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물론 비무가 위험했습니다. 허나 덕분에 벽을 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에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
남궁장천은 담담하게 말하는 유백을 보며 자신보다 그릇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저… 사천당가의 호위무사였다고 하셨습니다만… 당가 출신이십니까?”
“아…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신룡유가라고 지금은 사라진 가문이 있습니다. 저는 그곳 출신입니다.”
남궁장천은 조부가 유백을 명가의 후손이라 칭했을 때 의아하게 생각했다. 유백이 분명 사천당가의 호위무사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백의 입에서 신룡유가란 말이 나오자 남궁장천의 눈이 커졌다.
유백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몰락한 가문이기에 젊은 남궁장천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신룡유가를 너무 가볍게 본 생각이었다.
신룡유가는 사천무림에 대해 이야기하면 항상 언급되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남궁세가의 종손으로서 신룡유가를 모를 수가 없었다.
“명…가의 후예셨군요.”
“이미 사라진 가문일 뿐입니다.”
놀라워하는 남궁장천을 보며 유백은 뿌듯한 동시에 씁쓸했다.
지금의 유백에게 신룡유가는 영광스러운 과거였지만 동시에 아픈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며 남궁장천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중에 저와 다시 비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협과의 비무라면 오히려 영광이지요.”
“…절 대협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냥… 음… 남궁 형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는 유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남궁장천의 말에 유백의 눈이 커졌다.
고작 호칭을 바꾼 것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상당히 컸다.
친구가 되자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아니라면 서로 형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저는 일개 검객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유 형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명가의 후손이 아니라 해도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검룡과 호각지세를 이룬 검객이었다.
어찌 일개 검객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허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장주의 친구입니다.”
“…….”
그 점은 생각지 않았던 남궁장천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허나 그는 일구이언하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대 남궁세가의 사내라면 스스로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그와의 감정은 차차 괜찮아질 겁니다. 창피하지만… 제 자격지심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남궁 형.”
그들이 친우지간이 된 일은 두 사람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 * *
“내가 누군지 알겠지?”
“무, 물론입니다. 검왕 어르신.”
유백은 검왕 남궁무백을 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격하고 있었다. 검의 절대자, 검왕을 직접 만났으니 검객으로서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유백의 심정을 알지만 검왕은 부러 모른 척했다.
“내 손자 녀석이 자네에게 신세를 졌더군.”
“아, 아닙니다.”
“되었네. …그보다 이미 장주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검법을 봐주겠네.”
“가, 감사합니다!!”
남궁무백의 말에 유백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었다.
무려 검왕의 가르침이었다. 생에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를 기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신룡검법을 복원한다는 뜻을 이룰 토대가 될 것이 분명할 테니까.
“자네의 검법을 펼쳐보게.”
“예!”
과연 유백은 뛰어난 검객이었다.
조금 전까지 물렁해 보이던 유백이 검을 쥐자 눈빛은 물론이고, 기질까지 바뀌었다.
그 모습에 남궁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객이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 평소에는 유하더라도 검을 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해야 한다.
그게 바로 검객이었다.
유백의 검이 움직였다.
“신령한 용이 모습을 드러내니…….”
어느 검파에서든 볼 수 있는 기본적인 검초였다.
허나 명문의 검답게 기본이면서도 그에 담긴 강인한 정신이 엿보였다.
그게 바로 신룡검법 제1초 신룡현현(神龍顯現)이었다.
허나 유백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마귀들이 두려워한다, 신룡복마(神龍伏魔)!”
유백의 검이 허공을 베었다.
강의 무리가 담겨 있었다. 담백한 움직임이지만 그 역시 신룡유가의 강인한 정신이 담겨 있었다.
유백은 깨우친 신룡검법을 제1초식부터 4초식까지 이어서 펼쳤다.
그리고 마지막 제5초식 신룡유희(神龍遊戱)로 마무리를 지었다.
“후…….”
“좋군. 과연 신룡검성(神龍劍聖)의 신룡검법이로군.”
신룡검성은 신룡유가의 시조이자 신룡검법을 창안한 분이었다. 검왕의 말에 유백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검왕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허나 자네의 검은 그분의 신룡검법이라고 말하기에는 손색이 있네.”
“…부끄럽습니다.”
가문이 몰락하면서 간신히 복원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미흡한 점이 많았다.
특히 화경고수인 검왕의 눈에는 더더욱 허점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인정할 줄 아는 유백을 보며 검왕은 자신의 검을 쥐었다.
“잘 보게나. 내 비록 그분이 검을 잘 모르나… 나라면 이렇게 했을 거라네.”
순간 남궁무백의 검이 움직였다.
