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그런데 단말마의 비명이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고도의 수련을 받은 살수들의 경우, 죽는 와중에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허나 그건 말 그대로 살수들의 경우였고, 평범한 인간들의 경우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혈향에 비해 비명이 없는 것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군가 했더니, 환야 선배였구려.”
“…너 좀 변했군.”
예전에는 어르신이라고 불렀던 그가 지금은 선배라고 칭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불과 네다섯 달 전과 달리 그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거슬렸다.
무공의 특성상 기세를 갈무리하기에 웬만한 고수는 그것을 간파할 수 없었다.
허나 환야는 웬만한 고수가 아니었기에 희미하지만 이현성의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묘한 여유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선배 역시 그렇소.”
“건방진 놈… 조금 치켜세워주니 주제를 모르는구나!”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든 환야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고작해야 네다섯 달이었다.
그동안 변해봤자 얼마나 변했겠냐고 생각했다.
허나 그는 잊었다.
아니, 애써 무시했다.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을.
학사도 사흘 지나면 학식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나아지는데, 네다섯 달이 지난 이현성이 어찌 그대로겠는가.
“천환장(千煥掌)!”
“본인을 너무 무시하는구려.”
눈앞에서 천 개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천환장은 환야가 자주 펼치는 장법이었다.
상대를 현혹시키는 환술이 가미된 장법인 만큼 하수에게는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고수에겐 장난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특히 삼라만상을 익힌 이현성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이현성은 검집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천환장을 파쇄했다.
허나 환야라고 그걸 모르지 않았다.
“환령마수(幻靈魔手)!”
애초 천환장은 환령마수를 숨기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환령마수야말로 환야의 대표절학 중 하나였으니까.
실제 천환장으로 시선을 돌린 후 환령마수를 펼치는 연환기에 천웅방의 사자도패(獅子刀覇)가 당했다.
호신강기 때문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히진 못했지만.
하물며 사자도패보다도 하수인 이현성에게는 더 치명적일 거라 생각했다.
퍽!
“음… 으아악!”
“본인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 않았소?”
환령마수는 분명 이현성을 가격했다.
허나 그럼에도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없었다.
의아한 순간, 어깨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환령마수에 가격된 것은 이현성이 아닌 그의 잔상이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는 아니지만 삼라만상 덕분에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게 가능했다.
그로 인해 방심하던 환야를 벨 수 있었다.
하지만 환야는 과연 천사교의 오대교령다웠다.
환야는 본능적으로 반응해서 어깨가 완전히 베이는 것을 피했다.
“이노~옴!! 죽여버리겠다!!”
“원래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려.”
이현성은 방심하지 않았지만 환야를 상대로 여유를 잃지도 않았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이현성이었다.
그는 그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환야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천사교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가 되었으니까.
“날 노린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천사교주.”
이현성은 선언했다.
눈앞의 환야가 아닌 그 뒤에 있을 천사교주 천사존을 향해서.
다른 곳에선 또 다른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본교를 배신한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맹검.”
검을 늘어뜨린 위지천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물론 소경이라서 육안이 아닌 초감각으로 여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하얀 끈이 쥐어져 있었다.
그건 여인들의 허리에 매는 채대(彩帶)였다.
허나 평범한 채대가 아니었다.
환희루의 보물인 백린(白鱗)이었다.
“환희요후였군. 그대의 입에서 본교란 말이 나오니 좀 우습군.”
“배신자가 할 말은 아니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사방에서 채대가 날아와 위지천을 공격했다.
환희요후와 함께 온 환희팔선자 중 넷이었다.
챙!!
허나 고작 이런 허튼 수에 당할 맹검 위지천이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들의 채대는 위지천의 검에 베이지 않았고 오히려 쇳소리를 냈다.
환희요후의 백린만큼은 아니지만 환희팔선자들의 채대 역시 상당히 뛰어난 무기였다.
천잠사(天蠶絲)와 철사(鐵絲)를 엮어서 만든 채대였기 때문이다.
“내가 두렵소, 요후? 수하들과 합공이라니… 요후의 이름이 아깝소.”
“감히!”
“되었다. 고작 저런 격장지계(激將之計)에 응할 필요는 없으니까.”
“쩝~ 아쉽군.”
위지천의 말에 네 명의 선자들이 발끈했다.
허나 환희요후의 저지로 위지천의 도발은 무산되었다.
그녀들이 발끈해서 달려들었다면 한두 명쯤 제거할 수 있었는데, 환희요후가 차분하게 대처한 것이 위지천은 너무나 아쉬웠다.
환희요후는 중년 미부로 보이지만 일흔이 넘은 노파였다. 그런 만큼 그녀의 연륜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위지천을 환희요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허튼수작이라니… 맹검답지 않군.”
“그러게 말이오. 요녀들답지 않게 너무 신중하구려.”
빠드득…….
이어지는 위지천의 도발에 사선자들은 이를 갈았다.
