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위지천 역시 태가장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몰랐으면 몰라도 황실에 연관된 장원임을 알게 된 이상 태가장에서 지낼 수 없었다.
정파보다 더 위선을 떨고, 사파보다 더 비열한 곳이 바로 황실이었다.
하남성에 온 이유는 소림과 개방의 그늘에 숨어서 천사교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천사교보다 더 골치 아픈 황실과 엮이는 것은 피하고자 했다.
“혹시 생각나는 곳이 있으십니까?”
“힘을 키울 생각이라면 감숙, 귀주, 복건, 광동 등이 좋지만…….”
위지천이 언급한 성(省)은 거대한 세력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었다.
감숙성의 경우는 구파일방인 공동파가 있으나, 그들과 영역다툼을 피해서 충분히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 외의 성이라면 초절정고수 둘을 감당할 수 있는 무림세력이 없었다. 특히 감숙을 제외하고는 사파의 색이 짙은 성이기도 했다.
“사파사세의 견제를 염두에 둬야겠지요.”
“그게 문제지.”
감숙성은 사해련(四海聯)이 있는 청해성과 맞닿았고, 귀주성은 지옥성(地獄城)의 운남성, 광동성은 천웅방(天雄幇)의 호남성, 복건성은 천사교(天邪敎)의 절강성과 인접했다.
특히 천사교, 천웅방 그리고 사천당가와 악연을 맺은 이현성의 입장에선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산서밖에 없는 것 같네요.”
“산서라… 하긴 항산을 제외하면 문제될 만한 곳은 없으니까.”
산서를 대표하는 문파는 항산파였다. 구파일방 중 아미파와 비견되는 비구니 문파이기도 했다.
허나 항산파의 성세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산서성을 대표하는 대문파였다.
그러나 항산파와 분쟁만 피한다면 현재 상황에서 산서만한 지역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다음 목적지를 산서로 정했다.
그리고 세부적인 의견을 나누려고 할 때였다.
“음?”
“자넬 찾아온 것 같군.”
별채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태가장 사람이 별채로 오는 경우는 이현성을 만나기 위함이 대부분이었다.
위지천은 태가장과 특별한 교류가 없었다. 아니, 주가려가 위지천에게도 접촉했다. 사파고수였지만 황실로 전향한다면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허나 그는 이현성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아니, 천사교를 무너트릴 수 있게 도와준다면 황실에 투신하겠단 조건을 걸었다.
황실 역시 협조적이지 않은 천사교가 눈엣가시와 같았으나, 그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군대를 투입할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입을 피해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천사교를 위시한 사파사세의 존재가 정파무림을 견제해줘야 그들이 황실에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황실 입장에선 정파나 사파나 똑같은 무림이었다.
말을 잘 듣는 쪽에 손을 들어줄 뿐이었다.
이현성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한아.”
“아… 선생님, 거기 계셨군요. 장주님께서 잠시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곧 갈 테니 그리 전하거라.”
“예. 선생님!”
방문자는 태가장의 시동이자 이현성에게 지도를 받는 진한이었다. 태천광 장주의 심부름으로 왔던 것이다.
어차피 이현성 역시 그에게 용무가 있었다.
장원을 떠나는 것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풍운심법(기공)을 아직 전하지 않았구나. 떠나기 전에 전해줘야겠다.’
개량한 풍운심법을 아직 아이들에게 전하지 않은 것을 잊고 있었다.
글도 익히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내공구결을 전수해봤자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가르쳐줄 시간이 없어서 저술한 심법서만 전할 생각이었다.
그리하면 나중에라도 아이들이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불러놓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 대협.”
“괜찮습니다. 그런데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올까요?”
무슨 일이 있는지 장주의 거처가 어수선했다.
그것만 봐도 무슨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그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현성으로서는 태천광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그를 보며 태천광이 나직하게 말했다.
“조만간 마마께서 환궁(還宮)하실 예정입니다.”
“예…….”
“그때 저와 본장의 고수들이 동행할 예정입니다.”
“그러시군요.”
이현성은 그의 말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가려가 용무를 마쳤다면 황실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녀의 호위를 위해 태가장 고수들이 동행하는 것 역시 특별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것을 왜 자신에게 이야기하는지는 궁금했다.
“저는 잠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복권되어서 이제 황도에 있을 예정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곳 태가장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였다. 태가장의 가솔들 모두를 대동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기에 물을 수는 없었다. 다만 아이들이 신경 쓰였다.
“감사합니다. 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본장을 이 대협께서 맡아주십시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뜬금없는 태천광의 말에 이현성은 당황했다.
