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제갈현지와의 일만 아니라면.
‘이런 녀석을 검왕 영감탱이에게 빼앗길 순 없지.’
몰랐다면 몰라도 다른 이에게 이현성을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특히 자신의 손자를 저울질하는 검왕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리하여 이가장은 결국 불편한 식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 * *
콰콰쾅!!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천사교주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광분했다.
구겼던 체면을 회복하라고 보냈던 환야는 죽고, 환희요후는 겨우 혼자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가.
사파제일고수였다.
천하제일을 노리는 그로서는 이 치욕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본좌가 직접 죽이겠다! 당장 준비하라!”
“…주군! 아니 됩니다! 고정하십시오!”
“…교주시여! 고정하십시오!”
“고정하십시오!”
오대 교령이자 천사교주의 심복인 요도가 부복하자, 눈치를 보던 천사교의 수뇌들 역시 따라서 급히 부복했다.
이미 환야와 환희요후를 하남성으로 보낸 것만 해도 선을 넘었다.
그런데 천사교주가 직접 움직인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허나 이미 흥분한 천사교주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신을 방해하는 요도를 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요도!! 네놈이 감히 본좌의 명을 거부하는 것이더냐!!”
“으윽… 주군, 소장의 잘못입니다. 그들이 아닌 소장이 직접 나섰어야 했는데… 소장의 졸견으로 인해 주군께 치욕을 드렸습니다.”
천사교주는 기세만으로 초절정고수인 요도에게 충격을 주었다.
과연 사파제일고수다웠다.
죄를 청한 요도는 칼을 뽑아 거꾸로 쥐었다.
동영 무사들의 자결방식인 할복을 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천사교주가 호통을 쳤다.
“갈(喝)!! 너의 목숨은 본좌의 것이거늘! 어찌 네놈 마음대로 버리려 하느냐!!”
“감사합니다. 소장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요도 때문에 이성을 되찾은 천사교주는 명령을 철회했다.
자신이 직접 하남성으로 갔을 때, 벌어질 일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분노를 가라앉힐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그 명분을 요도가 만들어준 것이다.
“요도, 너를 봐서 명을 거두겠다. …허나 본좌의 분노를 식힐 방도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존명!”
천사교주가 하남성으로 향한다면 소림과 개방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천사교와 소림, 개방의 충돌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그것으로 그칠 리가 없었다.
그 싸움은 자칫 정사대전의 서막이 될 것이다.
천하를 노리는 혈천의 입장에선 중원무림의 정기를 깎아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요도는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혈천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최종 목적은 동영 일통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닦지 못한 상황에서 혈천이 뜻을 이룬다면 그들의 지원을 받기보단 정리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럴 작자들이었다.
혈천의 수뇌란 자들은.
그렇기에 아쉽지만, 이 기회를 막아버려야 했다.
‘쓸모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시노비들을 모두 잃고, 홀로 도망치다니!’
환희요후와 연수를 계획한 요도로서는 짜증스럽기만 했다.
혈천이란 그늘 아래 손을 잡고 있었지만, 결국 혈천십삼세로서 자신의 밥그릇은 스스로 확보해야 했다.
그런 요도로서는 ‘연수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법했다.
하지만 그녀 외의 대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네년은 내게 더 많은 것을 토해내야 할 것이다!’
* * *
“불가!”
“야도문주!!”
흑혈방주는 은밀하게 야도문주를 찾아왔다.
청부 겸 새로운 제안을 하기 위함이었다.
부상(?)을 입은 이가장의 고수를 암살하고, 새로운 판을 짜자는 제안이었다.
정주연합이 물 건너갔다 해도 조력자는 필요했다.
가진 야망이 작지 않은 야도문주에게도 좋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왜 불가능하오? 천하의 환야를 죽이고 무사할 리가 없지 않소? 듣기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더이다.”
“난 귀가 없는 것 같소? 환야 늙은이는 이가장주에게 죽었다고 하더이다! 부장주란 자를 암살하려다가 이가장주에게 걸리면 나와 본문만 아작 날 것 아니오!”
“문주, 그런 헛소문을 믿으시오? 당연히 이가장의 헛소문 아니겠소? 그런 애송이가 무슨…….”
흑혈방주는 환야를 죽인 자가 대력괴곤을 죽인 맹인검객, 즉 부장주라고 생각했다.
이가장주가 베었단 소문은 시간을 벌기 위한 이가장의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가장주는 무척 젊은 청년이었다.
그런 청년이 무려 천사교의 환야를 죽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었고, 야도문주도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닐 경우 직접 피해를 보는 것은 암살을 담당할 자신과 야도문이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흥.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방주께서 직접 하시구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이가장에서 지낸다고 하더이다. 그들이 고수가 아니란 보장이 없는 이상 본인과 본문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소.”
“…후회하게 될 것이오.”
제갈세가의 정체까진 밝혀지지 않은 듯싶었다.
야도문주가 끝까지 거부하자, 흑혈방주의 태도 역시 바뀌었다.
정주 사파제일고수인 흑혈방주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 자리에서 수작을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흑혈방주라 하더라도 공멸을 원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다행히 흑혈방주는 격분하면서도 마지막 선은 넘지 않고 돌아갔다.
