호비를 거두는 것이나 북로상회라는 우습지 않은 것들을 내세워서 돈을 거두는 것이나 다를게 없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북로상회 소속 가게들을 확실하게 보호하려는 이가장과 돈을 억지로 빼앗는 그들은 같을 수가 없었다.
“다른 놈들의 반응은 어때!”
“시, 심기가 불편한 것 같긴 하나… 다들 두고 보자는 듯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방주님.”
“병신 같은 것들. 이가 애송이가 중앙로를 전부 삼킨 후에나 후회하겠지!”
“저희 관할 점주들 역시 동요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흑혈방주의 눈빛에 보고하던 수하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더욱 짜증이 난 흑혈방주는 수하를 단숨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간신히 화를 참았다.
“흑사당주에게 연락해서 단속 잘하라고 해. 괜한 헛짓거리 못하게…….”
“아, 알겠습니다!”
분노를 간신히 참는 듯한 흑혈방주의 목소리에 수하는 움찔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하나같이!”
흑혈방주는 수하의 보고를 받을 때와 달리 의외로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분노가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차갑게 식혀져 있었다.
그 역시 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독안귀… 그 늙은이가 움직여줘야 틈이 생기는데 말이야.”
자신보다 더 급한 자가 있었다.
이미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독안귀였다.
중앙로의 다른 길과 달리 북로는 이미 크게 동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독안귀는 그냥 쥐가 아니라 제법 크고 사나운 쥐지.”
흑혈방, 귀문, 하다못해 야도문도 독안귀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과 달리 거대한 세력화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그러했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독안귀에게도 숨겨진 한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귀매(鬼魅).
독안귀의 비수였다.
독안귀를 노린 자는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곤 했다.
날카로운 창은 경계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비수는 그저 두려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독안귀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무위와 귀매라는 비수 덕분이었다.
“암살을 실패한다고 해도 틈만 생긴다면 파고들 수 있어.”
남의 손만 더럽히고 제 손은 깨끗하게 하려던 흑혈방주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한들, 아직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우선 독안귀를 내세운 후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이가장과 독안귀… 모두를 처리할 수 있겠어.”
* * *
“노야…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 합니다.”
사내는 독안귀의 심복이자 그를 대신해서 중앙북로를 관리하는 귀면(鬼面)이었다.
독안귀의 명령으로 낭아파에게 이가장의 상황을 흘렸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하긴. 나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긴 하지…….”
북로상회를 앞세운 이가장의 움직임은 그로서도 예상치 못했기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오늘 밤, 이가장에 다녀올 것이니 너는 내일 북로상회를 굴복시켜라.”
“노, 노야께서 직접 손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귀매를 보내도 되지 않습니까?”
독안귀가 직접 나선다는 말에 귀면은 깜짝 놀랐다.
그가 뒤로 물러난 지도 십 년이 넘었다.
그렇기에 귀면에게 북로의 관리를 맡겼고, 경고가 필요할 땐 귀매를 움직였다.
그랬던 독안귀가 직접 움직인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귀매를 움직일 것이다. 허나 그 녀석에게만 온전히 맡기기에는 좀 찝찝해서 말이야.”
“하긴 이가장이니… 알겠습니다. 저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북로상회를 굴복시키겠습니다.”
귀면은 독안귀에게 인사를 한 후 물러났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