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저흴 상대한 자는 이가장의 호법이었습니다. 저희로선 그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이가장? 호법?”
당은은 유백을 쫓아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정주의 이가장이며, 장주가 바로 사천당가에 치욕을 준 이현성이란 사실을 밝혔다.
그 이후 담을 넘는 순간 정체불명의 고수가 나타났고, 그가 이가장의 호법이었다는 등 숨김없이 설명했다.
“너희를 제압한 자가 일개 장원의 호법이라고? 허…! 이가장은 도대체 어떤 곳이지?”
“그리고… 남궁세가의 검왕님과 제갈세가의 신산님께서 계셨습니다.”
“뭐라고? 그 늙은이들이?”
자신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 두 사람의 부탁 때문이란 사실을 들은 당철영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동시에 그들이 이가장에 있었다는 점이 걸렸다.
자신과 비교해도 절대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목숨으로 임무를 완수했어야 했는데…….”
“아니다. 고작 그런 일로 너희를 잃을 순 없지. 허나… 그 늙은이들에게 빚을 지다니…….”
당외삼비가 아니라 독종 당철영이 그들에게 빚을 진 셈이었다.
사천당가의 주인이자 사천무림의 전설인 그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니, 당철영이 심기 불편한 것도 당연했다.
‘그냥 애송이가 아니란 말이지?’
당철영은 이현성에 대해서 불쾌감과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사천으로 돌아가려는 발길을 정주로 돌렸다면 일이 크게 번지게 되었을 것이다.
독종 당철영. 비록 화경에 오르진 못했으나 독의 특성상 화경고수 못지않게 까다로운 강자였다.
대량살상에 한해서는 그의 무서움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당철영이 들이닥쳤다면 아무리 검왕이 중재를 나선다 해도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현성으로선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빚은 언젠가 꼭 갚지…….’
* * *
“헉… 헉… 헉…….”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 검을 쥔 채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사내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이현성이었다.
“소저… 이쯤하시죠.”
“후… 아니요! 아직 할 수 있어요!”
만류하는 그의 말에도 여인은 막무가내였다. 덕분에 이현성은 난색을 표할 뿐이었다.
그녀의 검이 위협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하는 것은 여긴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검왕 남궁무백의 손녀인 검화(劍花) 남궁설지이기 때문이다.
제갈현지가 이가장에 오고 며칠 후 남궁무백의 연락을 받은 그녀 역시 급하게 도착했다.
이현성을 발견한 그녀는 다짜고짜 비무를 청했다.
그녀가 소문난 수련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이현성으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허나 몇 번이나 찾아와서 비무를 청했다.
급기야 기습까지 하니 그녀의 청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이현성의 입장에선 그녀를 부상 입힐 수도 없고, 제압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어울려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구원자가 나타났다.
“설지야, 그만해. 장주님께서 곤란해하시잖아.”
“언니, 난 아직…….”
“설. 지. 야.”
“…오늘‘은’ 그만하죠. 장주님.”
남궁설지를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현지였다.
같은 오대세가의 금지옥엽으로서 예전부터 교류가 있긴 했으나 친분이 두터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가장에 젊은 여인이라곤 그녀들 둘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게다가 공통적으로 노리는 바가 같으니 경쟁의식과 동시에 동지애가 생겼다.
또 다른 경쟁자가 생기면 곤란하니 자신들의 선에서 해결(?)하자는 식으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이현성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수고하셨어요. 장주님.”
“감사합니다. 소저.”
이현성은 제갈현지가 건넨 물잔을 받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이현성에게 공자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의 입장을 생각해서 호칭을 장주로 바꾸었다.
물론 남궁설지가 그에게 공자라 부르며 다가가는 것이 싫었다는 점이 호칭을 바꾼 결정적인 이유였다.
“언니, 너무하네. 내건?”
“흠흠… 여기 있소.”
고수인 이현성은 땀 하나 흘리지 않았으나 남궁설지는 땀을 뻘뻘 흘렸다.
덕분에 목이 마른 사람은 남궁설지였다.
그런데 이현성에게만 물잔을 건네는 제갈현지가 얄밉기만 했다.
그때 헛기침을 하며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리고 남궁설지에게 땀을 닦을 천과 물잔을 건넸다.
“고마워요, 제갈 소협.”
“아니외다.”
그는 바로 제갈현도였다.
남궁설지가 이현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선 자존심이 상했으나, 같은 사내로서 그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불쾌해하기보다 자신의 매력을 내보이는 쪽을 택했다.
남궁장천과 그의 차이였다.
남궁설지 역시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상형이 강한 사내였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제갈현도 역시 약자는 아니었다.
허나 그녀가 만족해할 정도의 강자도 아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수고하셨어요.”
“내일도 상대해주세요!”
“하하…….”
이현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도망쳤다.
그 모습에 남궁설지는 입맛을 다셨다.
“그럼 저도…….”
“언니 같이…….”
“남궁 소저…….”
“예?”
