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현성입니다. 절 찾아오셨다고요?”
“처, 처음 뵙겠습니다. 만홍규라고 합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다.
즉, 무림인은 아니란 뜻이었다. 무림인도 아닌 자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점이 오히려 흥미를 끌었다.
“왕유 총관의 소개라면 상인이십니까?”
“예. 북로상회라는 작은 상회를 맡고 있습니다. 장주님.”
이가객잔을 관리하는 총관의 이름이 바로 왕유였다.
왕유의 소개로 온 만홍규는 예상대로 상인이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상회였지만, 한 개의 단체를 맡고 있는 상인이라면 가볍게 봐선 안 되었다.
문제는 왜 자신을 찾아왔냐는 것이다.
“상회주였군요. 만 상회주께서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도와주십시오. 장주님.”
만홍규는 느닷없이 이현성의 앞에 갑자기 부복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허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그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정확히 뭘 도와줬으면 하는지를 말해보세요. 전 그런 행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현성의 말에 만홍규는 머쓱해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저희 북로상회는 중앙북로의 점포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입니다.”
“결국 상회를 보호해달란 말이군요?”
“그, 그렇습니다.”
상회(商會)란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상인들이 모여서 만든 상인조합이었다.
소상(小商) 한명 한명의 힘은 미력하지만, 그 힘을 합치면 제법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북로상회는 정주 중앙북로 중 이가장의 사업장 인근의 점주들이 모여서 세운 단체였다.
과거에는 태가장의 위세에 간접적인 보호를 받았다.
허나 이젠 공식적으로 이가장이 인근 점포들은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아직은 흑도조직들이 이가장의 눈치를 보며 접근하지 않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만홍규 상회주는 주변 점주들을 설득해서 북로상회라는 상회를 조직했다.
상회로서 이가장 혹은 그에 준한 집단과 교섭을 한다면 더 나을 거란 계산이 깔려 있었다.
만홍규의 말에 이현성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상회를 보호해서 본장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뭡니까?”
“그, 그야 상회의 보호비를…….”
“본장이 보호비를 거두지 못해서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현성의 차가운 말에 만홍규는 당황스러웠다. 이가장의 체면 때문에 보호비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약 상회와 정식 계약을 맺고 보호비를 받는다면 모양새도 나쁘지 않기에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지금이야 상회 규모가 작지만 이가장이 뒤를 봐준다면 상회의 규모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가장이 챙길 수 있는 이윤도 상당해질 터.
자금력을 확보해야 하는 이가장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다만 그건 이현성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다.
허나 이현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달랐다.
“…3일 드리겠습니다. 3일 후, 다시 절 설득해보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3, 3일 후에 꼭 장주님께서 만족스러울 만한 방안을 강구해 다시 오겠습니다!”
만홍규가 돌아간 후 누군가 집무실을 들어왔다.
그녀는 지봉 제갈현지였다.
이현성은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왜 그에게 3일을 주라고 하셨습니까, 제갈 소저.”
“그게 장주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이현성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만홍규에게 3일의 시간을 준 것은 사실 제갈현지의 전음 때문이다.
제갈현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고, 만홍규를 3일 후에 다시 만난다고 해서 딱히 손해 볼 것도 없기에 청을 들어준 것이다.
“도움이 된다… 유난 떨려는 게 아니라 굳이 상인들에게 돈을 뺏을 생각은 없습니다.”
“주제넘을 수 있으나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정론으로 상인들은 아문(衙門)의 보호를 받아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장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말이에요.”
황제에게 관직을 부여받은 관리들은 흑도들로부터 민초들을 보호해주는 것이 맞다.
허나 현실은 다르다. 흑도는 민초들의 고혈을 짜고, 흑도의 뒷배가 되는 무림세력은 관리들에게 뒷돈을 준다.
상인들이 더 많은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관리들은 굳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뒷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피를 볼 수 있었다.
관리들의 입장에선 가만히 있는 것이 이득이었다.
“상인들은 산적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표국을 고용하지요. 표국은 산적을 만나면 작은 성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마찰을 줄인답니다. 싸운다면 표국도 산적도 피해를 입을 테니 암묵적인 약속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상인들은 왜 산적과 직접 교섭을 하지 않을까요? 표국을 고용하는 비용보다 저렴할 텐데요?”
“…….”
“…언제 돌변할지 모를 산적보다 유사시 책임을 져줄 표국을 고용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죠.”
“…흑도가 돈을 갈취하는 것과 그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대가를 받는 것은 다르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차피 품에서 나갈 돈이라면 안전을 보장받는 쪽이 좋았다. 그렇기에 만홍규는 이현성을 찾아온 것이다.
정주의 다른 실력자들과 달리 지불할 대가만큼 안전을 보호해줄 거라 믿는 것이다.
