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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살수-96화 (96/314)

96화.

이현성은 이 부분까지 간파하진 않았으나 자신에게 호의를 가졌단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보다 미안하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학, 그 친구의 부탁으로 대협의 가족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소.”

“아닙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내각대학사의 권위를 내세운다면 이현성의 가족을 찾는 것이 한결 수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빠지는 것을 멀리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에 이현성의 가족들을 찾는 일은 동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태천광이었다.

지휘사쯤 되는 고관들은 평범한 무부들이 아니었다. 그만한 소양 역시 갖춘 이들이었다.

태천광 역시 어려서부터 무공만 아니라 학문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문인 출신도 적지 않았다.

그런 현실이기에 무관 출신인 태천광이 문종학과 동문일 수 있었다.

“후…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더 이상은 힘들겠구려.”

“아닙니다. 쾌유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이현성은 총관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총관만 다시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장주님.”

“많이 좋아졌네. 후… 이래서 그분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주께선 곧 일어나실 겁니다.”

강인했던 태천광의 약해진 모습에 황연 총관은 안타깝기만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무척 오래되었다. 태천광이 지휘사 시절 그의 부관이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의 곁을 지킨 자가 바로 황연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너무도 두터웠다.

“그보다 그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내 정심이 많이 흐트러져서 확언하긴 어려우나 보통이 아니더군. 만약에… 만약에… 위급하다면 그에게 도움을 청하게.”

“장주!!”

“허허. 이 사람도 참… 만약에 말일세.”

두 사람 아니, 태가장은 낙향한 관리의 평범한 장원이 아니었다.

그런 태가장이었기에 만약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현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역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쿨럭… 청학이 본장의 비밀을 알고 보낸 것은 아니겠지만, 내게 소개시킬 정도라면 믿을 수 있는 사내란 뜻일세.”

“그야… 그렇겠지요.”

내각대학사란 직위가 아니라도 청학 문종학은 누군가를 평가하는데 있어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과대평가 역시 하지 않는다.

그런 문종학이 인정한 사내라면 그들 역시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도움을 청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는 황실 사람이 아니며, 태가장의 비밀을 아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후… 그보다 준비는 어찌 되었는가?”

“걱정 마십시오.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암습도 그렇고… 예감이 좋지 않네. 늦지 않게 사람을 보내게.”

“예. 장주님.”

아직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중원사의 한 장을 장식한 중요한 일이 하남성에서 일어날 예정이라는 것을.

* * *

“손풍각(巽風閣)이 본천을 떠났다고 합니다. 조부님.”

“허허… 휘야. 이 할애비의 결정이 못마땅하더냐?”

노인은 자신과 닮은 손자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모습을 봤다면 경악하였을 것이다. 그는 냉혹하기로 혈천에서 견줄 자가 없다는 대호법 혁련중광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빼다 박은 청년은 혁련휘. 혁련중광의 장손이자 혁련세가의 대공자였다.

즉, 혈검살객 혁련후의 친형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저 소손은 본가의 공을 나눠줄 필요가 있나 생각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벌써부터 본가의 힘을 깎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들이 그 정도란 말입니까?”

“허허. 본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도 좋으나 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혁련중광에게는 혁련휘, 혁련후 형제 외에도 여러 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아니, 혁련휘와 함께 가장 두각을 보이는 혁련후에게조차 이런 인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혁련휘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혁련후가 혈살객의 수장이 되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형과의 차별을 줄이기 위해서 아니, 넘어서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혁련중광은 그런 혁련후에게도 기회는 주었다. ‘혈살객의 수장이 된다면’이란 조건이 붙은 기회를.

허나 사실상 후계자는 혁련휘였다.

혁련세가의 정수인 환마지체(幻魔之體)를 타고난 혁련휘야말로 혁련중광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조부님.”

“아니다. 분명 본가의 힘은 강하다. 허나 황실의 힘을 무시해선 안 된다. 황실이, 황제가 괜히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본가의 전력 손실을 경계하는 것이지, 황실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란다.”

손풍각은 혈천의 상위조직인 오당팔각의 하나였다.

팔각을 움직이기 위해선 장로원과 호법원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정확히는 혈천십삼세의 협의가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혈천삼십육대(血天三十六隊)는 몰라도 팔각의 출도는 거의 없었다.

이번 손풍각의 출도 역시 혁련중광이 나머지 혈천십삼세 주인들에게 양해를 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계집의 사부인 혜원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 숨은 고수다. 네 애비나 ‘그들’을 보내야 하는데 그건 곤란하지 않더냐.”

“…!! 아미파의 혜원사태가 그 정도였습니까?”

“아니라면 어찌 황제의 누이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

놀랍게도 혈천은 황제의 누이를 노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불가능했다.

그녀를 노리기 위해선 황궁의 담을 넘어야 했다.

용담호혈이라는 황궁에서 황족을 벤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허나 그녀가 은밀하게 황궁 밖으로 나왔다면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모종의 임무로 황궁을 빠져나와 하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혈천에서 손을 쓰려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임무를 무산시키기 위함이었다.

“손풍각이 성공한다면 이를 주도한 본가의 공이 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모든 죄는 손풍각이 안고 갈 것이다.”

“과연…….”