그의 제안이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황실과 엮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본장은 상부의 명으로 세운 장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본장의 고수들이 대거 죽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본장이 이미 노출된 상황이라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철수명령이 떨어진 것이지요.”
“…….”
태가장의 정체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다만 철수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황실이라면 손실된 병력쯤은 얼마든지 채울 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태가장의 존재가 노출된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장원을 정리하고 가솔들 모두를 데려가야 하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고수들의 경우는 대동하고, 경비무사(軍士)들의 경우는 하남성 각 위소(衛所)에 복직시키면 됩니다만, 나머지 고용인인 가솔들은… 그러던 차에 상부에서 이 대협께서 마마를 구해주신 것을 알고, 태가장의 권리를 양도하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
“원치 않으시면 장원을 파셔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잔류한 가솔들의 생계가…….”
태가장의 고용인들은 순직한 군사들의 가족들로,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방편으로 고용한 이들이었다.
물론 외부인을 고용하는 것보다 비밀을 유지하기도 용의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남편이나 아들을 잃은 그들로서는 고향을 떠나 낯선 황도에서 지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잔류하게 된다면 생계가 막막했다. 만약 누군가가 고용해준다면 그들은 잔류하고 싶어 했다.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저희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최대한 빠른 결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산서로 떠나려고 했던 이현성이었다. 떠나려한 이유는 더 이상 황실과 엮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만약 태천광의 말처럼 그들이 철수하고 장원만 남게 된다면 상황이 바뀌어버린다.
허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동역자인 위지천의 의견도 들어봐야 했다.
장주에게 말미를 얻은 이현성은 바로 위지천에게 갔다.
“장원을 양도하겠다고? 으음… 황실과 엮이지만 않는다면야…….”
이현성은 위지천에게 태천광의 말을 전해주었다.
위지천의 입장에서도 황실만 아니라면 굳이 떠날 필요까진 없었다.
정파의 세력권이었지만, 낙양과 개봉에 비해 정주는 정파의 색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남이라면 천사교가 쉽게 움직이지 못할 테니, 힘을 기르기에 나쁜 입지조건도 아니었다.
물론 사파의 색이 강한 지역처럼 무작정 힘으로 세력을 넓히긴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저 역시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역시 동감일세.”
다행히 위지천 역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때 이현성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몇 년 후에 무림맹이 세워지잖아! 그럼… 비화공주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이현성이 정주로 온 이유 중 하나가 무림맹이 세워질 곳이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그늘이 되어줄 수 있고, 여차하면 무림맹에 투신할 생각이었다.
무림맹은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혈천도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걸 혈천 역시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허나 외부의 공격은 강하지만, 내부의 분열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게 정파무림의 연합체인 무림맹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내부를 단속하기 위해 무림맹으로의 투신 역시 고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위지천이었다.
‘형님의 검에 죽은 정파고수가 한둘이 아니라서 함께 무림맹에 투신하는 것은 불가능해.’
무림맹에 투신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과거에는 천사교라는 그늘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기에 위지천에게 복수하려는 정파무리가 있을 것이다.
무림맹에서 그들과 동조한다면 여간 귀찮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뭔가?”
“어쩌면 이곳 정주에 무림맹이 결성될지도 모릅니다.”
“뭐! 무림맹이?! 확실한가!”
위지천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미래를 알고 있는 이현성과 달리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위지천으로서는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고 회귀 전에 무림맹이 창설되었다고 설명할 순 없었다. 때문에 사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황실 대표와 무림 대표가 은밀하게 회동을 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과장된 생각 아닌가? 황실 입장에서도 무림맹은 부담스러운 초거대 세력일 텐데? 무림 입장에서도 무림맹을 결성할 명분도 없고.”
겉으로 보기에는 위지천의 말이 맞다.
허나 그 속을 본다면 달랐다.
“저희가 태산에서 만난 무리를 기억하십니까?”
“아… 기억하네.”
“그들이 어떤 세력의 예하 집단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사실인가!”
조심스러운 부분이었지만, 이현성은 그에게 혈천의 존재를 밝힐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천의 존재를 숨기고는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현성은 자신이 어린 시절 팔려갔고, 알고 보니 그곳이 살수 양성소였단 것부터 설명했다. 허나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거짓도 섞었다.
그것만으로는 혈천의 실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일개 살수집단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교관들의 대화를 엿들었고, 거대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거짓말이었지만 자신이 회귀했던 사실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들켜서 폐기처분 당했으나 운이 좋게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강해지려는 이유는 그들이 존재하는 이상 언젠가 또 그들에게 위협당할 수 있단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 그런 세력이 있을 줄이야……. 그럼 자네 가족들은…….”
위지천은 자신이 제일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이현성의 이야기를 들으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