용무를 마친 제갈현지가 돌아가려고 하자, 그 뒤를 남궁설지가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녀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갈현도였다.
“내일은… 저와 비무를 하시지요.”
“비무요? …좋아요.”
이현성과 구룡에 가려졌지만, 사실 제갈현도도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지략이 부각되어서 그렇지, 제갈세가 역시 오대세가였다.
제갈현도는 그런 제갈세가의 소가주였다.
그러므로 그와 비무를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었기에 남궁설지는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제갈현도는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그에 반해 남궁장천은 오직 이현성의 탓만 했다.
* * *
“젠장! 젠장! 젠장!”
언제부터인지 남궁장천은 이현성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걸 이현성과 남궁무백은 지적하지 않았다.
많은 여인의 춘심을 흔든 남궁장천답지 않은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남궁무백은 손자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다그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자라면 반드시 스스로 이겨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기필코 그놈을 꺾고 말겠어!”
이젠 제갈현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현성에 대한 질투와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그를 꺾어야겠단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찼다.
허나 그는 명문세가인 남궁세가의 장손이었다.
수작이 아닌 실력으로 꺾겠다는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냐!”
“아… 실례했습니다. 수련하기 위해서 지나가다가 저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운 남궁장천이었으나 무조건 검을 겨누는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허나 말이 곱게 나가지는 않았다.
“누구요. 이가장의 무사로 보이진 않소만?”
“장원에 신세를 지고 있는 유백이라고 합니다.”
이현성의 배려로 이가장의 식객으로 있는 유백이었다.
장주라서 바쁜 이현성 때문에 아쉽게도 그는 홀로 수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려서 왔던 것이다.
“유 검객이셨구려.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검룡 남궁장천 대협이신 것을…….”
그 순간 남궁장천은 기분이 묘했다.
최근에는 남궁 소협, 남궁 공자 등으로 불렸으나 밖에선 남궁 대협이라고 불렸다.
대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만큼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주변에서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성품이 조금 오만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날 아시오?”
“대협께선 절 기억 못하시겠지만 뵌 적이 있습니다.”
“본인을 말이오?”
유백의 말에 남궁장천은 의문이 들었다.
그의 기억에는 유백이 없었다.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유백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예전에 당가의 호위무사로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 기억 못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 그랬군.”
일개 호위무사였다는 말에 남궁장천은 말을 내렸다.
남궁세가를 사천당가의 밑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당가의 호위무사였던 유백에게 존대할 수 없었다.
“유 무사가 이곳에는 어쩐 일이지?”
“운 좋게 이 형… 아니, 장주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유백의 말에 남궁장천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현성을 떠올렸더니 다시 기분이 나빠지는 듯했다.
“장주의 친구라… 유 무사의 실력을 볼 수 있겠소? 그의 친구가 어떤 검을 쓰는지 궁금하구려.”
“…좋습니다.”
거절하려던 유백은 생각을 바꾸었다.
친구인 이현성을 무시하는 듯한 남궁장천의 기색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순순히 수락하는 유백을 보자 남궁장천은 오히려 불쾌해졌다.
비록 자신이 먼저 비무를 청했지만, 유백이 자신이 누군지를 알면서도 비무를 너무 순순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용이 격돌하게 되었다.
신룡검객 유백과 검룡 남궁장천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챙! 챙! 챙!
두 자루의 검이 충돌했다.
누구 하나 예사롭지 않은 실력이었다.
덕분에 남궁장천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젠장. 그놈의 친구란 말이지.’
당가의 호위무사였다고 해서 내심 무시했는데, 의외로 검술이 범상치 않았다.
덕분에 방심하던 그의 마음이 조여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제대로 합시다.”
“그게 무슨… 헉! 위험합니다!”
순수한 검술로만 겨루었다.
그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나 무림인으로서 그 정도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다면 어찌 성장할 수 있겠는가.
그때 남궁장천의 검이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검기(劍氣)를 발현한 것이다.
검만 휘두르는 것과 검기를 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큰 부상… 아니,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위험한 것이 두려우면 어찌 무림인이겠소!”
“후… 좋습니다.”
유백의 검을 인정했는지 하대하던 남궁장천의 말투가 존대로 바뀌었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유백 역시 생각이 바뀌었다.
순간 유백의 검 역시 빛나기 시작했다.
챙! 챙! 챙!!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달라졌다.
위력은 물론 움직임 역시 전혀 달랐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한 사람의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검이 충돌하는 횟수가 높아질수록 위험도 역시 높아졌다. 그걸 증명하듯 대연검법을 펼치던 남궁장천의 검술이 변했다.
게다가 두 사람의 검기가 더욱 밝아졌다. 검술은 물론, 검기 역시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젠장! 장천아, 이것밖에 안 되더냐! 고작 호위무사 나부랭이에게! 장주 놈의 친구조차 꺾지 못하다니, 이게 뭐냐!’
자신의 검격을 족족 막거나 흘리는 유백을 보며 남궁장천은 점점 자신을 몰아세웠다. 유백을 인정했으나 자신과 동등하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