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못난 것… 제 오라비는 정략결혼을 시키게 만들면서 저 자신은 싫다 하다니…….’
아들보다 더 믿고 의지했던 딸의 투정은 제갈인섭에게 무척이나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괘씸했다.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기에 지봉이라 불리는 딸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럴 만한 사내이길 바란다. 더 이상 이 애비가 실망하지 않도록…….’
* * *
“돌아가시는 길 평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마마.”
드디어 낙양과 개봉에서 온 고수들이 도착했다.
그들의 합류로 환궁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들의 합류로 인원이 수십여 명으로 늘었으나 낙양 여씨상회의 상행으로 위장했기에 주변의 의심을 살 일은 없어 보였다.
“고마워요, 이 대협. 그리고 약조한 것…….”
“잊지 않았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때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이현성의 확답에 주가려는 만족스러운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근엄한 장공주 주가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와 가벼운 이별인사를 나눈 이현성에게 환궁 책임자이자, 태가장의 전(前) 장주인 태천광이 다가왔다.
“가솔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대협.”
“걱정 마십시오. 이젠 제 식솔들이기도 하니, 책임지고 돌보겠습니다. 장주님… 아니, 태 대인.”
태천광은 책임감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놔두고 가는 가솔들이 눈에 밟혔다.
현재 정황상 동행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원한다면 표국 등을 이용해서 황도로 데려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낯선 황도 대신 잔류를 선택했다. 태천광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준 셈이었다.
재미있게도 이제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이현성이 객이었는데, 이젠 태천광이 객이 되었다.
“그럼…….”
그렇게 주가려를 호위한 병력들은 비밀통로를 통해 태가장을 벗어났다.
배웅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현성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저들을 믿어도 되려나?’
생각보다 잔류한 인원이 많았다.
그 수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 태가장의 고용인은 오십 명이었다.
아무리 병력이 이백이나 된다고 해도 과하다 할 수 있었다.
허나 이는 순직한 군사들의 가족들을 책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 일부는 태가장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맡고 있으니 과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고용인이 오십 명을 포함한 잔류인원이 일백여 명이나 되었다.
백오십 명의 경비무사(군사)들 중 백 명만 각 위소에 복직했기 때문이다.
즉, 나머지 오십여 명은 잔류를 희망했다.
이현성은 태천광의 청도 있었기에 그들을 그대로 경비무사로 고용했다.
장원을 지킬 병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였다.
태천광의 명령으로 잔류한 이들 역시 존재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들 전원이 감시자는 아닐 거야. 여차하면 정리해야지.’
이현성은 필요하다면 감시자를 색출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만들 생각이었다.
회귀 전, 정통파 살수인 혈영살객이었던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걷다 보니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오십여 명의 경비무사들이 기립하고 있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장원의 주인이 바뀐 이상 체제 역시 바뀌어야 했다.
지금까진 퇴역했으나 비공식적으로 금군이었다.
허나 이젠 아니었다.
자신들의 새로운 주인이 어떤 변화를 줄지 알 수 없기에 기대와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선 이현성은 입을 열었다.
“모두 만나서 반갑네. 태가장… 아니, 장원의 장주가 된 이현성이네.”
나직하게 말했으나 모두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공을 이용해 목소리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경비무사들은 젊은 장주를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그가 어마어마한 고수란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실제로 홀로 오십 무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이 비록 일류지경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도 강도 높은 훈련과 실전을 겪은 정예 군사들이었다.
따라서 이현성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자네들 중에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잔류한 자도 있고, 군사(軍士)가 아닌 새로운 미래를 원하는 자도 있을 것이네. 물론 다른 이유가 있는 자들도 있을 테고…….”
이현성은 돌려서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밀명을 받고 잔류한 자들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라만상을 익힌 이현성의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허나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이유가 어쨌든 이제 나의 식구가 되었고, 장원의 일원이 된 이상 그대들은 내가 책임지겠다. 허나… 내 신뢰를 저버린다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난 그리 무른 사람이 아님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특별히 살기를 뿜을 필요도 없었다.
풍기는 기세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닌 진심을 담은 경고란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좌중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들 중 최선임이 누군가?”
“…제가 최선임입니다. 장주님.”
이현성의 물음에 한 중년인이 손을 들었다.
옆집 아저씨와 같은 평범한 인상과 달리 무척 단단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차선임은?”
“접니다. 장주님.”
“저 역시…….”
세 사내가 더 손을 들었다.
최선임이란 중년 사내보단 어려 보였지만 나이 차는 많아 보이지 않는 중년인들이었다.
“자네들만 날 따라오고, 나머지는 대기하라.”
“명!”
이현성은 그들만 대동한 채, 장주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이 주인이었으나 이젠 이현성 그의 집무실이 된 곳이었다.
자리에 앉은 이현성은 그들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앉게.”
