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안제명, 그는 알았을까? 애초부터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혁련세가에 대해 알려주지 않고, 혁 대인이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기의 인마(人馬)가 달려왔다.
“이런! 주변을 수색해라!”
“충!”
뒤늦게 안제명이 도주한 사실을 알게 된 정천호는 기마병들을 사방으로 보내서 추적했다. 허나 늦었는지 뒤쫓았던 안제명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기마병들은 주변을 수색했다. 혹시 안제명의 입을 막은 자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돌아간다!”
구룡검주
“살수집단인 무영살(無影殺)이 괴멸되었으며, 정주안가의 가솔들을 구속 및 조사 중입니다. 이외에도 무영살의 명부를 토대로 추가 조사 역시 진행될 거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만… 청부자로 추정된 정주안가의 안제명이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천호소의 군사들이 움직인 것은 명목상 승선포정사사(丞宣布正使司) 예하 병조(兵曹)에서 하달된 명령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태천광에 의해 움직인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낙향한 전직 고관이었지만, 실제로 초법적인 권한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제명이란 자가 흑막일 리는 없고… 배후가 있다고 봐도 되겠지. 장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마마. 다만 연결고리인 안제명의 피살로 배후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그자의 입을 막았겠지.”
마음 같아서는 최고의 첩보기관인 동창을 움직여서 배후를 알아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황족이라도 동창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인력을 빼는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동창의 활동영역은 넓지만, 결국 황제의 안위를 위한 활동이 주목적이었다.
무작정 동창을 움직이는 것은 결코 상책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알겠네. 장주는 손을 떼고 관할기관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만 조사라고 하게.”
“죄송합니다. 마마.”
황제의 누이인 장공주 주가려가 몇 번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행차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어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그녀가 황실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야 했다.
그렇다 보니 태천광은 권한과 인맥을 더 이상 사용할 수도, 조사를 진행할 수도 없었다.
그 점이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허나 태천광 역시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관리가 아니었다.
그와 황실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면 좋지 않다.
그렇기에 주가려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말고 한발 물러나도록 지시했다.
‘따로 조사를 시킬 수밖에…….’
황족이라고 해서 엄청난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황족의 힘은 황제로부터 나온다.
즉, 황제에게 얼마나 총애를 받느냐에 따라 권력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가 도를 넘어서는 것은 곤란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황족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권력만 허락했을 뿐,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장공주인 주가려의 권력 역시 대단하진 않았다.
허나 그녀의 신분은 장공주가 전부가 아니었다.
따라서 비공식적인 신분을 이용하려고 했다.
“아닐세. 그럼 그만 돌아가봐도 좋네.”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태천광은 주가려의 축객령에 돌아갔다.
홀로 남은 주가려는 한숨이 나왔다.
생각보다 현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도 충분히 통할 거라 생각했거늘…….”
무림에선 황실무학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었다.
화려한 외형에 치중하여 실속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실무학은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공의 허비가 큰 절학도 많았다.
허나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황실 십대신공 등 핵심이 되는 신공절학들은 결코 무림의 신공에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다.
그녀가 익힌 구룡신공 역시 그렇다.
필요에 의해 황실 십대신공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충분히 이름을 올리고도 남는 신공절학… 아니, 절대신공이었다.
“아니면 그만큼 대단한 자들인 건가…….”
구룡신공을 익혔음에도 무림의 무부(武夫)들에게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다.
손풍각의 습격으로 목숨을 위협받은 것은 물론, 무영살에 의해 암살당할 뻔했다.
두 번 모두 이현성의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러니 회의를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그녀가 곤욕을 치른 것은 그들이 무림에서도 대단한 영역을 구축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직 경지에 오를지 못했을 뿐, 구룡신공은 무림의 절대신공과 비교해서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후… 결국 내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무골(武骨)을 타고났다.
황제의 눈에 들어 과분하게도 여러 비전대법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 비학까지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단한 사부에게 가르침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황제의 누이였기에, 선황의 여식이었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그녀가 치러야 하는 희생을 위한 투자인 셈이었다.
허나 개의치 않았다.
그녀 역시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는 어찌 그리 강할 수 있지. 나보다도 어린 사내인데…….”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한 귀로 흘렸다.
소문이란 으레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허나 자신의 두 눈으로 그의 무위를 직접 봤다.
사부인 혜원사태를 넘어섰을지도 모르는… 아니, 넘어선 신위를 보여주었다.
