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태가장
쾅!
“실패했단 말이 나오는가!!”
대노한 중년인이 호통을 쳤다. 이에 복면인은 움찔했다.
중년인은 알려지긴 일류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기세는 고작 일류고수 따위가 아니었다.
“죽이진 못했으나 중상을 입었으니 당분간 거동은 어려운 것이외다.”
“만약 일을 그르친다면 난 그분께 고할 테니, 그렇게 알게!”
“…알겠소. 가주.”
복면인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의 중년인은 자신의 상관이 아니었다. 허나 현재 그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못 마땅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받은 명령이 그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니.
‘안제명,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내게 틈을 보이지 마라. 그땐 반드시 네놈의…….’
‘흥. 네놈의 생각을 모를 줄 아느냐. 허나 이번 일만 성공하면 난 완벽히 네놈의 상관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속셈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렸지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선 서로의 힘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일을 그르쳐서 대업에 지장을 준다면 두 사람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그보다 그분께 요청한 것은 어찌되었는가?”
“그분께서 병력을 빼기 여의치 않으셔서 본천의 병력을 보내올 거요.”
“본천?”
“그 이상은 가주가 알 필요 없소.”
두 사람은 한 사람을 모시지만 입장이 달랐다.
한 명은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된 것이고, 나머지 한 명은 원래부터 수하로 중요한 임무 때문에 나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시를 받고 있음에도 가주란 중년인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좋네. 임무만 완수할 수 있다면… 시간이 많지 않으니 준비해두게.”
“알겠소. 가주.”
복면인은 대답한 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안제명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빨리 그분의 신임을 받아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선 이 임무를 무조건 완수해야 해.”
안가는 정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문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십여 년 전부터 바뀌었다. 조금씩 부와 명예를 쌓았다.
그리고 지금은 정주안가라 불리며, 정주에서 손꼽히는 가문이 되었다.
지금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아니, 더 많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선 하달 받은 임무를 무조건 완수해야 했다.
“…실패하면 끝장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계속 인정받지 못한다면 제거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소모품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능력을 더 보여줘야 했다.
“이 안제명이 어떤 놈인지 확실히 보여주마!”
* * *
“장주님을 찾아온 자가 있었다고? 돌려보내게. 장주님께서 지금 누굴 만날 형편이 아님을 모르더냐!”
“그, 그게 문 대인의 소개장을 가져와서…….”
미간을 찌푸리던 중년인은 사내의 대답에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북경 문 대인을 말하는 겐가?”
“예. 총관 어른.”
총관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지시를 내렸다.
“내가 대신 만나지. 어디 계신가?”
“객당에 모셨습니다.”
“알겠네. 자넨 일 보게나.”
총관이라 불린 중년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깊은 생각을 할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누구기에 문 대인께서 소개장을 쓰신 거지? …만나보면 알겠지.”
조정의 수많은 관리 중 문씨 성을 가진 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허나 장주께 소개장을 보낼 문 대인은 많지 않았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절대 돌려보내선 안 되는 자였다.
그렇기에 총관은 장주 대신 직접 만나보려고 했다.
객당에 도착한 총관은 의아했다.
손님은 문 대인의 소개장을 가져올 만한 자들로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소경이고, 나머지 한 명은 너무 어리군. 내가 착각한 건가?’
북경 문 대인이 한 명이 아닐 진데, 지레짐작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허나 객당까지 온 만큼 그냥 돌아가는 것은 예가 아니었다.
“장주님께서 몸이 불편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총관인 황연입니다. 북경 문 대인께서 소개장을 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여기…….”
이현성은 자신들을 미심쩍게 여기는 황연의 시선을 느꼈으나 모른 척했다.
그 역시 장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황연은 어린 사내가 문 대인의 소개장을 꺼내자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연장자로 보이는 소경인 중년 사내가 문 대인의 소개로 온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소개장을 확인한 황연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예상했던 그 ‘문 대인’이 맞았다.
게다가 은공이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소문의 그란 말인가! 으음…….’
이 시기에 그가 방문했다는 사실에 황연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총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했다.
“…지내시는데, 불편하지 않게 별채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연 총관은 하인으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별채를 안내하게 한 후 장주를 찾아갔다.
현재 장주는 몇몇을 제외하곤 대면이 불가능했다.
그 몇몇 중 황연 총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쿨럭… 왔는가.”
“죄송합니다. 장주님. 쉬시는데… 보고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인지라…….”
황연 총관은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장주라고 불린 중년인은 손을 저었다.
자신 대신 장원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황연 총관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신뢰를 하기 때문이다.
“내각대학사이신 문종학 대인의 소개장을 가져온 사내들이 있었습니다.”
