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하실 말씀이 뭔가요?”
“그게…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대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다급해 보이는 황연 총관의 표정 때문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였다.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사실 며칠 전, 본장의 고수들이 출타를 했습니다.”
이현성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황연 총관이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다만 자세히 설명할 수 없기에 두루뭉술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그가 확실하게 승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현성도 느꼈다. 태가장의 무사들이 줄었다는 것을.
“그런데 연락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변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
서문경 등 태가장 고수들이 변을 당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변을 당한 자들은 태가장 고수 전력의 절반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태가장주 역시 보름 전에 입은 부상 때문에 거동이 불편했다.
황연 총관에게 보고를 받은 태천광 장주는 무리해서 움직이려고 했다.
허나 그는 지금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태천광 장주가 황연 총관에게 명했다. 별채에 있는 이현성에게 부탁을 하자고.
황연 총관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문종학의 소개장을 가져왔다 해도 황실 사람이 아닌 그를 어디까지 믿어도 될지 가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갈 수 없었다. 중요한 임무 때문에 태가장을 나섰던 이들이 당했다. 이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고민을 길게 할 여유가 없었다.
“원랜 대협께 이런 부탁을 드리면 안 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특히 귀한 분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라서…….”
“알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지요.”
“가! 감사합니다!!”
잠시 후, 태가장에서 십 여 명이 떠났다.
그 직후 새 한 마리가 어딘가를 향해 날아올랐다.
* * *
“죄송…합니다. 마마.”
“사부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내상을 입었는지 혜원사태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손풍각주와의 격돌로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물론 손풍각주 역시 온전하진 않았다.
허나 혜원사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가 쓰러지면서 황실고수들의 기세는 제대로 꺾이고 말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무지막지한 검기가 손풍각주를 강타했고, 쓰러진 혜원사태가 사라졌다.
놀랍게도 마차 안에 있는 장공주와 그녀의 시비들 역시 사라졌다.
‘장군이 얼마 버티지 못할 터인데…….’
그녀는 자신을 호위한 황실고수들의 희생에 분노하면서도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까지 죽어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희생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장공주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애초 초절정고수인 혜원사태가 무너진 이상 그들에겐 승산이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줄 뿐이었다.
그런 혜원사태를 업고 있는 여인은 놀랍게도 장공주였다. 그녀는 평범한 황실의 여인이 아니었다.
무공을 익힌 황실고수이기도 했다.
그녀의 시비들은 현재 두 사람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흔적을 만들고 있었다.
추적자들에게 잠시나마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장공주가 직접 혜원사태를 업고 정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놈들. 이 빚은 기필코 갚아주마!’
장공주는 분노를 곱씹으며 달렸다.
정주에만 도착한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태가장의 고수들도 있고, 여차하면 하남성의 군사들을 움직이면 된다. 비록 암행(暗行)을 한 취지가 벗어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그녀의 바람을 묵살하듯 추격자들이 도착하고 말았다.
“공주마마,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빠드득…! 네놈들!”
손풍각은 황실고수보다 열 배나 많았다.
그렇기에 일부만 황실고수들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장공주를 추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달렸으나 혜원사태를 업고 있기에 결국 추격당하고 말았다.
흔적을 지웠던 시녀들의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공주님, 빈니가 시간을 벌 테니 어서 가십시오.
―사부, 아니 될 말입니다.
장공주는 혜원사태를 놓고 갈 수 없었다. 그녀의 사부이자 호위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숨겨진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혜원사태를 두고 가선 아니 된다.
하지만 그녀를 데리고 도주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허허… 마마께선 구룡검주(九龍劍主)일 줄은 몰랐소.”
“…….”
최악이었다. 손풍각주까지 도착한 것이다.
혜원사태에 의해 내상을 입었으나 그렇다 해도 초절정고수였다.
게다가 방심하지 않고 장공주를 경계하고 있었다.
결국 기습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마를 뵙기 전에 빈니부터 상대해야 할게요!”
“아무리 맹약자라도 그 몸으론 무리지.”
“……!!”
혜원사태는 이를 악물었다. 장공주를 지켜야 하는 그녀가 오히려 짐이 되는 상황이었다.
장공주가 검을 쥐었다. 아홉 용이 새겨진 황실보검인 구룡검이었다. 구룡검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어렸다.
검 자체도 대단한 보검이지만 장공주의 내공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심후… 아니, 무지막지하기 때문이다.
콰쾅!!
“훌륭하오. 십 년 후라면 본 각주도 위험했을지 모르오.”
장공주의 무지막지한 검기도 손풍각주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손에 강렬한 기운이 어렸다.
강기였다.
“일장(一掌)을 받아내신다면 살려드리겠소.”
“…….”
손풍각주는 자비를 베풀었다. 아니, 비아냥거렸다.
