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감히 어딜… 헉!”
“자네들은 나와 놀아야 하지 않겠나?”
위지천의 차가운 미소에 혁련세가 고수들은 물론 잔류한 태가장 고수들까지 섬뜩함을 느꼈다.
혼자 혁련세가 고수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주를 막기 위해 태가장 고수 일부는 잔류시킨 것이다.
“그럼 모두 죽어줘야겠어.”
“헉… 헉…….”
위지천이 혁련세가의 고수들을 상대하는 사이 이현성은 빠르게 달렸다. 문제는 태가장 고수들이 이를 따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현성은 초절정고수였다. 절정지경에도 오르지 못한 태가장 고수들이 그의 속도에 맞추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에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이현성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혈천이 끼였다면 이렇게 지체할 여유가 없는데.’
혁련세가는 혈천십삼세의 하나이자 혈천 대호법의 가문이었다.
그가 직접 나섰을 리는 없겠지만 분명 평범치 않은 전력을 보냈을 텐데, 이렇게 지체해선 위험하다는 것이 이현성의 판단이었다.
“안 되겠습니다. 먼저 갈 테니 따라오십시오.”
“죄, 죄송합니다.”
자신들이 이현성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현성은 그들을 뒤로한 채 빠르게 움직였다.
전력을 다하니 그 속도는 조금 전과 격이 달랐다.
그렇게 한참 달리던 이현성이 갑자기 멈추었다.
‘막연하게 달려서는 엇갈릴 수도 있겠어.’
그는 귀에 집중한 후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펼쳤다.
삼라만상 덕분에 한층 강화된 천리지청술은 전보다 더 먼 거리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이현성이라면 달리면서도 천리지청술을 펼칠 수 있지만, 멈춰서 펼치는 것만큼 멀리까지 감지할 순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잠시 멈춘 것이다.
‘저쪽이구나!’
미세하지만 싸우는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천리지청술로도 미세하게 들릴 정도라면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단 뜻이었다. 빠르게 달려 지척까지 도달한 이현성은 삼라만상으로 존재감을 숨겼다.
우선 상황부터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보던 이현성의 눈이 커졌다.
‘저자는 손풍각주? 설마 팔각이 벌써 움직였단 말인가!’
때때로 혈천삼십육대가 움직인 경우는 있지만, 팔각은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팔각의 손풍각이 이곳에 있었다.
이현성은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가 너무 바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혈살오객일지라도 혈천의 모든 행사를 알 순 없었다.
그리고 회귀로 인해 미래가 바뀐 것도 사실이었다.
회귀 전에는 손풍각이 아닌 혈천삼십육대의 염라대와 혁련세가의 환살십삼객이 나섰다가 실패를 했다.
사실 아무리 혈살오객이라도 이런 정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혈천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의제인 흑오(黑烏) 덕분이었다.
그는 혈천의 심처에 자주 잠입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빼내곤 했다. 은신술과 암행술에 한해서는 이현성에 버금가는 흑오가 수련 겸 장난을 친 셈이었다.
물론 정보가 곧 힘이란 것도 그가 그런 짓을 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
‘이런…! 안 되겠어!’
손풍각의 부각주가 움직였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급한 대로 상의를 찢어서 얼굴을 가렸다.
삼라만상을 펼친 그의 존재를 모른 채 부각주가 여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컥! 미…친…….”
“미안하지만 저분들을 부탁받아서 말이오.”
“……!!”
호법원의 일원인 손풍각주만은 못하지만 부각주 역시 상당한 고수였다.
그런 그가 너무도 간단히 절명하고 말았다. 부각주를 제거한 이현성은 부상을 입은 두 여인의 앞에 섰다.
“태가장주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소저, 스님.”
“…….”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무시했다. 눈앞에 손풍각주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자신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죽여주마!!”
“그건 곤란하오.”
‘너희 혈천은 반드시 내 손에 사라져야 하니까.’
분노했으나 손풍각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각주를 단숨에 죽인 자였다. 그 역시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섣불리 움직여서 좋을 게 없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부하들을 먼저 움직였다.
“컥!”
“큭!”
손풍각 고수들은 강했다. 하지만 이현성은 더 강했다.
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덕분에 그의 실력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손풍각의 고수들은 일방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너무도 깔끔한 실력에 두 여인은 놀라웠다.
허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손풍각의 고수들이 죽을수록 자신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는 손풍각주였다.
허나 그럼에도 부하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내상을 입은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다!’
이현성이 손풍각의 고수 수십 여 명을 상대하고 있을 때, 손풍각주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살수 못지않게 은밀했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장공주가 이현성에게 경고했다.
“위험!”
“크크. 늦었다!”
그녀의 외침은 늦었다.
손풍각주는 이미 이현성의 지척까지 접근한 상황이었다. 허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현성은 손풍각주의 움직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애초 이현성은 손풍각주의 방심을 유도했고, 그는 의도대로 움직였다. 손풍각주의 방심이 극에 달했을 때, 이현성의 검이 움직였다.
