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알겠네. 경비대는 앞으로도 허 대장에게 일임하겠네. 지금처럼만 해주게.”
“감사합니다. 장주님.”
“그만 돌아가 봐도 좋네.”
“예. 장주님.”
그를 전적으로 믿을 순 없으나 무조건 경계할 생각도 없었다.
신뢰란 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니 이제부터 쌓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태천광 전(前) 장주의 청이 아니라도 이현성은 장주의 입장에서 경비무사들이 필요했다.
좋은 인재들을 그냥 쳐낼 이유는 없었다.
‘흑룡대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두고 봐야겠지.’
전(前) 흑룡당인 흑룡대를 귀림에 맡겨둔 상황이었다.
삼대살종 중 하나인 귀림의 훈련을 받으면 그들은 분명 몰라보게 성장할 것이다.
허나 훈련을 받은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지금 그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탄력을 받았을 때 확실하게 실력을 높여야 했다.
그렇기에 경비대를 당장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인지, 지금처럼 형식적으로 곁에 둘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국 그들의 미래는 스스로의 행동에 달렸다는 뜻이었다.
“강병들이라 아깝지만, 믿을 수 없다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없으니까.”
경비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이현성은 장주로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처리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업무를 분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 장원에는 총관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맹인인 위지천에게 행정업무를 떠넘길 수는 없었다.
덕분에 당분간은 홀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모유환이라도 불러들여야 하나?”
흑룡방의 총관 역할을 맡았던 전(前) 백룡당주 모유환. 그는 현재 북경 쾌활림을 맡고 있었다.
정확히는 쾌활림의 총관직을 수행하며 림주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라면 골치 아픈 일을 충분히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사 정주로 불러들인다고 해도 그에게 장원의 총관을 맡길 순 없다.”
쾌활림은 단순히 자금력 확보를 위해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된 목적은 정보력 확보였다. 그렇기에 모유환에게는 계속 쾌활림과 정보를 관리하게 할 예정이었다.
쾌활림을 이곳 정주로 옮기더라도 그럴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총관이 필요했다.
물론 인재를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골머리가 썩었다.
“형님… 현호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들어와라.”
꼬박 반나절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반나절 간 생각을 많이 정리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현호의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에게 오해를 남기지 않도록.
“더 있다가 가도 될 텐데…….”
“아닙니다. 형님. 사부님과 누이가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묵을 수가 없습니다.”
이현성과 깊은 대화를 나눈 후 이현호는 천중산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애초 목적이었던 형도 만나게 되었고, 같은 하남성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돌아오길 기다릴 천중산장 가족들을 생각하면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실력부족을 뼈저리게 느낀 이현호는 빨리 돌아가 수련을 하고 싶었다.
‘사부님께서 비전을 전수해주신다고 하셨다. 분명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이현호를 후계자로 결정한 한승은 천검비록의 천검을 전수할 생각이었다.
그러한 사실까진 모르지만, 이현성은 동생이 서둘러 돌아가려는 이유를 알기에 쓴웃음이 나왔다.
허나 막지는 않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알겠다. 마음 같아선 네 사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으나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구나. 장원이 안정되면 찾아가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형님.”
동생과 작별인사를 마친 이현성은 종리우에게도 인사를 했다.
“제 동생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종리 대협.”
“걱정 마십시오. 장주님.”
아쉽게도 종리우와는 서먹하게 헤어지게 되었다.
친분을 쌓기 전에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위지천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보다는 많이 경계심이 누그러져 있었다.
‘의독선생이 내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좋을 텐데… 아쉽군.’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십여 년 만에 동생과의 재회 때문에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진정되고 나서야 그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천검(天劍) 한승의 의제인 의독선생(醫毒先生) 종리우.
천검 때문에 위명이 가려졌으나 그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뛰어난 의술은 물론, 독술까지 익혔다는 것은 무척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의독선생 종리우… 기억해두겠어.’
어렵게 만난 두 형제는 다시 헤어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주풍운
“후…….”
이른 새벽, 이현성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의 경지쯤 되면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심상수련이 중심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또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육체를 움직이는 수련을 아예 하지 않으면 감각이 무뎌질 수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내공의 힘이 강해도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외공(육신)이 부실하면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른 시간 잠깐씩이라도 몸을 풀었다.
새벽수련을 마친 그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마 노인께선 오늘도 이른 시간에 나오셨군요.”
“하하… 나이를 먹으니 잠이 없어져서 그런가 봅니다.”