고작 약관의 사내가 지닌 능력이기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의 강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황실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
부귀영화(富貴榮華)와 절세미녀를 거부할 사내는 없다.
주가려에겐 그런 권한이 있었다.
황족, 그것도 장공주로서 가진 권한으로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또 다른 신분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황상께서도 그라면 마음에 드실 텐데… 아니, 이미 알고 계시겠지. 그분이시니까.”
황제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천자(天子).
그런 그가 알지 못하는 것, 하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주가려는 이미 이현성의 존재를 황제 역시 알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실제로 천위령을 통해서 그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눈여겨보고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제안해봐야겠어.”
* * *
“후후… 이 정도면 되려나?”
이현성은 한 권의 서책을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그 서책은 태가장의 시동인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적은 풍운심법서였다.
물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풍운심법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이미 풍운심법의 개량판인 혈운심법을 알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뺄건 빼고 추가할 건 추가하면서 보완을 했다.
덕분에 풍운심법은 물론 혈운심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주석까지 상세히 적었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풍운심법… 아니, 풍운기공(風雲氣功)이란 말이 더 어울리려나?”
사실 심법과 기공은 큰 의미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무림에선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일반적인 내공심법보다 기의 운용에 치중한 공부를 기공(氣功)이라고 표현했다.
호신기공(護身氣功)이나 기검술(氣劍術) 등이 기공(술)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기공이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설 경우 신공이라고 부른다.
물론 내공심법(기공)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보법과 권각술(도검술) 등이 포함되어야 진짜 신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는 김에 풍운보법과 풍운검법도 손을 좀 볼까?”
풍운기공에 이어서 보법과 검법까지 개량한다면 아이들에게 큰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
허나 과한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
보물은 죄가 없으나 힘이 없는 자가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죄라는 말이 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이현성은 서책의 겉면에 풍운심법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풍운심법이라 알려진다면 덜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을 책임질 수 없다면 여기까지가 맞겠지.”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동시에 아쉬웠다.
혈천이란 악연이 없었다면 자신의 미래와 아이들의 미래가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런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음? 누구지? 강인하면서 단단한 기운을 가진 자구나.”
이현성은 순간 느꼈다.
대단한 고수가 태가장에 들어왔다는 것을.
* * *
“먼길 오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미타불… 아닙니다. 마마. 오랜만에 속세도 구경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주가려는 노승을 보며 쩔쩔맸다.
게다가 상석까지 노승에게 내주었다.
황제의 누이란 위치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승의 정체가 무림의 살아 있는 전설, 성승(聖僧) 료굉대사이기 때문이다.
소림의 산문을 벗어난 그의 목적지는 바로 이곳 태가장이었다.
정확히는 황실 대표인 주가려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무림 대표인 성승과 황실 대표인 주가려의 만남은 절대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비밀회담 장소를 황실의 비밀거점 중 하나인 정주의 태가장으로 정했다.
주가려가 은밀하게 태가장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허나 이곳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미타불… 료굉 사백을 다시 뵙게 되다니… 사저들께서 질투하겠습니다.”
“허허… 이 늙은 중이 뭐라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혜원아.”
비록 사문은 다르지만 구대문파는 서로 형제자매처럼 지내왔다.
특히 소림과 아미파는 불문이란 공통점 때문에 더욱 가까웠다.
게다가 혜원사태의 사부와 료굉대사는 젊은 시절 매우 친했기에 두 사람 역시 숙질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혜원사태의 눈이 료굉대사 뒤에 있는 중년승에게로 향했다.
“그보다 과연 소림이군요.”
“허허. 아직 멀었네.”
차기 소림 방장으로 거론되는 범천대사는 혜원사태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강인하면서도 단단한 기운은 천년소림의 법통을 잇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허나 료굉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성승의 눈에는 아쉽기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승 료굉대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누가 범천대사를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잠시 나가 있거라.”
“아미타불…….”
료굉대사의 말에 혜원사태와 범천대사는 합장과 함께 불호를 읊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방 안에는 료굉대사와 주가려만 남게 되었다.
혜원사태와 범천대사에게 동석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보다 사감 없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두 사람을 내보낸 것이다.
이런 상황이 주가려에겐 부담이 되었다.
아무리 황실 대표이자 황제의 누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여인일 뿐이었다.
무림의 전설과의 독대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순 없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