“천중비화(千重飛花).”
암천살무(暗天殺舞)의 천중비화.
강기의 일천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너무도 아름다운 절초. 허나 위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서걱! 서걱! 서걱!
순간 그녀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검초가 지옥으로 바뀌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인간들이 찰나의 순간 조각조각 나는 공포스러운 모습을.
손풍각의 수십 여 고수들은 물론, 손풍각주 역시 한쪽이 휩쓸려서 사라졌다.
“우웩!!”
“으…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현성은 뒤에서 토하는 소리와 불호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장공주가 토를 할 정도로, 혜원사태가 정신없이 불호를 읊을 정도로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잔혹했다.
그러나 이현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검에 죽이든 토막 내서 죽이든 결국 살인은 살인이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팔이 일검에 베였더라도 고통이 대단했다.
그런데 천중비화에 휩쓸려 팔이 수십 조각이 났다.
그 고통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고통으로 인해 손풍각주는 이성을 잃었다.
“죽여! 죽여! 죽여 버리겠… 컥!”
“너희가 죽인 자들 역시 이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평온한 죽음 따윈 주지 않고 싶었는데, 이쯤 끝내준 걸 감사히 생각해라.”
이성을 잃은 손풍각주는 폭주했다.
아니, 폭주하려는 순간 이현성이 더욱 빨랐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하게 손풍각주를 베었다.
한 달여 전의 그였다면 홀로 손풍각을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손풍각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까닭은 혼원신공 덕분이었다. 검집에 숨겨져 있던 혼원신공의 구결이 상청도량심결(上淸道場心訣)을 만나면서 조화를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혈영공(血影功), 포영심결(泡影心訣)까지 합일시켰다. 그 깨달음이 그를 한수… 아니, 두수 위로 오르게 만들어주었다.
무림 백대고수 중에서도 상위 고수들과 견줄 정도로 강해진 지금, 손풍각을 무너트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소저와 스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 아닙니다.”
장공주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으나 곧 말을 올렸다.
그가 자신을 소저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의 신분을 아직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만약을 대비해서 신분을 숨기기로 했다.
“저는 가려라고… 합니다. 이분은 제 사부님이십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태가장주님께 잠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이현성은 이름을 숨기려고 하다가 본명을 밝혔다.
어차피 태가장에 가면 알려질 거라 숨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장공주 주가려는 성을 숨겼다.
주씨는 황족의 성이었다. 성까지 밝힌다면 자신의 신분을 눈치챌 수 있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전부 사실이니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었다.
‘누구지? 황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태가장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현성이 그런 태가장에서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녀의 궁금증을 자극시켰다.
이현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가려? 도대체 누구지?’
그 역시 주가려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궁금증을 안은 채 동행하게 되었다.
* * *
“범천아. 사부님 잘 모시거라.”
“예. 사부님. 사조님의 수발은 제자가 잘 들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중년승은 노승의 말에 더 없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노승이 부른 중년승의 법명은 놀랍게도 범천이었다. 소림의 장문제자이자 무림에서는 백보신권(百步神拳)이라 불리는 초절정고수의 법명과 동일했다.
그렇다. 그가 바로 소림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된 범천대사였다. 범천대사가 노승에게 사부님이라 불렀다는 것은, 노승이 소림의 장문인 공심대사란 뜻이었다.
소림삼신승의 수좌인 반야신승(般若神僧)이며, 십정(十正) 중 오왕(五王)에 속한 화경고수이기도 했다.
“사부님을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공심대사가 또 다른 노승에게 사부라 칭하며 더 없이 공손하게 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승은 공심대사의 사부이자 전대 소림장문인 그리고 무림의 전설인 성승(聖僧) 료굉대사이기 때문이다. 은거한 지 30년도 더 지났기에 항간에는 입적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림에선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성승이 지금 소림의 산문을 나서려고 했다.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천하를 위한 것이거늘, 뭣이 그리 번거롭더냐. 장문인은 그런 생각 말게.”
“아미타불…….”
성승의 말에 공심대사는 합장해서 불호를 읊었다.
자신은 소림의 장문인이라는 자리에 발이 묶여 늙은 사부가 산문 밖에 다녀오는 번거로운 일을 하게 했으니 그저 송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장로들을 대신 보낼 수도 없었다.
이 일은 사부인 료굉대사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심대사는 숭산을 떠나는 사부와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제, 미안하네.”
“아미타불……! 장문사형께서 어찌 빈승에게 미안타하십니까. 때가 되었을 뿐이지요.”
“사대금강(四大金剛)은 사제와 함께 사부님을 수호해라.”
“아미타불…….”
공심대사의 명에 다섯 승려가 또다시 산문을 벗어났다. 그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안제명
‘설마 했는데, 정말 그였어.’
혈천의 손풍각을 전멸시킨 이현성은 주가려, 혜원사태와 함께 정주를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떠났던 태가장 고수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주가려를 발견하고 예를 갖추려 했으나, 그녀가 전음으로 만류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