마구간지기 마 노인.
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성조차 마씨로 바꿨을 정도라고 했다.
태가장의 식솔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본 지 며칠 되지 않았으나 노구임에도 말(馬)을 돌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 보였다.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좋아해서 하는 일인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빈말이 아닌지 마 노인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걱정 어린 말을 했다.
“그렇다 해도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마 노인께서 쓰러지면 승평이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장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마 노인은 아들과 며느리를 잃고 손자 하나뿐이었다.
손자인 마승평은 장원에 시동으로 있으며, 이현성에게 지도를 받고 있는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제 할아버지를 닮아서 말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렇긴 하지만…….”
“…승평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장주님께 지도를 받은 이후 부쩍 밝아져서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승평은 조부인 마 노인처럼 성실하지만, 내성적이기 때문인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말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교성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런 마승평이 근래 조금씩이었지만 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이현성이 태가장의 식객이 된 이후부터였다.
그는 심심풀이 삼아 진한을 지도해주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여덟이나 되는 아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마승평이었다.
밝아진 손자의 모습에 마 노인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기게 된 것이다.
그걸 이현성도 느낄 수 있었다.
‘으음… 마 노인에게 부탁을 할까?’
태가장은 현재 인재난을 겪고 있었다.
주가려와 함께 태가장의 핵심 인원이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장주인 이현성이 처리할 게 너무 많았다.
이를 조금이라도 나눌 인재가 필요했다.
능력은 물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는 마 노인이라면 그에 합당했다.
“정말 제게 감사하십니까?”
“예? 예.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제 부탁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마 노인의 말에 이현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본장의 집사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예? 지, 집사를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 노인은 난색을 표했다. 설마 장주의 부탁이 집사가 되어 달라는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황 총관님께서 태 대인과 함께 떠나시면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총관직을 맡기고 싶지만, 그건 어려우실 테니 집사가 되어주십시오.”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쇤네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마 노인은 손을 강하게 흔들면서 난색을 표했다.
마구간지기를 제외하고 다른 일은 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몰랐다.
허나 이현성의 생각은 달랐다.
“총관처럼 행정업무까지 부탁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가솔들만 관리해주시면 됩니다. 때 되면 삯을 나눠주고, 그들의 고충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외부 사람보다는 가솔들을 잘 아는 마 노인께서 맡아주는 것이 서로에게 낫지 않겠습니까?”
“…쇤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없습니까?”
“물론입니다. 허나 너무 늦으면 곤란합니다.”
경비대는 허정에게, 가솔들은 마 노인에게 맡긴다면 한결 수월해질 수 있었다.
아직 두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가장의 일백 명을 모두 지켜보는 것보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훨씬 수월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억지로는 맡길 수 없지. 결국 싫다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수밖에…….’
* * *
‘허… 내가 집사라니… 당치도 않지.’
집사 제의를 받은 마 노인은 기분이 복잡했다.
그의 나이는 벌써 예순이 넘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라면 아직 한창이라 할 수 있지만,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촌노에 불과하다.
아직 정정하지만 당장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
살만큼 산 자신은 상관없으나 홀로 남을 손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마구간의 일이 고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마구간지기 대신 집사가 된다면 조금 더 손자 곁에 있어 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다.
“승평아.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더냐?”
“헤헤. 선생님… 아니, 장주님께서 무공을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어요!”
근래 아이들이 글을 익혀야 했기에 풍운심법(기공)의 전수를 미루고 있었다.
다행히 열심히 한 덕분에 천자문은 충분히 뗄 수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이현성은 드디어 풍운심법을 전수해주겠다고 아이들에게 통보한 상황이었다.
“내공을 익히면 힘을 세지고 건강해진대요! 나중에 할아버지도 알려드릴게요!”
“허허. 고맙구나.”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주는 손자를 보니 마 노인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천천히 손자 마승평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비록 거친 손이었지만 애정이 담긴 그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마승평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흔들리던 마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난…….’
* * *
“그간 공부 열심히들 했지?”
“네! 선생… 아니, 장주님!”
이현성의 부름을 받고 모인 아이들의 눈빛은 무척 초롱초롱했다.
아직 내공심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무척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이현성이 인자하게 말했다.
“몇 가지 당부할 게 있단다. 내가 알려줄 내공심법은 누구에게도 알려주면 안 된다. 알겠지?”
“네!!”
“네에?!”
무공은 비인부전이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