그는 분명 신룡검법을 모른다. 그럼에도 오히려 유백보다 더 완벽하게 신룡검법을 펼쳤다.
물론 진정한 신룡검법은 아니었다. 껍데기(劍形)는 알아도 알맹이(眞意)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과연 검왕이라 불릴 만한 모습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유백의 신룡검법을 본 것만으로도 이런 검을 선보이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건 나의 검일세. 그리고 자넨 신룡검성 그분이 아니지. 그러니 자넨, 자네의 검을 펼치게. 자네만의 검을 말일세.”
“아…….”
검왕의 말에서 유백은 깨달은 바가 컸다.
시조의 검을 복원할 생각으로 막무가내로 흉내만 내고 있던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검은 펼치는 사람에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는데도.
“덤벼보게.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겠네.”
“가,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지적해주려고 했던 남궁무백은 유백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재질이나 무공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그의 모습에 남궁무백의 마음이 동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도 유백은 종종 남궁무백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남궁장천은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축하해주었다.
남궁장천은 유백과 검을 나눈 이후 무공은 큰 진보를 이루지 못했으나 그릇만큼은 더욱 커질 수 있었다.
그렇게 이가장의 식객들이 서로 어울리고 있을 때, 이현성은 장주로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 * *
“…현재 열두 명이 합류했고, 열다섯 명이 본장의 무사가 되고 싶다고 회답했습니다.”
허정의 말에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로 잡은 오십 명은 곧 채울 수 있겠군.”
“그렇게 되면…….”
현재 묵룡대는 오십 명이었다. 장원의 경비만이라면 몰라도 묵룡수의 수련까지 해야 한다.
그들만으로는 감당하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가장의 사업장까지 챙겨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리였다. 그렇기에 그들을 대신할 새로운 경비대원을 뽑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시를 받은 허정 및 임천기, 장무열이 나름 믿을 수 있는 전우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까다로운 시험을 통해서 인재를 뽑을 시간이 없기에 인맥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고용된 오십 명이 묵룡대 대신 경비대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될 예정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은 묵룡대로 차출할 예정이었다.
다만 묵룡대원에게는 묵룡수란 외문무공을 전수할 것이라서 무조건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경비무사로 곁에서 지켜보며 됨됨이를 파악할 생각이었다.
묵룡대는 이가장의 얼굴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재정적 압박을 받을 수 있겠지?”
“맞습니다. 주군.”
이가장은 정주의 여타 세력들과 달리 보호비 명목으로 점포들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갈취하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이가장의 사업장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수입만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허나 인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소비되는 재정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인원을 무작정 확충할 수는 없었다.
“현 상황에서 본장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가?”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은 점주들에게 보호비를 받는 겁니다.”
허정의 대답에 이현성은 물론, 함께 있는 노인 역시 안색이 굳어졌다.
허나 이현성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편한 방법이지. 허나 마음에 들진 않는군.”
“주군께서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결국 사업장을 늘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주 상계에서 흐르는 돈 줄기는 어마어마했다. 그렇기에 상계에 기생해서 얻을 수 있는 이권 역시 막대했다.
무림세력들이 흑도조직을 앞세워서 자금을 끌어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현재 이가장의 위세라면 기존세력들과 큰 마찰 없이 자금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태가장의 위세에 간접적인 보호를 받았던 중앙 북로의 절반만 이가장의 권역으로 삼아도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나 그건 이현성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객잔과 주루 등을 다수 매입하거나 무관(武館) 혹은 표국을 운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초기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건 구할 방법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북경 최고급 기루인 쾌활림을 귀림으로부터 양도받은 그였다. 모유환에게 연락해서 자금을 융통하면 되기 때문에 초기 자본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현성은 허정 외에 그의 집무실에 와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무관이나 표국을 운영하기엔 본장의 사람이 너무 적어서 당장은 어렵겠지. …마 집사님께서 중앙북로의 점포 중 매입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물론 강제로 뺏을 생각은 없으니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적당한 가격에 매입할 생각이니까요. 필요하다면 현재 고용된 점원들을 그대로 고용할 생각도 있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장주님.”
부상으로 인해 정양 중인 위지천이나 장원 운영에 관심 없는 암월은 배제하면, 묵룡대주인 허정과 마 집사가 이가장의 수뇌이자 가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현성은 인재가 부족한 것이 항상 아쉽기만 했다.
허나 등하불명이라고 인재를 코앞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장주님. 이가객잔 왕 총관의 소개로 만홍규란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만홍규? 이곳으로 모시게. …두 분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진행하세요.”
“예. 주군.”
“알겠습니다. 장주님.”
허정과 마 집사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중년 사내가 집무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