환희요후와 달리 진짜 중년 미부인 그녀들은 위지천의 도발을 참기 힘들어 보였다.
환희루는 무림방파인 동시에 기루였다.
세상 더러운 꼴 다 본 기녀라면 자존심을 부리기보단 의연하게 넘길 줄 아는 법이다.
허나 환희루의 요인인 환희팔선자는 일개 기녀들과 달리 처음부터 무림인으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기녀들과 달리 의연함이 부족했다.
덕분에 위지천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닳고 닳은 계집이라서 그런가? 자존심도 없군.”
“개자식!”
“머, 멈춰!!”
결국 팔선자가 위지천의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거력이 담긴 채대가 위지천을 뭉개버리기 위해서 날아왔다.
그것을 느낀 위지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걱!!
“죽어… 컥!”
“안 돼!!”
환희팔선자 중 제일 어린 만큼 무위와 경험이 부족한 팔선자였다. 그렇다 해도 그건 기준이 같은 환희팔선자 중에서였지, 그녀는 결코 하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천사교 오대교령조차 피한다는 맹검이었다. 탈교했다고 해서 그의 검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현성과의 비무 및 논무를 통해 실력이 한층 성장한 위지천이었다.
따라서 이성을 잃고 달려든 팔선자를 베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죽여버리겠어!”
“그만! 물러나라!”
“루…주님 막내가……!”
“내 명이 들리지 않더냐!”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막내, 팔선자의 죽음에 나머지 세 명의 선자들은 분개했다.
하지만 환희요후는 그녀들을 물렸다.
이성을 잃은 상태로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존…명!”
세 명의 선자들은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눈으로는 위지천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허나 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위지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그녀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하지만 루주인 환희요후의 명을 거역할 수 없기에 분노를 억지로 참았다.
빠드득…!
“네놈, 반드시 죽여주마!”
“그럴 생각 아니었나? 허나 내 목을 그냥 내줄 생각은 없지.”
초절정고수들의 격돌로 이가장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 * *
“무, 무슨 일이야…….”
식솔들은 물론 경비대원들 역시 두려워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격이 다른 강자들의 격돌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때 허정이 외쳤다.
“경비대는 식솔들을 보호하며 사당(祠堂)으로 이동한다!”
“며, 명!”
사당은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지만 실제로 사당의 역할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사당에는 비밀 은신처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허정은 경비대장으로서 식솔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명령을 내린 셈이었다.
“어… 어… 으아악!!”
“무, 무슨 일… 헉!!”
경비대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하려던 식솔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경비대원들은 그들의 곁에 가서야 그들이 왜 비명을 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죽었군. 도대체 누구지?”
“헉…! 중원인이 아닌데?”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시체에 가까이 다가가 복면을 벗기자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애초 중원인도 아니었다.
경비대 조장 중 한 명이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동영인이군. 동영인이 왜 이곳에서 죽어 있는 거지?”
“형 조장! 사당으로 이동하지 않고 뭐 하는가!”
“부대장님. 이곳에 정체불명의 동영인들이 죽어 있습니다.”
“동영인이? 정말이군… 허나 지금은 그것보다 피신이 우선이다!”
경비대 조장인 형균은 동부군 출신답게 동영출신 왜구를 자주 봤다.
동시에 겪었던 왜구와는 조금 다르지만 사체가 동영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보고에 임천기 부대장 역시 의아했으나 지체할 시간이 없기에 이 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체불명의 동영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노린 시노비들이었단 사실을.
그리고 일급살수를 상회하는 요도의 시노비들이 죽어 있는 이유 역시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가장과 천사교의 사람들 이외의 존재가 있단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그림자가 움직였다.
요도의 시노비들을 죽인 죽음의 그림자가.
환야의 최후
“비, 빌어먹을……!!”
환야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이 나직하게 물었다.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인지 실력이 많이 줄었구려. 환야 선배.”
“이… 이 개, 개 같은 자식이! 감히 노부를 놀려!!”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지지 않은 이현성과 달리 환야는 머리가 산발된 것은 물론이고, 옷 또한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이현성의 말처럼 독안(獨眼)이 되면서 실력이 조금 감퇴된 것은 사실이었다.
허나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꼭 그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현성, 그가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다.
맹검 위지천과의 싸움에서 혼원신공의 기연을 얻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깨달음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독안이 되기 전의 환야라 해도 지금의 이현성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렇게 두 사람의 격차가 벌어졌으니 이런 상황은 당연했다.
쾅! 쾅! 콰쾅!!
‘젠장! 젠장! 젠장!!’
환야의 그 어떤 공격도 이현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환야는 자괴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서너 개월 전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애송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으니 환야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오냐! 나 혼자 죽지는 않겠다!”
이현성은 순간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환야의 눈에서 광기를 읽었다.
이미 승패가 갈린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가 미쳤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하물며 환야는 천사교의 오대교령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