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 때문에 지금까지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천사존에게 두 눈과 가족을 잃은 자신과 혈천에서 미래와 가족을 잃은 이현성.
유대감을 형성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도망치는 것을 성공했다면 살았겠지만… 아니라면…….”
“힘내게. 자넨 최소한 가족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은가.”
“형님…….”
그의 말이 맞다.
위지천과 달리 이현성의 가족들은 아직 죽음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더더욱 세력을 키워야 하네. 허나 나 때문에 자네까지 사파인으로 몰릴 수도 있네. 그럼 그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
“다행히 정파와 연이 있기에 대놓고 공격하진 못할 겁니다. 그리고 사파가 아닌 정사지간을 표방하면 되고요.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사파를 버려도…….”
이현성으로서는 사천당가 등이 걱정되었으나 하북팽가의 도왕과 소림의 성승과 좋은 연을 맺었기에 배척당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상관없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실 위지천은 위지세가라는 사파무림에서 나름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천사존에 의해 풍비박살을 당한 가문이었다.
이제 유일한 위지세가의 후손으로서 그는 사파무림에 미련이 없었다.
“그럼 장주께는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말하겠습니다.”
* * *
“이 대협께서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마마.”
태천광은 주가려에게 태가장의 양도에 대해서 보고했다. 그의 보고에 주가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장주.”
“수고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마마.”
“장원을 그에게 양도한 것이 못마땅한가?”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굳이 장원을 그에게 양도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사실 태가장을 이현성에게 양도하라고 지시한 것은 주가려였다. 태천광과 태가장의 고수들이 복권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굳이 장원을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추후 대체 인물을 파견해서 새로운 장원으로 재단장 시키면 된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장원이었지만 제법 잘 만들어진 장원이었다.
장원 내 여러 전각들의 위치는 적의 습격에 대한 방어에 용이하게 배치되었고, 유사시 빠르게 도주할 수 있는 비밀 통로 역시 존재했다.
그 외에도 여러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태천광은 그런 태가장의 책임자로서 이곳을 수년간 관리해왔다. 때문에 장공주를 구한 이현성의 공이 크나 굳이 장원을 양도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가 비록 황실사람이 되라는 나의 청을 거부했으나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일세.”
“그렇긴 하나…….”
분명 초절정고수의 존재는 희귀하며 그 가치는 대단했다. 백만금군을 보유한 황제였지만, 초절정고수는 수십에 불과했다.
그들 대부분이 북부와 동부군을 지휘하고 있고, 나머지는 황실고수(금의위, 동창, 도찰원, 구문제독부)로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황제만을 위해 움직이는 초절정고수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소속이 따로 없는 이현성의 존재는 무척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에게 투자한 것은 지금이 아닌 미래의 그일세. 지금도 그 정도인데, 십 년 후 그리고 이십 년 후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기왕 투자를 할 거라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낫네. 어설픈 투자는 안 하는 것만도 못하니…….”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구합니다. 마마.”
비록 주가려를 구한 보상이란 명목 하에 장원을 양도했으나, 어느 정도 마음의 빚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예비 절대자에게 마음의 빚을 지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공을 들였다고 해도 결국 장원에 불과했다.
그런 장원 하나로 그의 도움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면 결코 비싼 투자는 아니었다.
최소한 주가려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황상께선 무림맹을 이곳 정주가 아닌 허창으로 생각하고 계시네.”
“무림맹을 허창에 말입니까? 어찌하여 허창에…….”
과거 무림맹이 정주에 세워진 것은 황제가 정주 외곽에 부지를 내어주어서였다. 물론 황제의 이름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부지는 내주었다.
무림맹 결성이 황제의 의도라는 것이 드러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가 바뀌었다.
정주가 아닌 허창으로 바뀌었다.
“황상의 높은 뜻을 본녀가 알 수 있겠나. 다 뜻이 있으시겠지.”
“아… 소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정주만 못 하지만, 허창 역시 상당히 큰 현(縣)이었다.
하남성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현이니 무림맹을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아직 몰랐다. 이 모든 것이 황제의 큰 그림 안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그보다 환궁 준비는 어찌되고 있는가?”
“예. 중요한 문서를 파기하고, 흔적은 모두 지운 상태입니다. 낙양과 개봉의 지원이 도착하는 즉시 떠날 예정입니다.”
소림의 고수들이 돌아갔음에도 주가려의 환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황실요상약과 운기행공 덕분에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태가장과 황실의 연결고리를 지워야 하고, 그녀를 호위할 고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암행은 기밀 사항인 만큼 환궁 역시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홀히 준비할 순 없었다.
다수의 군을 파견할 수 없는 대신 소수 정예로 호위대를 구성해야 했다.
문제는 정주안가… 아니, 그 배후세력으로 인해 태가장의 고수 전력을 태반이나 잃었다는 점이었다.
소림의 공암대사가 합류했지만, 어느 정도 격은 갖춰야 한다. 그 때문에 낙양 여씨상회와 개봉 백송학관에서 고수 일부를 보냈다.
