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가 혁련세가의 가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상가주인 혁련중광의 아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혁련세가에서 손꼽히는 강자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기묘한 계략과 빠른 추진력 그리고 뛰어난 임기응변이야말로 혁련세가의 가주가 된 주된 이유였다.
그런 그답게 무림맹 결성을 저지 못한 큰 실책을 범했음에도 당황하는 대신 수습책과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어차피 만약을 대비해 키운 장기짝은 얼마든지 더 있으니까.”
안제명과 정주안가를 대신할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기에 혁련용후는 새로운 장기짝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잘만 하면 오히려 무림맹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지.”
장공주인 주가려와 성승이 만난 이상 무림맹 결성은 정해진 상황이었다.
정파무림의 연합체인 무림맹은 강력한 힘 아래 질서가 세워진 것이 아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등 거대한 세력들이 서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실랑이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언젠가 안정을 찾겠지만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혁련용후는 그 틈을 이용해 새로운 장기짝들을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럼 위기는 기회로 바뀌게 된다.
“그보다 태가장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그들이 동행하고 있을 줄이야.”
실패한 계획 대신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내는 혁련용후였다. 때문에 실패한 요인을 분석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결과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태가장에 신세를 지게 된 식객들.
그들이 계획 실패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안제명이 그들에 대한 보고를 생략했기에 혁련용후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덕분에 뒤늦게 알아보려 했지만,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태가장의 고용인들은 일을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시동, 시녀, 하인 등 전원이 태가장 무사들의 가족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태가장 내에 간자를 심을 수 없어서 정보를 수집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안제명이 이현성과 위지천에 대한 보고를 하지 못한 것은 딴마음을 먹어서가 아니라 그만한 정보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제명과 혁련용후가 같을 리는 없었다.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이현성과 위지천에 대해서 결국 알게 되었다.
“천사교를 물 먹인 녀석이라… 좋아. 사존(邪尊)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
일을 방해한 이현성과 위지천을 그냥 넘어갈 혁련용후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더럽힐 생각도 없었다.
다행히 너무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천사교에 흘리는 것이다.
죽었다고 알려진 천사교의 호교사자 맹검이 이현성과 함께 하남에 나타났다?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천사교주가 웃고 넘어갈 리 없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차도살인(借刀殺人).
혁련용후가 무척 좋아하는 계책이었다.
이런 혁련용후의 생각을 모른 채 이현성은 감탄하고 있었다.
* * *
‘역시 소림이구나.’
자신이 느낀 강인하면서 단단한 기운이 소림고수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느낀 기운은 료굉대사가 아닌 범천대사의 기운이었다.
료굉대사의 기운이 범천대사의 기운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료굉대사는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조차 넘어섰기에 그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소림이라… 얼마나 강하려나.’
그는 소림고수(범천대사)를 상대로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천년소림, 중원무학의 뿌리, 정파무림의 정신적인 지주.
이 모든 것이 소림을 일컫는 말들이었다.
그런 소림의 고수가 지척에 있으니 호승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질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만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이현성, 그는 무척 강했다.
‘안 되겠지. 소림고수와 무(武)를 나누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현성 역시 무광이며, 무학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살수(혈영살객)였던 습성 때문에 호승심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통해서 더욱 성장했기에, 살수의 습성보다 무인의 습성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허나 그보다 더 호승심을 느낀 자가 있었다.
“소림인가.”
“형님, 오셨습니까? …그렇겠지요.”
별채의 또 다른 객실을 사용하는 위지천이 이현성을 찾아왔다. 그 역시 소림고수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초감각을 익힌 위지천이었다. 따라서 그의 기감 또한 이현성 못지않으니 기운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원수인 천사존(天邪尊)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위지천의 무(武)에 대한 집착은 이현성 이상이었다.
그런 그가 사마공(邪魔功)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정종무학의 본산 소림의 고수를 느꼈는데 호승심을 불태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쉽군. 상대해보고 싶은데…….”
“어렵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천사교의 호교사자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파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소림고수에게 비무를 청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게다가 지금은 신분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아쉽지만 그의 바램은 이룰 수 없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기운을 숨기고 있었기에 소림고수는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허나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아니, 범천대사가 두 사람을 느끼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존재를 느낀 소림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선생님.”
“한이구나. 무슨 일이니?”
찾아온 소년은 태가장의 시동 중 한 명이자, 이현성에게 가장 처음 지도를 받은 진한이었다. 태가장의 시동 중에서도 이현성을 가장 따르는 아이였다.
“아가씨께서 소개시켜드릴 분이 계시다고, 괜찮으시다면 와주실 수 있냐고 하셨어요.”