이현성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만홍규란 분, 상인으로서 수완이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요. 상회를 결성한 결단력이나 점주들을 설득한 화술은 물론, 장주님을 직접 찾아온 추진력까지… 그런 사람이 지금 장주님께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까?”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제갈현지는 단순히 아는 것이 많아서 지봉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통찰력이었다.
이가장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이가장의 부족한 점, 정주의 상황에 대해 빠르게 간파했다.
그럼에도 선뜻 나설 수 없었다.
이곳은 제갈세가가 아니라 이가장이기 때문이다.
섣불리 나섰다가 이현성의 자존심만 건드릴 수 있었기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기회라고 판단했다.
“장주님께서 그를 그리고 상회를 품는다면 이가장뿐만 아니라 상인들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 역시 장사를 할 때, 자신들을 지켜줄 든든한 그늘일 테니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상회(商會)를 상단(商團)으로 키우셔야 해요. 미래를 위해서…….”
무림세가들이 많이 써먹는 방식이었다.
점포 몇 개로 시작해서 상회로 규모를 넓히고, 종래에는 상단으로 키워서 탄탄한 자금력을 보유한다.
뿌리 깊지 않은 나무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것처럼 결국 무림세가도 자금력이 받쳐줘야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처럼 사업장 몇 개만으로는 얼마 안 가 이가장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결국 상회를 품어야 하고, 상단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이가장의 사업장을 상회에 가입시킨다면 잡음 역시 없앨 수 있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어차피 결정은 장주님의 몫이니까요.”
“…생각해보지요.”
용무를 마친 제갈현지는 돌아갔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상회라…….”
* * *
“그, 그래서… 장주님께서 거, 거절하셨단 말이오!”
“완전히 거절은 아니고… 3일 후에 다시 설득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가장에서 축객령을 당한 만홍규는 상회의 회원들인 점주들을 불러 모았다.
만홍규가 상회주로서 교섭을 위해 이가장주를 만나러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대답에 점주들은 당황했다.
“그게 그거지!”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점주들은 당장이라도 흑도의 왈패들이 들이닥칠 것 같아서 두려워했다.
만홍규는 점주들 중에서는 나름 젊은 측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두려워하는 점주들을 다독거렸다.
만홍규가 상회주를 맡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가장의 입장에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고 했잖아, 만씨… 아, 아니 만 상회주.”
흑사당의 무리에게 호되게 당했던 점주들은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만홍규가 그들을 모아서 타개책으로 내세운 것이 상회였다. 상회로서 이가장과의 교섭을 하겠단 거였다.
그래서 빠르게 북로상회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 자신들을 설득했을 때와 달리 이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를 원망하고 불신하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만홍규는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고 점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상회주의 자리를 이가장에 맡길 생각입니다.”
“그, 그래도 되겠는가…….”
“그러다가 괜히 가게들만 빼앗기는 것은 아닐지…….”
놀랍게도 만홍규는 자신의 자리, 즉 상회주의 자리까지 내놓을 각오를 했다.
그럼에도 점주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괜히 스스로의 손으로 가게들을 이가장에 바치는 꼴이 될 수 있기에 두려웠다.
“어차피 이가장 역시 점포들을 운영하고 있으니 저희 상회의 회원으로 받고, 상회주 자리를 넘겨주면 됩니다. 우리 상회를 위해서 저 역시 상회주 자리를 내놓아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희 입장에선 이가장보다 안전한 그늘이 없습니다. 괜히 독안귀나 다른 흑도 무리가 우리 북로를 차지하면 어찌될 것 같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
자신들의 가게가 있는 중앙북로의 절반을 관리하는 독안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는 점주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눈이 시뻘게진 다른 흑도 무리 역시 다르지 않다.
이 상황에서 이가장 외의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점주들 역시 동의했다.
“그 외에도 방책이 필요합니다. 장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책이… 해서 저는…….”
* * *
“절 설득할 방도는 생각해보셨습니까?”
3일 후, 만홍규는 다시 이가장의 문을 두들겼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이현성과 독대할 수 있었다.
만홍규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회주의 자리를 이가장에 양도하겠습니다.”
“…상회…주 자리를 말입니까?”
선뜻 상회주 자리를 내놓을 줄은 몰랐기에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이현성은 만홍규가 돌아간 후 은밀하게 북로상회에 대해서 알아봤다. 북로상회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 및 현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 속에 담긴 그의 야망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상인으로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그런 그가 힘들게 이룩한 상회주 자리를 내놓는 것은 큰 결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현성은 만홍규에게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회주의 자리가 본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됩니까?”
“예?”
“상회란 결국 상인들의 이권을 위한 조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회주는 그들을 중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지만 큰 권한을 가지는 것은 아닐 텐데요?”
“…….”
예상치 못한 이현성의 말에 만홍규는 당황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