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허나 철편은 교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오히려 당염을 옭아맸다.
암월, 살수천자의 호법인 그는 검만 쓸 줄 아는 것이 아니었다.
편을 다루는 실력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순식간에 당외삼비 중 둘이 제압되었다.
허나 당외삼비의 나머지 한 사람, 암비(暗秘) 당은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스스로 혈을 짚어라. 아니면 이들은 죽는다.”
“우린 상관 말고 죽여… 큭!”
“오…라버니들…….”
당외삼비의 최강인 당은의 빠른 암기술이라면 두 사람이 제압되기 전에 도울 수 있었다.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그녀가 움직이자 암월이 검을 던졌기 때문이다.
당은이 검을 쳐내는 순간, 이미 두 사람은 암월에게 제압되면서 움직일 기회를 잃어버렸다.
두 사람의 목을 쥔 암월의 손에 힘이 가해졌는지 그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덕분에 당은은 입술을 깨문 채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목숨을 포기한 채 주군의 명을 수행해야 할지, 아니면 주군의 명 대신 그들의 목숨을 살려야 하는지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암월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그냥 죽일 수밖에…….”
“아, 안 돼!!”
당은의 애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허나 암월은 두 사람의 목을 부러트리지 않았다.
그의 자비심 때문일까?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방해 때문이다.
“거기까지만 하게.”
“…구경꾼인 줄은 알았소만 방해꾼이었소?”
암월을 방해한… 아니, 당외삼비 중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놀랍게도 남궁무백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움직여서 그들의 목을 부러트리려는 암월을 저지했다.
아무리 암월이라도 화경고수인 검왕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초절정지경과 화경은 차원이 다른 경지였다.
“그럴 리가? 우린 그저 구경꾼일세.”
“그럼 비키시오.”
“허허… 성미가 급하구만. 이 녀석들을 죽이면 당 늙은이가 거품을 물고 달려올 걸세. 그럼 장주가 곤란하지 않겠는가?”
“이들을 살려준다고 해서 달라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자존심 때문에 아끼는 당외삼비를 보낸 당철영이었다.
만약 당외삼비가 죽는다면 그가 직접 움직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사천의 전설 독종 당철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남궁무백과 제갈윤호의 말대로였다.
허나 암월의 생각은 다르다.
저들을 살려준다고 해서 그가 움직이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기회가 왔을 때 적의 전력을 줄이는 것이 현명했다.
당외삼비 정도의 전력이라면 다시 만났을 때 제법 골치 아플 테니까.
“우리가 당 늙은이의 체면을 봐주었으니, 그도 우리의 체면을 무시할 수 없을 걸세.”
“너흰 우리가 누군지 알겠지?”
“검왕… 어른과 신산 어른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서 당가주께 고하게. 자네들이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말일세. 그럼 자네들을 책하지는 않을 것일세.”
“…….”
검왕의 말에 세 사람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목숨보다 주군의 명이 우선이었다.
그러자 제갈윤호가 갑자기 웃었다.
“하하하. 천하의 검왕도 다 됐군. 이런 무시를 당하고 말일세. 과연 당가로다. 검왕… 아니, 남궁세가와 본가를 이렇게까지 무시하다니.”
“아해들아. 자존심은 당 늙은이만 있는 게 아니란다. 노부의 체면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면… 당가의 뿌리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러나겠…습니다.”
“막내야!”
입은 웃고 있으나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힌 제갈윤호와 범상치 않은 기세를 드러내는 남궁무백.
결국 당은은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남궁무백의 말처럼 그의 체면을 더 이상 건드린다면 결국 남궁세가와 사천당가의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양가의 공멸… 아니, 제갈세가가 낀다면 아무리 사천당가라 할지라도 뿌리째 사라지게 될 것임을 모를 수 없었다.
“현명한 결정이구나. 이제 자네의 차례네.”
“…….”
결국 암월은 제압한 당위와 당염을 풀어주었다.
남궁무백과 제갈윤호가 이렇게까지 말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할 수는 없었다.
그건 24대 암월로서, 암천검주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나 마찬기지였다.
“이. 자. 리에서 있었던 모. 든. 일. 들. 을 주군께 고하고 죄를 청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당은은 이를 악물었다.
당외삼비, 당종의 그림자로서 그간 이런 치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적의(敵意)를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고작 그들의 적의 따위에 반응하기에는 두 사람의 능력이 너무 대단했다.
그렇게 당외삼비가 돌아가자, 두 사람의 시선이 암월에게 몰렸다.
“그런데 설마 했는데… 자네가 이가장에 있을 줄은 몰랐군. 암월영패.”
“본인은 더 이상 암월영패가 아니오. 장주의 호법인 암월이오. …문제되지 않으면 돌아가고 싶소.”
“문제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들답게 진즉에 암월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화경고수인 검왕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이 하루 이틀 지낼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기척을 숨긴 채 있을 수도 없었다.
물론 이현성 역시 그럴 필요없다는 언질이 있었기에 기운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이현성과 맹검 위지천 말고 이런 거물이 이가장에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런 동시에 설마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자는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천사교에 이어서 천웅방의 고수라니 말이야.”