그의 조롱에 장공주는 이를 악물었다.
초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한 그녀는 절대 강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와라!”
“혈라폭풍장(血羅暴風掌)!”
손풍각주의 손에서 발현된 붉은 폭풍은 모든 것을 부수듯 장공주를 덮쳤다. 혈천의 오당팔각 중 손풍각의 주인에게 허락된 절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구룡검을 휘둘렀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담은 채로.
콰쾅!!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커억! 우웩!!”
“……!!”
기적이 벌어졌다. 장공주가 손풍각주의 장강(掌罡)을 막아낸 것이다. 검기로 장강을 막아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런 상식이 깨졌다.
아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맞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구룡검은 황실보검으로, 검기를 증폭시켜주는 공능이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역시 천잠사로 짠 황실이 보유한 보의(寶醫)의 하나였다.
덕분에 장강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쿨럭…쿨럭…….”
그녀는 대답 대신 피가 섞인 기침을 했다.
내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공주를 지켜야 하는 입장인 혜원사태는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와 치욕을 느껴야 했다.
혜원사태가 장공주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약속을 지키시오.”
“좋소. 약속을 지키리다.”
의외로 손풍각주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킬 정도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었다.
“부각주. 나 대신 저들을 베게.”
“존명!”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약속대로 난 살려드리오. 허나 부각주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잖소?”
그의 비열함에 그녀들은 치를 떨었다.
아무리 손풍각주가 물러났다고 해도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상이 심각한 그녀들은 손풍각주가 아니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각주의 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비록 초절정지경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팔각의 부각주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경지가 낮을 리 없었다.
“고통 없이 죽여 드리겠소.”
부각주는 두 사람을 베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푹!!
“컥! 미…친…….”
“미안하지만 저분들을 부탁받아서 말이오.”
“……!!”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지막지한 검기를 발현하며 달려들었던 부각주가 검을 휘두르지도 못한 채 절명하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암습 때문이다.
부각주의 심장을 찌른 자는 천으로 하관(下顴)을 가린 채 장공주와 혜원사태의 앞에 섰다.
“태가장주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소저, 스님.”
“…….”
놀란 것은 손풍각만이 아니었다.
장공주와 혜원사태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비록 암습이었다고 하지만 상대는 손풍각의 부각주다.
그렇게 쉽게 죽을 자가 아니었다.
허나 결국 그는 죽었다.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당한 것이다.
부각주의 죽음에 손풍각주는 분노했다.
“이놈! 죽여주마!!”
“그건 곤란하오.”
‘너희 혈천은 반드시 내 손에 사라져야 하니까.’
* * *
늦은 시간이지만 이현성과 태가장의 고수들은 태가장… 아니, 정주를 벗어났다.
한시가 급하다는 황연 총관의 부탁 때문이다.
“잠시 멈추시오!”
“왜… 그러십니까, 대협.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이현성의 외침에 태가장 고수들은 당황했다.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멈추게 만든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나오시오. 그대들이 태가장의 무인들을 벤 자들이오?”
“그게 무슨…….”
“이런. 태가장에 너 같은 놈이 있었던가?”
“헉!”
어둠 속에서 오십 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앞서 떠났던 태가장 고수들의 연락이 끊긴 이유가 바로 저들 때문이란 사실을.
“이놈들!”
“이런!”
태가장 고수들 중 몇몇이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들었다.
앞서 나선 태가장 고수들은 동료이자 전우였다.
동료들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문제는 이성을 잃은 상태로 벨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들은…….
챙!!
“헉!”
“컥!”
“이성을 찾으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이 대협.”
흥분한 태가장 고수들의 검은 적들의 검에 막힌 것은 물론 반격까지 허용했다.
만약 이현성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적들이 예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나 그들만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이현성 역시 깨달은 것이 있었다.
‘환영십이검(幻影十二劍)? 혁련세가 놈들이었구나.’
과거 혈무곡에서 혁련후가 펼친 적이 있는 검법으로, 혁련세가를 대표하는 검법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혁련세가는 혈천십삼세의 하나인 만큼 환영십이검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후… 무슨 악연이기에 또 혈천인가.’
산동성에서 혼세교를 만났다. 그런데 한 달여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혁련세가의 고수들을 만났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또 있겠는가.
게다가 이번에는 얼굴을 가리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물론 저들은 자신의 신분을 모르겠지만.
그때 이현성의 귓가에 위지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우. 급한 것 같은데 먼저 가게. 여긴 내가 맡겠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전멸시켜주십시오.
―알겠네.
이현성의 대답에 위지천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이현성은 그런 위지천이 고맙기만 했다. 이현성은 태가장 고수들 몇에게 전음을 보낸 후 바로 떠났다.
이를 두고 볼 혁련세가의 고수들이 아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