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대장간과 마장은 무기와 군마의 수급을 위해 운영한 것이지만, 수익이 제법 나오는 듯싶었다.
그에 반해 포목점과 객잔은 오로지 식솔들의 생계가 목적이었다.
대장간과 마장 그리고 포목점의 관리인들은 장주인 이현성이 변화없이 그대로 일을 맡겨주니 안도하는 눈치였다.
“한아, 마지막으로 남은 곳이 객잔이던가?”
“예. 선생님… 아니, 장주님.”
어제까지만 해도 무술 선생님이었는데, 이제는 장주가 된 이현성이었다.
그래서 시동인 진한의 입장에서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 진한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제 장주가 된 만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정식 제자로 들일 생각은 아직 없었다.
이현성은 그저 진한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녀석, 가자꾸나.”
“예! 장주님!”
진한의 안내를 받아 태가장의 마지막 사업체인 태가객잔으로 향했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총관이 직접 나와서 맞이했다.
“자, 장주님 오, 오셨습니까. 태가객잔을 관리하고 있는…….”
“하하… 그리 어려워할 필요 없소. 그댈 해하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그가 이현성을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객잔의 총관이라고 해봤자 일개 고용인에 불과했다.
태천광이 태가장의 모든 권리를 이현성에게 양도한 이상 객잔 역시 그의 소유였다.
이현성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해고될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다른 식솔들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객잔을 잘 관리하고 있단 이야기는 들었네. 앞으로도 믿고 맡길 테니, 최선을 다해주게.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하게. 최대한 지원해주겠네.”
“가, 감사합니다! 장주님!”
자리보전을 할 수 있게 된 총관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척 봐도 객잔이 무척 바쁜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굳이 점소이와 숙수까지 만나지는 않았다.
그들의 일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업하는데 방해가 되는군. 이만 가보겠네.”
“사, 살펴 가십시오! 장주님!”
용무를 마친 이현성이 진한과 함께 막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형님! 현성 형님!!”
움찔!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이란 이름이 희귀한 이름은 아니었기에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허나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 맞다고.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시뻘건 청년이 보였다.
청년이 서 있는 자리와 객잔 입구는 제법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안력이 뛰어난 이현성은 청년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순간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
청년은 경공을 펼쳐서 단숨에 날아왔다.
그리고 이현성의 두 팔을 잡고 부르르 떨었다.
“혀, 형님 맞으시죠!”
“혀, 현호가 맞느냐? 네가 정녕 내 동생 현호가 맞느냐!!”
두 사람은 십여 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감정이 격해진 이현성은 동생 이현호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떨림이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이현성은 마음이 울컥했다.
동생을 떼어놓고 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어디보자, 내 동생!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현영이는, 부모님은 잘 계시느냐!”
“아… 그게…….”
이현성의 물음에 이현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반응에 이현성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십여 년 만에 만난 동생과의 재회를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래… 너라도 무사하니 되었다. 되었어!”
“죄송해요. 제가 형님 대신 가족들을 지켰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이현호는 하염없이 울었다.
하지만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헤어진 십여 년 전, 그의 나이는 고작 다섯 살에 불과했으니까.
이현성은 슬펐으나 남동생이라도 목숨을 건졌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때 웬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아… 형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숙부님이십니다.”
“종리우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현성입니다. 제 동생을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종리우는 이현성에게 말을 올렸다.
초면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말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현성은 종리우란 이름을 떠올리지는 못했으나 이현호가 숙부라고 불렀기에 인사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허나 종리우는 손사래를 쳤다.
“저는 한 게 없습니다. 형님께서 호현이를 돌보신 것이니까요.”
“호현이라니요?”
“자세한 것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다. 이곳보다는 저희 장원으로 가시죠.”
두 사람은 이현성의 말에 살짝 놀랐다.
장원을 소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하면 조금 전 객잔의 총관이 그에게 장주라고 부르는 것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객실에 풀어두었던 짐을 챙겨 이현성과 함께 장원으로 갔다.
“장원이 상당히 크군요.”
태가장이 대(大)장원이라 할 정도는 아니나 천중산장에 비하면 제법 규모가 되는 편이었다.
이백여 명이 기거하던 장원이었으니 큰 편이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저… 형님.”
“왜 그러느냐?”
“혹시 북경 내각대학사님의 장원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맞다. 네가 그걸 어찌 알았느냐?”
이현호는 북경 문가장에 이현성이란 사람이 있단 소식을 듣고 종리우 함께 다녀왔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이현성은 반가운 듯 미소를 지었다.
“모두 잘 계시더냐?”
“예. 제가 올 때까진 잘 계셨습니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저… 형님. 제가 듣기로 형님께선 북경을 떠나신 지 몇 개월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현성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에 미소를 짓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이 장원을 가지게 된 것이 궁금한가 보구나.”