“쿨럭… 그 친구의?”
“예. 소문의 ‘그’인 듯싶습니다. 읽어보십시오.”
“줘보게.”
황연 총관은 청년 아니, 이현성에게 받은 소개장을 장주에게 건넸다.
소개장을 읽은 장주는 문종학이 보낸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허… 이 시기에 그가 본장에 왔다? 우연이라고 보는가?”
“우연이지 않겠습니까? 문 대인께선 본장에 대해 아시지 못하시니…….”
“그렇지. 그런데 쿨럭… 쿨럭… 흐…….”
“괘, 괜찮으십니까. 장주님!”
생각보다 장주의 상태가 더 좋지 않은지,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황연 총관의 얼굴에 진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허나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그는…….”
“별채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중년의 소경과 동행했습니다.”
“잘했네. 그런데 소경이라…….”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쿨럭…….”
황연 총관은 그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곤 돌아갔다.
홀로 남은 장주는 이를 악물었다.
‘이 태천광이 살수 따위에게 당하다니, 그분을 뵐 낯이 없구나.’
수년 전까지만 해도 오천여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사(指揮使)였던 그는 모종의 이유로 낙향을 했다.
그리고 이곳 정주에 태가장을 세웠다.
아무리 낙향했다지만 군부에선 아직 그를 기억하는 자들이 많았다.
덕분에 태가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정주에서 그를 무시하는 자는 없었다.
게다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태천광은 무공을 익힌 고수였다.
그런 그가 암습을 받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아무리 낙향했다고 해도 무인으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태천광은 불편한 몸을 움직여서 가부좌를 틀었다.
‘빨리 회복해야 해… 이대로 소임을 저버릴 수는 없으니까.’
* * *
“일개 장원 치고, 무력이 상당하군.”
“그러게요.”
위지천과 이현성은 초절정고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기감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이곳 태가장에 지낸지 며칠 지나지 않았으나 평범한 장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평범한 장원이라면 일류고수만 오십이 넘고, 절정고수도 서너 명씩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 외의 무사들 역시 제법 잘 단련된 것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대문파라 말하긴 어렵지만, 웬만한 중소문파보다 강력한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만 생각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 대인께선 이런 말씀이 없으셨는데?’
동문수학했던 동문이라기에 문인의 장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낙향한 문인의 장원으로 보기에는 너무 과했다.
그렇다고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과객일 뿐이었으니까.
그때였다. 누군가 별채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시비를 제외하고 태가장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황 총관님이시군요.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태가장의 총관인 황연이었다. 그리고 태가장의 몇 안 되는 절정고수 중 한 명이었다.
허나 이현성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이에 황연 총관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장주님께서 몸 상태가 호전되셔서 이 대협께 인사드리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장주님께서 이 대협만 뵙길 청하셨습니다.”
“다녀오게.”
이현성과 달리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지천은 동행시킬 수 없었다.
위지천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애초 그는 이현성의 동행이지, 태가장과는 아무런 연이 없는 자였기에 언짢을 이유도 없었다.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황연 총관을 따라갔다.
‘무슨 일이 있긴 하군. 경비가 삼엄한 것을 보니까.’
점점 경비하는 고수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현성은 걱정하지 않았다.
저들이 전부 덤벼들지라도 도망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베려고 한들 어렵지 않았다.
초절정고수란 괜히 무림 백대고수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강기를 발휘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강자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경비가 삼엄하다고 한들 두려울 리가 없었다.
‘기가 불안정하군. 부상을 입은 건가.’
심처에 가까워지자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안정했다.
이는 노쇠해서 기운이 약해졌거나 부상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이현성은 전자보단 후자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문이 열리자 중상을 입은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총관의 부축을 받아서 인사를 했다.
“보고 받은 것보다 더 젊은 분이구려. 쿨럭… 태가장주인 태천광이라고 하오.”
“장원의 주인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신세를 지고 있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아무리 중상으로 온전하지 못하다 해도 수천 명을 호령했던 태천광이었다.
심기가 약한 자는 그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현성에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그릇이 크다는 뜻이었다.
“청학(淸鶴). 그는 잘 지내오?”
“제가 마지막에 뵐 때까지는 잘 지내셨습니다. 대인.”
“관직을 내려놓았으니 굳이 대인이라 칭하실 필요 없소. 그냥 장주라고 불러주시오.”
“예. 장주님.”
지휘사는 정삼품의 높은 관직이었다.
그렇기에 낙향했다고 한들 예우 차원에서 대인이라 칭해도 된다.
실제로 정주사람들은 태천광을 장주라고 부르기보다는 대인이라 칭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현성에게 대인이 아닌 장주라 불러달라고 했다.
이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숨은 의지를 담았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