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래서… 어찌할… 생각인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우선 식객으로 받았으니, 다시 대화를 나눠보고 결정해야겠지요.”
“자네… 뜻대로 하게. 후… 난 운기행공을 해야겠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픈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단 생각이 든 이현성은 급히 돌아갔다.
가부좌를 튼 위지천은 이를 악물었다.
‘난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아무리 환희요후가 사파무림에서 칠사(七邪) 다음으로 강한 십인에 꼽힌다지만, 이렇게 일방적일 줄은 몰랐다.
덕분에 맹검 위지천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열망이 커졌다.
위지천의 거처를 나온 이현성은 식객인 된 암월영패의 거처로 향했다.
“솔직히 귀하의 말을 모두 믿긴 어렵소. 그러니 한 가지만 약조해줄 수 있겠소? 이곳에 있는 동안 나와 식솔들에게 검을 겨누지 않기로 말이오.”
그가 올 줄 알았는지 암월영패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게 대답했다.
“비록 암천회의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본인은 24대 암월(暗月)로서 맹약을 지킬 생각이오. 비록 장주께선 완전한 2세 암천이자, 암천회주가 아닐지라도 말이오.”
“귀하의 말대로 암천회라는 것이 아직까지 명맥이 이어질 리가 없을 텐데도 말이오?”
암월영패의 말에 의하면 과거 암천회란 조직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현성의 애검이 바로 회주의 신물이라고 했다.
암월은 회주의 호법으로서, 당대까지 새로운 계승자를 기다려왔다고 했다.
24대 암월.
수백 년… 아니, 천 년에 가까운 긴 시간을 이어왔다고 하니 이현성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상관없소. 암월은 암천회주가 아닌 살수천자님을 모시는 사람이니 말이오.”
“…….”
아무리 무림사에 해박한 사람이라 해도 암천회에 대해서 아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근 천 년 전에 존재했던 조직이기 때문이다.
허나 살수천자라면 말이 다르다.
살수천자(殺手天子).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살수들의 황제였다.
더 정확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수업계를 일통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허황된 전설일 뿐이란 말도 있지만 살수업계에선 아직도 신처럼 생각하는 존재였다.
암월영패의 말에 의하면 그런 살수천자의 또 다른 별호가 바로 암천(暗天)이라 했다.
즉, 암천검주이자 암천살무를 계승한 이현성은 2세 암천(二世暗天)인 셈이었다.
근 천 년이란 시간동안 암천의 소유주는 여럿 있었지만, 암천살무를 계승한 자는 이현성이 처음이었다.
다만 살수천자라 불린 암천의 이름을 계승하기엔 아직 이현성의 경지가 미흡했기 때문에 진정한 암천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본인의 물음에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암월영패.”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식솔들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오.”
요도가 환희요후에게 지원한 시노비들을 벤 자가 바로 암월영패였다.
그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식솔들 중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시노비들을 상대하기에 경비대의 힘은 아직 미약했다.
“나는 더 이상 암월영패가 아니오. 장주께선 본인을 암월이라 불러주시오.”
“알겠소. 암월. 후… 기왕 본인의 곁에 있을 거라면 본장의 호법이 되어주시오. 그것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내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현성의 입장에선 그냥 식객으로 두는 것보다 호법이란 정식 직책을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중간한 위치에 두기엔 그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겠소, 장주.”
* * *
“젠장! 젠장! 젠장!!”
흑혈방주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주변을 때려 부쉈다.
그에겐 원대한 꿈이 있었다.
정주 전체를 아우르는 패자(霸者)이자 흑혈방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세력으로 키우는 것이다.
정주안가의 몰락은 그의 꿈을 앞당겨주었다.
허나 그의 꿈에 제동을 거는 곳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태가장이라 불린 이가장이었다.
허나 그는 이조차 자신의 꿈을 이루는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이가장의 존재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서 정주의 실력자들을 하나로 묶을 생각이었다.
물론 연합의 수장은 자신이 맡을 계획이었다.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세력이나 개인의 무위를 감안하더라도 자신 외에 연합의 수장이 될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정주하가의 표풍검호 하서종이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했다.
“환야, 그 늙은이는 왜 거기서 죽고 지랄이야!! 그 애송이 놈을 죽이지도 못하고!!”
이가장을 재방문한 소림무승들 때문에 연합은 잠시 보류되었다.
하지만 보류일 뿐, 중단은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관철시키겠다고 벼르던 중 사건이 터졌다.
천사교와 환희루의 고수들이 이가장을 습격한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흑혈방주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내 절망하고 말았다.
습격의 주체였던 천사교의 환야가 죽었고, 환희루의 고수는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아서였다.
대력보주인 대력괴곤을 죽인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덕분에 정주연합을 지지하던 실력자들이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건 이란격석(以卵擊石)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잠깐! 환야 그 늙은이를 죽였… 상대했다면 그놈도 부상을 입었을 것 아닌가?”
환야가 누구던가.