여씨상회와 백송학관은 태가장처럼 낙양과 개봉에 세워진 황실의 비밀안가이자 비밀거점이었다. 그들이 태가장에 도착할 때까지 환궁은 잠시 유보된 셈이었다.
“알겠네. 황실에 돌아가서도 잘 부탁하네.”
“죽는 그날까지… 성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마마.”
* * *
“아버님. 개방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개방은 천하 3대 정보 집단답게 정보수집 및 분석능력은 물론 서신을 전달하는 방법 역시 뛰어났다.
덕분에 방주가 보낸 서신이 빠르게 구파와 오대세가에 전달되었다. 제갈세가는 개방 총타가 위치한 개봉에서 가까운 덕분에 비교적 더 빨리 서신을 받을 수 있었다.
제갈세가주인 제갈인섭은 서신을 받자마자 부친에게 갔다. 장로들과 상의하기 전에 태상가주인 부친께 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연관된 서신이더냐?”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산 제갈윤호는 아들이자 가주인 제갈인섭이 건네준 서신을 펼쳤다. 개방의 용두방주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그런데 제갈윤호는 생각보다 반응이 크지 않았다.
“역시 무림맹 결성을 하려는가 보구나.”
“예. 한두 곳이 아닌 천하에 걸친 사건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정파무림의 힘을 모아야겠지요.”
“문제는 그 뒤에 황실의 힘이 작용했다는 건데…….”
놀랍게도 제갈윤호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괜히 신산(神算)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방대한 정보망에서는 3대 정보 집단에 못 미치지만 제갈세가의 정보력도 보통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갈세가는 3대 정보 집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정보분석 능력이었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그 속에 담긴 정보만 아니라 그 너머에 숨겨진 정보까지 간파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의 지자 가문인 제갈세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제갈인섭이었지만, 혈족 중심인 세가답게 정점은 제갈윤호였다.
그는 천하에서 벌이지는 이상 징후는 물론 무림맹 결성, 황실의 은밀한 움직임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황실의 수작은 아니니, 문제될 것은 없지.”
무림을 노린 황실의 수작이라면 그 역시 감안해서 계획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황실 역시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굳이 황실을 견제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무림맹 결성은 무림과 황실 모두를 위한 조치일 테니까.
“회담이 소림에서 이루어진다고?”
“죄송합니다. 아버님. 먼 길을 다녀오시게 해드려서…….”
“아니다. 나보다 훨씬 먼 길을 오시는 분들도 계시거늘… 어찌 이 정도로 불만을 갖겠느냐.”
무림맹 결성을 앞두고 소림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회담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논의를 가문의 수장인 제갈인섭이 아닌 은퇴한 제갈윤호가 맡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 권력이양을 통한 세대교체를 한 무림세가들과 달리 구파일방은 아직 전대 인물들이 각파를 책임지고 있었다.
물론 구파일방 중에서도 세대교체를 이룬 곳이 있으며, 나머지 문파들 역시 그럴 예정이었다.
허나 아직은 전대 인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과 동시대에 활동해온 제갈윤호가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세가만 아니라 나머지 세가들 역시 다르지 않을 예정이었다.
“현도 그 아이도 채비를 시키거라. 간 김에 검왕 늙은이와 혼약을 마무리 지을 테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님.”
지봉(智鳳) 제갈현지의 의도대로 제갈인섭은 남궁세가로 매파를 보낸 상황이었다.
그녀의 오라버니이자 소가주인 제갈현도의 혼사를 위해서였다. 그의 입장에서도 검화(劍花) 남궁설지라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최적의 상대였다. 남궁세가 입장에서도 같은 오대세가인 제갈세가의 소가주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구룡이 아님은 아쉬울 것이다.
허나 제갈세가와의 혈맹은 결코 그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좋은 분위기였지만 아직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림이 어수선하긴 했으나 오히려 이럴 때 혼사를 통한 혈맹을 맺어두는 게 중요했다.
천하가 혼란해진다면 서로의 힘이 더 절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아는 여전하더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제갈인섭은 제갈현지의 뜻대로 북경 문가장으로 매파를 보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현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떠났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천하의 분위기가 더욱 심상치 않아졌다.
산동성 태산의 일은 제갈세가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오대세가의 일원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무력이 약한 제갈세가였다.
때문에 한 곳이라도 더 혈맹을 맺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사라진 이현성 대신 하북팽가의 도룡 팽천악과 연결해주려고 했다. 태산혈사 이후 주춤한 황보세가보다 하북팽가가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사전에 눈치챈 제갈현지가 단식투쟁을 하며 결사반대를 했다. 덕분에 하북팽가에 매파를 보내려는 움직임은 무산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아무리 가문을 위함이지만, 강제로 손녀를 떠넘길 순 없지. 그 정도로 본가가 약한 것도 아니고…….”
“…….”
제갈인섭은 면목이 없는지 얼굴을 들지 못했다.
가주의 여식으로서 많은 권리를 누린 만큼 가문을 위해 보답할 때였다.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단식투쟁을 할 정도로 결사반대를 하니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