이현성의 지시에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긴장하긴 했으나 그래도 다른 군사들보단 여유가 있어 보였다.
경험의 차이였다.
“나에 대해선 대충 알 테고, 자네들에 대해서 소개해주게.”
“저는 여남 태생인 허정이라 합니다. 금의위 예하 금위군 제 3천호소 제 1백호소의 총기(總旗)였으며, 태가장의 경비대 제 2부대장을 맡았습니다.”
“저는……”
다들 태생과 근무지는 다르나 이십 년 이상 군복무를 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리고 각 백호소에서 오십 명을 관리한 총기 출신이기도 했다.
특히 허정은 금위군 출신답게 다른 셋과 달리 태가장 경비대의 부대장직도 수행했다.
금위군의 무공만으로 일류지경에 오른 인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군. 자네들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내가 편제를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이네. 허정, 자네에게 경비대장을 맡기고, 나머지 셋을 부대장으로 임명하지. 나머지는 자네들 넷이 상의해서 편성하고, 추후 보고하게.”
“감사합니다! 장주님.”
“허나 언제든 변동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게.”
그들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경력만 믿고 맡겼다.
만약 기대에 못 미친다면 언제든 강등하고 새로운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단 경고였다.
그들은 이현성이 어리지만 제법 사람을 부려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그들 넷이 경비대를 관리 감독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우선은 믿기로 했다.
네 사람은 경비대의 새로운 편성을 하기 위해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후… 나머지 식솔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어야겠군.”
* * *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호현아.”
이현성이 가솔들을 직접 만나 다독거리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을 때, 두 사내가 정주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북경 문가장에 방문했던 이현호와 종리우였다.
이현호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문가장에 있었다는 이현성이 제 형인지를 확인하지 못해서였다.
하필이면 도착하기 전에 떠났다고 했다. 또한 행선지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천중산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숙부님. 형님은 무사하실 것이고, 언젠가 만나 뵐 수 있겠지요.”
이현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숙부인 종리우로서도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마음으로 응원해줄 뿐이었다.
“급할 것도 없으니 오늘은 정주에서 하루 묵고 가자구나.”
“…알겠습니다. 숙부님.”
그렇게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해결하기 위해 가까운 객잔으로 향했다.
고급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허름하지도 않은 객잔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가격대비 제법 괜찮은 객잔이란 뜻이었다.
“저희 태가객잔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님들. 묵고 가실 예정이십니까, 아니면 식사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묵고 갈걸세. 방이 있는가?”
“다행히 방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안내해주게. 식사는 짐을 푼 후에 하겠네.”
“네!”
점소이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객실로 향했다. 객실은 생각보다 깔끔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짐을 푼 후 내려오니 점소이가 잽싸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리를 안내했다.
“이곳에서 가장 자신 있는 요리 서너 개와 곁들일 수 있는 술 한 병 가져오너라. 그리고 이건 수고비다.”
“가, 감사합니다!”
점소이의 싹싹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종리우는 철전 10개를 쥐어주었다.
그러자 점소이는 무척이나 좋아하며 뛰어갔다.
철전 10개가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수고비로서 적은 돈도 아니었다.
특히 점소이의 입장에선 횡재한 셈이었다.
역시 수고비를 찔러준 덕분인지, 요리가 빨리 나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오냐. 그리고 호현아, 한잔 받거라.”
“예. 숙부님.”
이현호는 그전까지 술을 마실 줄 몰랐다.
수련에 빠져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가장에서 처음 마셔본 술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돌아오는 길에 몇 번 더 접하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이제는 곧잘 마시게 되었다.
객잔의 요리가 생각보다 괜찮았고, 술도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금세 한 병을 비우게 되었다.
“더 하겠느냐?”
“한 병은 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녀석, 술꾼이 다 됐군. …여기 한 병 더 가져와라.”
“예! 대협!”
한 병이 두 병 되고, 두 병이 세 병 되었다. 덕분에 살짝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이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종리우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때 이현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종리우는 깜짝 놀랐다.
“혀… 형님… 형님!!”
형제
“앞으로도 포목점을 잘 관리해주게.”
“가, 감사합니다. 장주님!”
경비대에 관해서는 새롭게 경비대장과 부대장으로 임명한 네 사람에 맡기고, 이현성은 나머지 식솔들을 직접 만나봤다.
식솔들은 설마 새로운 장주가 직접 자신들을 찾아와 인사할 줄은 몰랐기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와 동시에 이현성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사실 그들로서는 고용주인 장주가 바뀌면서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다가와 주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걸 알기에 이현성은 그들을 직접 만나보고 있었다.
물론 장원의 상황도 파악할 겸 만난 거였다.
장원 내를 다 돌자, 외부에 있는 태가장의 사업장들을 찾아갔다.
태가장은 대장간과 마장(馬場), 포목점 그리고 객잔을 운영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