“분명 장주는 이가장이 사파가 아니라고 했거늘…….”
“뭐, 정파도 아니겠지…….”
이가장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사파출신인 위지천과 암월은 물론 금군출신인 묵룡대. 합류하진 않았으나 흑도출신의 흑룡대가 존재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합류한 유백은 명문정파인 사천유가의 후예였다.
이런 복잡한 구성은 천하 어디를 가도 없을 것이다.
“기대가 되는군.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 말이야.”
“영감탱이가 늙어서 주책은…….”
두 사람의 기대대로 그들에겐 재미있는 그리고 이현성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 또 벌어졌다.
* * *
“오, 오랜만에 뵙는군요. 제갈 소저.”
제갈세가의 본가가 있는 호북 융중산에서 하남 정주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이십 일 이상은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전서구를 보낸 지 보름도 되지 않아서 한 무리가 이가장에 들이닥쳤다.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인 제갈현지와 그녀를 호위한 병력이었다.
서둘러 오기 위해 얼마나 호위대를 다그쳤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모두 수척해져 있었다.
“공자님… 오랜만에 뵙네요.”
수척해져 있는 호위대와 달리 제갈현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략결혼을 막기 위해서 단식투쟁까지 한 그녀였기에 청초한 매력까지 더해졌다.
덕분에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던 이현성조차 잠시지만 두근거릴 정도였다.
이 상황에 찬물을 붓는 자가 있었다.
“집에서 밥은 얻어먹고 있는가?”
“갑자기 뭔 소린가?”
“아니, 조부인 자네가 떡하니 옆에 있는데 자네는 본체만체하고 있지 않은가? 아, 그래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눌러앉은 겐가? 하긴. 나에게조차 인사가 없는 걸 보니, 나도 다 됐군.”
묘한 분위기를 방해할 생각인지 남궁무백이 끼어든 것이다.
그의 실없는 농에 제갈윤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반박하기도 힘들었다.
명가의 예법을 생각하면 제갈현지의 행동은 질타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걸 깨달은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소녀, 제갈현지가 조부님과 남궁 어르신을 뵙습니다.”
“신소리는… 그래. 오느라 수고 많았다. 장주, 노부의 손녀가 신세를 져도 되겠는가?”
“…부서진 전각도 새로 지었으니 그쪽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천사교의 습격으로 이가장의 전각이 몇 개나 무너지고 훼손되었다.
다행히 서두른 덕분에 빠르게 복구되고 있는 중이었다.
정주의 실력자들도 숨죽이게 만든 이가장이었다.
목공들이 어찌 어깃장을 부릴 수 있겠는가.
공사를 하는 김에 전각도 몇 개 새로 지었다.
예상치 못한 빈객들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인원을 확충할 예정인 만큼 전각을 더 짓는 것은 필요한 사항이었다.
그때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갈 소저, 오랜만이오.”
“아… 남궁 소협도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네요.”
먼저 말을 건 남궁장천을 보며 제갈현지는 형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이현성에게 정신 팔린 나머지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고, 그걸 느꼈는지 남궁장천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당천수나 신창양가의 양위성처럼 제갈현지를 사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남궁장천으로서는 그리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남궁장천의 위치를 생각해서 조금 더 신경을 써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이현성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멍청한 녀석. 잠깐 저 녀석이 현지와 잘된다면…….’
다음 대 가주가 될 장손이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남궁무백이었다.
허나 그때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두 사람이 이어진다면 손녀와 이현성을 맺어주는데 방해꾼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간 봐온 이현성은 사내로서 그리고 무림 후배로서 탐이 나는 녀석이었다.
아끼고 아낀 손녀 남궁설지의 짝으로도 결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역시 본가에 연락해서 남궁설지를 이가장으로 오게 했다.
제갈현지가 만만치 않지만, 손녀도 충분히 이현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냐!
움찔.
―본가의 장손답게 행동해라.
―죄송합니다. 조부님.
―그리고 네가 혹시…….
눈치 빠른 제갈윤호는 남궁무백이 남궁장천을 통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신산이라 불리는 그가 남궁무백의 수작을 모를 수 없었다.
‘음흉한 영감탱이가 감히 누구 앞에서 잔머리를 굴려?’
그는 그대로 새로운 작전을 세웠다.
그렇게 이가장은 때 아닌 춘풍이 불어왔다.
* * *
“…죄송합니다. 가주님…….”
소림에서의 회담을 마친 독종과 사천당가의 고수들은 세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들, 정확히는 독종을 찾아온 자들이 있었다.
당외삼비(唐外三秘), 독종 당철영의 그림자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부상을 감추고 있으나 당철영의 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외삼비는 개개인이 절정고수이며, 그들의 합공은 초절정고수도 고전할 거라고 자부했다.
그런 그들이 성치 않은 상태로 돌아왔으니 어이가 없었다.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더냐, 그 아이가?”
“송구스럽습니다만 저흰 그를 상대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외삼비의 막내이지만, 실질적인 수좌인 암비 당은의 말에 당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기가 불편한 그를 보며 당은은 더욱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