“흥. 어디서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얼마 후, 야도문주는 자신의 탁월한 선택에 기뻐했다.
이가장이 용담호혈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 *
“하, 한 수만 물러주게.”
“낙장불입도 모르는가?”
“에잉~ 박한 사람. 거 한 수만 물러주지.”
묵룡대원들은 번을 서야 하는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모두 수련을 했다.
허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기를 두고 있는 두 노인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장원에 눌러앉은 노인들.
정체를 모른다면 신경 쓸 이유가 없으나 알게 된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도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따위로 수련할 거면 그만둬라!”
“죄, 죄송합니다. 대주님!”
허정의 호통에 대원들은 다시 수련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허정은 한숨이 나왔다.
호통을 치긴 했으나 대원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금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무림의 전설들에 대한 경외감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도 지척에 두고 있다면 당연히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저 녀석들 제법이지?”
“몇 년 후라면… 제법 쓸 만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자네 안 가나? 바쁜 사람이 이렇게 여기 있어도 되겠어?”
“바쁘긴. 아들에게 자리 넘겨준 지가 언젠데? 그런 자네야말로 안 가나? 검선(劍仙)을 넘어서고 말겠다고 하더니, 이럴 시간이 있어?”
“흠흠… 나도 사람일세. 잠시 쉴 때도 있어야지.”
정파무림의 전설인 십정(十正)은 일성(一聖), 이선(二仙), 이제(二帝), 오왕(五王)으로 나뉜다.
일성은 바로 소림의 성승이고, 두 노인의 입에서 나온 검선은 바로 이선 중 태극검선(太極劍仙)을 지칭한다.
그런 태극검선을 넘어서려고 한다니,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그들의 정체를 안다면 결코 오만하다 생각할 수 없었다.
두 노인 중 한 명은 얼마 전부터 이가장의 식객이 된 신산 제갈윤호였고, 나머지 한 명은 오왕 중 검왕이었기 때문이다.
오대세가의 수좌인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검왕(劍王) 남궁무백.
놀랍게도 제갈윤호에 이어 남궁무백 역시 이가장에 눌러앉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회담이 끝났지만, 급히 돌아갈 제갈윤호가 아니었다.
특히 남궁설지와 제갈현도의 혼사를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런 제갈윤호가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사라졌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남궁무백은 은밀하게 알아봤고, 정주의 어느 장원에 눌러앉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제갈윤호는 제갈세가와 방향이 다른 정주로 향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남궁무백은 직접 이가장에 왔고, 이현성을 알아보게 되었다.
‘젠장, 망했군! 빨리 현지가 와야 할 텐데…….’
‘음흉한 영감탱이. 역시 방심하지 못한다니까.’
남궁무백에 의해 계획에 차질이 생긴 제갈윤호로서는 그가 못마땅했다.
남궁무백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찾던 손주 사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는 제갈윤호가 괘씸했다.
그렇다고 다 늙어서 유치하게 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졸지에 오월동주(吳越同舟)를 하게 되었다.
그때,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묵룡대원이 허정을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장주님을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찌할까요, 대주님.”
“공자님들의 수련을 봐주고 계시니, 객당으로 안내하게. 장주님께서 나오시면 말씀드리겠네.”
“예, 대주님.”
그 시각, 이현성은 두 명의 후기지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챙! 챙! 챙!
세 청년의 검이 어우러졌다.
자세히 보니, 두 청년이 한 청년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두 청년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그들을 상대하는 청년은 너무나 평온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아직도 거칩니다, 제갈 소협. 그리고 남궁 소협의 검은 가볍습니다.”
이현성의 말에 두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절초를 펼쳤다.
“소천…….”
“창궁약연(蒼穹躍鳶)!!”
후기지수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현묘하고 강력한 검술이었다.
허나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후기지수라 부를 수 없는 이현성이 그들의 상대였다.
이현성은 너무도 간단히 두 사람의 검을 무력화시켰다.
무척 허탈해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현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제갈 소협. 방금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허나 여전히 검이 거칩니다. 그 점만 신경 쓰시면 원하시는 것을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장주님.”
“그에 반해 남궁 소협은 악수였습니다. 창궁무애검법의 뛰어남을 모르지 않으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검법을 이런 상황에서 선택하다니요. 그것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말입니다. 차라리 대연검법을 펼치셨다면 더 위협적이었을 겁니다.”
“…….”
두 청년은 희비가 엇갈렸다.
제갈현도는 그가 익힌 최고의 검법인 대천성검법 대신 완숙된 소천성검법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만약 상대가 이현성이 아니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또 다른 청년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분명 그의 검은 제갈현도보다 강력했다.
남궁세가의 직계 중에서도 허락된 극소수만 익힐 수 있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
이립 이전에 창궁무애검법을 허락받은 자는 당대에 오직 한 명뿐이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검룡 남궁장천.
검왕 남궁무백과 함께 이가장에 온 그는 현재 제갈현도와 함께 이현성에게 떠넘겨진 상태였다.
자신보다 어린 이현성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도 검룡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데, 지적만 당하니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이런 그의 심정을 알기에 이현성 역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