혁련휘는 몇 수 앞까지 내다보는 조부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손을 보며 혁련중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휘야.”

“예. 조부님.”

“혈룡대 쪽은 어찌되고 있느냐?”

“조장들을 제 사람을 만들고 있으나…….”

혁련중광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혈천의 미래라 할 수 있는 혈룡대와 혈살객을 손에 넣어서 자신의 뒤를 받쳐주길 원했다.

그의 장손은 혈룡대 부대주가 되었고, 차손은 혈살객 중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뜻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혈룡대주는 부천주의 손자로, 그 위치를 공고히 만들고 있어서 아성을 깨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혁련휘는 차선책으로 조장들을 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았다.

“대군사의 손녀 때문이더냐?”

“예. 수하들에게 인기가 많은지라…….”

“으흠…….”

혈룡대는 두 명의 부대주가 존재하는데, 한 명이 혁련휘였고 나머지는 문인주희였다.

대군사 문인윤걸의 손녀이자, 과거 이현성이 혈무곡에서 만났던 207호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여인임에도 혈룡대에서 손꼽히는 무위, 흡입력 있는 화술, 마지막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는 중립적인 성향으로 인해 혈룡대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 아이를 네 사람으로 만들어라. 힘들다면 내가 대군사에게 언질을 해두마.”

“죄송합니다. 조부님. 계집 하나 누르지 못한다면 어찌 조부님의 뒤를 이을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혁련중광은 손자의 대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거라 믿는다.”

“물론입니다. 조부님.”

* * *

“큭!”

“으아악!!”

복색이 동일한 이십여 명의 사내가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정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는 순간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암습을 당했다.

예상치 못한 암습에 당황했으나 제법 실전 경험이 풍부한지 곧 정신을 차려서 대응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예닐곱 명이 쓰러진 후였다.

채챙!!

“누구냐!!”

“글쎄? 우리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지금 너희가 죽는다는 것이 중요하지.”

동일한 복색의 사내들 아니, 태가장 고수들은 습격자들의 차갑고 끈적한 살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태가장 고수들을 이끌고 나온 경비대장 서문경은 자칫 기세가 꺾이면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고함을 쳤다.

“누군지 모르지만, 사람을 잘못 고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럴 리가?”

이를 악문 서문경은 괴한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그의 검에선 빛이 나고 있었다.

검기(劍氣). 그것도 절정에 오른 검기였다.

그는 일개 장원의 경비대장답지 않게 절정지경에 오른 고수였다.

실제로 장주와 총관 다음으로 뛰어난 고수이기도 했다.

허나 그런 서문경도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다.

콰쾅!!

“큭! 도, 도대체…….”

“과연 전직 금의위 부천호다운 솜씨군.”

“그, 그걸 어떻게……!!”

서문경은 경악했다.

자신이 금의위 부천호 출신이란 사실은 정주에서 태가장의 가솔 외에는 모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문경만이 아니었다.

태가장의 무사들 대부분이 금의위 혹은 명의 금군 출신으로 현재 퇴역한 상태였다.

“그러니 더욱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모두 죽여라!”

“본장의 무사들은! 적을 섬멸하라!!”

서문경과 함께 온 태가장 고수들의 도검(刀劍) 역시 빛나기 시작했다.

허나 이는 적들도 다르지 않았다.

서문경은 직감했다. 일생일대 최고 위험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 느꼈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맡은 임무는 목숨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챙! 채챙!

푹!

서걱!!

“컥!”

“크으윽!!”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 않는 법.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괴한들이 태가장 고수들보다 더 많았다.

그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태가장의 고수들은 더욱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반 시진이 지나기 전에 서문경을 제외한 태가장 고수들은 전원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물론 서문경 역시 밀리고 있었다.

‘제군들 미안하다.’

먼저 간 부하들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냥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일검에 모든 내공을 담았다.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서문경의 검을 막는다 해도 내상은 감수해야 할 정도였다.

“미안하군. 난 같이 죽을 생각이 없네.”

푸~욱!!

적의 수장은 굳이 서문경의 검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의 검을 피하며 찰나의 순간 서문경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허나 이는 서문경의 노림수였다.

“아니, 같이 죽… 큭!”

심장에 꽂힌 적의 검을 왼손으로 잡은 채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살아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적의 수장과 동귀어진을 할 생각이었다.

허나 서문경의 적은 한 명이 아니었다.

또다른 한 명이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렇게 동귀어진을 노렸던 서문경은 마지막 기회마저 잃고 죽음을 맞이했다.

“괜찮으십니까. 대주님.”

“고맙군. 부대주. 자네가 아니었으면 안제명 그놈에게 비웃음을 당할 뻔했어.”

서문경과 생사결을 나눈 자는 상부의 명령으로 정주안가의 가주 안제명의 지시를 받던 중년 사내였다.

가뜩이나 안제명의 지시를 받는 것도 못마땅한데, 여기서 부상이라도 입었다면 자신을 얼마나 깎아내릴지 모른다.

그러니 부대주의 도움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흔적을 지워라! 누구도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저들이 죽은 것을 알아선 안 된다!”

“존명!”

태가장과 정주안가의 분쟁이 아니었다.

천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거대한 사건의 시발점이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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