천사교의 오대 교령이었다.
그런 고수를 죽인 일은 분명 대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지 않을 리가 없었다.
순간 흑혈방주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력괴곤을 죽인 이가장의 고수를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말이다.
“야도문주! 그와 상의해봐야겠어!”
무영살이 사라진 지금, 정주 제일의 살문은 야도문이며 제일의 살수 역시 야도문주였다.
그라면 부상 입은 이가장의 고수를 암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반드시 암살해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새로운 판을 짤 준비를 했다.
불청객 (1)
“대주. 인원 확충은 어찌 되고 있나?”
이현성은 허정을 대장(隊長)이 아닌 대주(隊主)라 불렀다.
경비대에 새로운 명칭을 내렸기 때문이다.
묵룡대(墨龍隊).
그것이 경비대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이가장에 고용된 경비무사로 남을지, 이현성의 수하가 될지를 고민하던 경비대는 천사교의 습격 이후 전원 이현성의 수하가 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장원을 떠난 적운을 제외하고, 중상을 입은 채 치료 중인 3인을 포함한 51명 전원의 결정이었다.
이현성과 위지천의 신위를 직접 본 그들의 몸은 한껏 달아오른 상태였다.
게다가 위지천과 암월의 신분까지 알게 된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이현성은 그들의 결정을 받아들이며 묵룡수를 전수하는 동시에 묵룡대라는 이름을 내렸다.
수장이 대장에서 대주로 바뀐 것은 무척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지휘권을 가진 대장(隊長)과 생사여탈권을 가진 대주(隊主)는 같을 수 없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주군.”
“대주에게 일임한 것이지만 금군 출신에 국한될 필요는 없네.”
묵룡대의 확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현성은 허정에게 지시를 내렸다.
퇴역한 혹은 퇴역 예정인 금군 출신 중 본장의 무사가 될 사람이 있으면 영입하라는 지시였다.
묵룡대도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다수의 인재를 영입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무림맹이 결성되면 많은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인원을 확충하려고 했다.
“기존 묵룡대와 융합되지 못한다면 우선 장원의 경비대로 창설하는 것 역시 고려할 테지만… 가능하면 허 대주가 잘 관리해줬으면 좋겠네.”
“주군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믿고 맡기겠네.”
언젠가 데려올 흑룡대와 함께 이가장의 중추가 되어야 하기에 이현성은 묵룡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를 마친 허정이 나가자 임시 집무실에는 그만 남게 되었다.
“후… 슬슬 재정을 확보할 방법도 모색해야겠군.”
지금이야 현재 보유한 사업장의 수입만으로 장원 운영이 가능하지만, 인원이 늘어난다면 힘들어질 수 있었다.
과거 태가장의 경우 사업장 외에 황실의 지원이 있었다.
그래서 운영이 가능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원을 확충한다면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쾌활림을 옮겨야 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장주님. 마 집사입니다.”
“마 집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이 오셨습니다. 장주님을 찾아오신…….”
“제 손님이라고요?”
이백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며, 임시 객당으로 향했다.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차를 홀짝홀짝 마시는 노인은 이채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촌노(村老)가 아님을 증명하듯 눈빛만 아니라 풍기는 기운부터 범상치 않았다.
게다가 노인을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 역시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그와 인연이 있었다니 이야기가 수월하겠구나.”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조부님.”
노인의 곁에는 젊었을 적 모습을 재연해놓은 듯 그와 쏙 빼닮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사람은 조손지간이었다.
닮은 것은 당연했다.
다만 조손지간임에도 청년은 노인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이는 노인이 혈육에게도 권위적이거나 엄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절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장주인 이현성입니다.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대협.”
“제갈 소협이셨군요. 그럼 혹시…….”
“제갈윤호라고 하네.”
흠칫!
그들은 이현성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한 명은 수개월 전에, 나머지 한 명은 회귀 전에 연을 맺었다.
진주언가 전대 가주의 고희연에서 만났던 제갈현도.
회귀 전, 혈영살수로서 마지막 암살 대상이었던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윤호.
그런 두 사람을 한 자리에서 같이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제갈윤호는 묘한 눈으로 이현성을 바라봤다.
찰나였지만 자신을 알아본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물론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이자 강호칠기인 만큼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가주 자리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난지 제법 되었다.
따라서 어린 청년이 자신을 알아보긴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이신 제갈 노선배시군요. 말학 이현성이 인사드립니다.”
이현성은 포권을 취해 예를 표했다.
그런 이현성을 바라보는 제갈세가 고수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갈윤호가 누구인가. 비록 가주 자리를 내려놨다 해도 가문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강호칠기의 일인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상당했다.
그렇다면 보통 제갈 어르신, 제갈 노야. 하다못해 제갈 대협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이현성은 건방지게 노선배라고 칭했다.
이는 두 사람을 같은 선상에 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현성이라고 이를 모르지 않았다.
허나 노선배란 호칭 역시 틀린 것이 아니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게 옳다고 판단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