북경을 떠나야 했던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문종학 대인의 소개장을 받아 태가장에 왔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태가장주의 부탁으로 황족인 주가려를 구해준 보답으로 장원을 양도받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주가려의 암행은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나 동생인 이현호에게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이현호는 놀라워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그런데 의형이라는 분은…….”
“아, 잠시만 기다리거라. 곧 형님을 소개시켜주마.”
이현성은 위지천을 찾아가 헤어졌던 남동생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전했다.
이에 위지천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그리고 이현성과 함께 이현호와 종리우에게 내어준 방으로 왔다.
“형님. 제 동생인 이현호와 숙부님이신 종리우 대협이십니다. 제 형님이신 위지천 대협이십니다.”
“위지천이오. 현성 아우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우를 만나게 되어서 본인도 기쁘구려.”
“한… 아니, 이현호입니다. 대형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현호는 깜짝 놀랐다. 의형이라며 소개시켜준 인물이 예상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허나 당황한 것도 잠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 그와 달리 종리우는 당황하며 인사를 하지 않았다.
“…….”
“…숙부님?”
“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협의 성함이 귀에 익어서…….”
“종리 대협의 생각이 맞을 거요. 내가 바로 맹검(盲劍)이오.”
“……!!”
종리우는 경악했다.
설마설마했다.
하지만 동시에 동명이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떠올린 인물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바로 인정했다.
자신이 맹검이라는 사실을.
종리우는 본능적으로 그를 경계했다.
그가 사파사세의 하나인 천사교의 호교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에 위지천은 피식 웃었다.
“혹시 주변 지인 중 내 검에 죽은 자가 있소?”
“그건 아니나…….”
“그럼 그리 걱정 마시오. 난 더 이상 천사교 사람이 아니고, 아우의 친인인 그댈 노릴 이유가 없으니 말이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위지천이 천사교에서 나온 것을 아는 사람은 아직 없기에 종리우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그를 이현성이 두둔했다.
“제가 보장할 테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종리 대협.”
“아, 알겠습니다.”
종리우의 입장에서 초면인 이현성 역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
허나 의질(義姪)인 이현호의 친형이니 무작정 의심할 수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을 한순간 해소하는 게 어려운 것은 압니다. 허나 차차 직접 저희를 겪어보시면서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이현성의 말에 종리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종리우가 기겁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맹검의 악명은 워낙 자자했기 때문이다. 허나 알려진 악명만큼 악인은 아니었다.
물론 사파의 고수인 만큼 손속이 잔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천사교의 호교사자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살인을 저지른 것 역시 사실이었다.
허나 그의 검에 명을 달리한 자는 전부 무림인이지, 양민들이 아니었다.
당연히 살인을 즐기는 살인마 역시 아니었다. 그저 강자와 겨루기 좋아하는 무광(武狂)일 뿐이었다.
사파고수가 아니라도 무림인이라면 피의 길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원치 않았다고 해도 검이 피를 부르는 곳이 바로 무림이니까.
그 외에 위지천은 존경할 만한 무인이었기에 겪어보면 종리우의 편견도 바뀔 거라 생각했다.
“너도 형님을 편견 없이 봐줬으면 좋겠구나.”
“예. 형님.”
견문이 좁은 이현호로서는 맹검 위지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정파인인 한승의 제자였기에 사파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친형이 의형으로 삼은 인물인 만큼 편견 없이 바라볼 생각이었다.
“하하. 분위기가 너무 딱딱한데, 한잔하며 회포를 풀게나.”
“좋은 생각입니다. 형님.”
그들은 긴 밤, 술잔을 기울이며 십여 년의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 해가 환하게 뜰 때까지.
“도대체 누굽니까! 누구였기에 형님을…! 우리 가족들을……!”
두 사람은 밤새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난 십여 년간의 시간을 이야기하기에 하룻밤으로는 부족했다.
그렇다 해도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이현호는 가족들을 죽인 자들이 이현성을 데려간 자들의 하수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많이 분개했다.
그런 동생을 보며 이현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내 몫이다. 그러니 넌 알 필요 없다.”
“형님!”
형의 말을 거역해본 적 없는 이현호였다.
그런 그가 지금 처음으로 형의 말을 거역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이현성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호하게 말했다.
“이 형이 못 미더우냐? 아니면 우스운 거냐!”
“그게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형님…….”
이현성의 호통에 이현호는 찔끔하며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현호는 속이 많이 상했는지 울먹거렸다.
“저도… 저도… 가족이잖습니까. 저도 형님을 도와서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너도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지. 하지만 넌 복수할 능력이 없다.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이현성의 말은 비수가 되어 이현호의 가슴에 꽂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열일곱의 나이로 일류고수가 된 것은 명문의 후기지수와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는 성장속도였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