“소저께서? 으음… 형님 같이 가시지요.”
―나는 되었다. 괜히 곤란해질 수 있으니…….
―형님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현재 장원에서 시동들이 아가씨라고 부를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바로 주가려였다.
그리고 그녀가 소개해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소림고수의 기운이 그녀가 머물고 있는 전각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에 이현성은 위지천에게 동행을 권했다.
하지만 그는 살짝 고민했다.
대면한다면 자신에 대해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미 아미파의 혜원사태 역시 눈치챈 듯싶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인지 내색은 하지 않았다.
허나 소림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주저되었다.
장공주인 주가려의 신분을 생각하면 소림고수라도 대놓고 적대시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위지천의 뜻이 그러하니 굳이 강권하지는 않았다.
“곧 가겠다고 전해드려라. 한아.”
“예! 선생님!”
진한은 이현성의 대답에 밝게 웃으며 돌아갔다.
이현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림고수라… 기대되는군.’
“……!!”
주가려의 초대를 받고 온 이현성은 당황을 넘어서 혼란스러웠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바로 눈앞의 노승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승이 자신에게 위협을 가해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노승이 대적불가(對敵不可)의 존재라는 사실을.
‘누, 누구란 말인가! 팽 조부께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그가 만나본 최고의 고수는 도왕(刀王) 팽진천이었다.
정파무림의 최고수, 십정(十正)의 도왕인 그도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는…’이란 호승심을 불타게 만들었다.
그러나 눈앞의 노승은 그런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서, 설마… 반야신승!!’
소림삼신승의 수좌이자 소림방장.
그리고 도왕과 함께 십정 중 오왕의 일인.
반야신승(般若神僧) 공심.
이현성은 눈앞의 고승이 그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암중에 숨어 있는 소림고수들도 이해가 되었다.
소림방장이라면 당연히 암중에 호위하는 무승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는 이현성을 보며 주가려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대협,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개시켜드릴 분이 계셔서…….”
“괜찮습니다. 마마…….”
“……!!”
주가려는 그에겐 신분을 숨기고 있었기에 말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현성이 마마란 경칭을 부르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신분을 이미 알아차렸단 의미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현성 역시 모른 척하고 있었으나 노승의 존재에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마마라 부르고 말았다.
“본녀가 누구인지…아는가?”
“…!! …장공주님 중 한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마.”
그제야 이현성은 자신답지 않은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솔직하게 예상하고 있음을 밝혔다.
주가려는 한숨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어그러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 다신 소개하지. 자네 생각처럼 장공주인 주가려라고 하네.”
‘비화공주(秘花公主)!’
이현성은 그제야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선황(先皇)은 많은 황자와 공주를 생산했다.
그중 제일 총애 받은 자가 장남이었던 현 황제였다.
보통 권력이 바뀌면 혹시 모를 잡음을 없애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게 된다.
황제의 형제들은 조용히 역사에서 사라지거나 헛된 꿈을 꿀 수 없게끔 만든다.
그에 반해 누이들은 황권의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현 황제는 역대 황제들처럼 가혹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숙부인 한왕의 난을 진압하면서 황권을 공고하게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대 황제의 형제, 누이들은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는 선에서 영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황족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비화공주 주가려는 오히려 그렇지 못한 쪽이었다.
선황의 총애를 받은 공주이며, 현 황제와도 관계가 좋았던 그녀다. 하지만 평생 황실의 담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자신의 궁에서 갇혀 살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비화공주(秘花公主) 혹은 비화공주(悲花公主)라고 불렀다.
‘내가… 아니, 세상이 모르는 것이 있나보구나.’
세상에 알려진 것과 같다면 그녀가 황실이 아닌 이곳에 있는 이유도, 신분과 어울리지 않은 무공도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은 그녀보다 더 신경 쓰이는 자가 있었다.
“나와는 따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네. 그보다 지금은 이분께서 자넬 보고 싶어 하셔서 불렀네.”
“아미타불… 빈승이 이 대협을 보고 싶어서 마마께 청했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현성은 주가려의 입에서 ‘이분’이란 말이 나오자 눈이 커졌다.
황족. 그것도 황제의 누이가 이분이라 칭할 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이현성은 눈앞의 노승을 더욱 더 소림방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협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말학(末學)일 뿐입니다. 말씀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이현성은 스스로 대협이라 불러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의 신위에 놀라 어린 청년임에도 대협이라고 칭했을 뿐이었다.
다만 일일이 호칭의 수정을 청할 수 없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천하의 소림방장(?)에게 대협이라 불리니 당황해서 얼른 스스로를 낮추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