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그들을 상대하고 있던 산동악가의 고수는 열넷.
산동악가의 최정예 창수인 악가사십구창은 칠인(七人) 칠조(七組)로 구성되었다.
그중 이개조가 투입된 것이다.
악가사십구창은 천왕대와 달리 전원이 절정고수는 아니었다.
허나 절정고수인 조장의 지휘 하에 펼치는 합격술은 일절이라고 부를 만했다. 천왕대원이라도 저들의 합격술에 나가떨어지는 것은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었다.
더더욱 지친 상태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팔 하나를 내주는 한이 있어서도 반드시 저자를 꺾어야 해!’
천붕도 모관형을 꺾지 못하는 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한다면 소가주를 무사히 모셔갈 수 없었다.
천붕도의 말처럼 소가주와 자신들이 죽는다면 황보세가의 미래는 암담해진다.
권왕이 건재하다고 하지만 그 역시 언젠간 죽는다.
소가주를 대신할 만한 인재는 없고, 권왕의 뒤를 잇기에 대공자는 아직 미숙했다.
황보세가는 일개 무림세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대세가였다.
가주가 화경 아니, 초절정지경에도 오르지 못하면 그 명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한번 잃은 명성은 되찾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그전에 몰락할 수도 있었다.
야비한 산동악가가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는 일이었다.
“천붕지탁(天崩地坼)!”
“컥! 벽력신… 으아악!!”
천왕대주는 모험을 했다.
괄육취골(刮肉取骨).
자신의 왼팔로 천붕도의 칼을 막고, 오른 주먹으로 벽력신권을 펼쳤다. 아니, 펼치려고 했다.
왼팔을 잃겠지만, 천붕도만 죽일 수 있다면 상황은 역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옳은 판단이 아니었다.
“어리석군. 고작 팔 하나로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가.”
“으으…….”
막기는커녕 천왕대주는 왼팔을 잃고, 가슴까지 베였다.
조금만 더 강했으면 천왕대주는 그대로 절단이 났을 것이다. 팔 하나 내줘서 막기에 천붕도의 칼은 예상보다 너무 강했다.
최악이었다.
그나마 버텨주었던 천왕대주가 무너지자 소가주를 지키던 천왕대는 희망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하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한가지 약속만 해준다면 그대들을 구해주겠소.
“으…으…….”
천왕대주는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절대 환청이 아니었다.
―마지막 기회요. 어쩌겠소?
“저, 정말 구해줄 수 있소? 조, 조건이… 으윽… 뭐요?”
“크크크. 드디어 미쳤군.”
천붕도는 천왕대주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혼자 헛소리를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초절정고수의 기감을 속이고 숨어 있는 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헛소리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 본 적이 없고… 저잔 그대가 죽인 것이오. 그렇게만 알리면 되오.”
“헉! 누구냐!!”
천붕도 모관형은 기겁했다.
분명 기감에 잡히는 자는 없었다.
초절정고수인 자신의 기감을 속일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기겁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회복했다.
기감을 속이는 것과 무위는 비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수인가? 어리석은 암습을 했다면 기회가… 큭!”
“과연 혼세교 좌사(左師)답소. 상처 정도는 입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소만…….”
“……!!”
상대가 살수(?)라고 방심하다가 목이 날아갈 뻔했다.
하지만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실력인지 간발의 차로 살수의 검을 피했다.
천붕도 모관형은 경악했다.
그 섬뜩한 쾌검도 놀랍지만 진정 경악스러운 것은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살수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우사(右師)와 함께 혼세교주 다음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혼세교는 혈천십삼세의 하나로서 산동성을 혈천의 그늘에 두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권왕의 눈을 피하기 힘들기에 황보세가 대신 차선으로 산동악가에 손을 뻗었다.
전대 가모를 자연스럽게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요직에 혼세교 사람을 앉혔다. 아니면 혼세교 사람으로 만들었다.
물론 가주와 소가주 등 핵심적인 자리까지 장악할 순 없었다.
허나 상관없었다. 산동악가의 역할은 황보세가의 힘을 줄이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혼세교의 행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뭔 헛소리이지?”
―본천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지만 귀교 아니, 대장로께서 너무 앞지르는 것을 그분께선 원치 않으셔서 말이오.
“…….”
천붕도 모관형은 모른 척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전음으로 그가 전한 말은 혈천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덕분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부천주인가? 아니면 대호법? 그게 아니면…….’
좌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용의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혼세교주인 혼세신마의 강력한 경쟁자는 부천주와 대호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 혼세교의 승승장구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혈천십삼세 모두가 용의자였다.
혈천의 이름 아래 뭉쳤으나 동시에 열셋이나 되는 세력이었다.
누군가 위로 오른다면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 이번 일로 혼세교가 산동성의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을 시기할 자는 그들 모두가 된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만 죽어줘야겠어.”
좌사는 칼을 쥐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둘째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방해자를 제거할 뿐이다.
책임자인 자신이 직접 나섰다.
어떤 변수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렇게 산동무림의 운명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황보세가도 산동악가도 아닌 정체불명의 괴한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혼세교
“도대체…….”
천왕대주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천붕도 모관형에게 한쪽 팔을 잃게 되었으나 그건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정체불명의 괴한이 천붕도의 무시무시한 도법을 무난히 막아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왼팔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챙! 챙! 챙!!
모관형은 강했다.
혼세교의 좌사란 자리는 그냥 앉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천붕도법은 원래 혼세신마의 절학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위력이 대단한 것은 당연했다.
쾅!!
“제법이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내색하지 않았으나 좌사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설마 일개 살수라고 생각한 자가 자신의 칼을 이렇게까지 받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혈천에는 고수가 많았다.
혈천십삼세의 주인들은 물론 그 휘하에 한두 명씩 초절정고수가 있었다.
자신도 그중 한 명이고, 눈앞의 괴한 역시 그중 하나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그런 혈천도 자신의 기감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은신술을 가진 자는 몇 없다는 점이었다.
“유령왕은 아닌 것 같고… 그럼 유령살군?”
“…….”
가장 유력한 곳은 바로 유령곡이었다.
삼대살종 중 한 곳이며, 혈천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령살군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친분이 두텁다고 할 순 없으나 초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물론 목소리의 변조쯤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기억 속 유령살군의 눈빛과 눈앞의 괴한의 눈빛은 달랐다.
덕분에 좌사는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채챙! 챙챙!!
괴한의 검을 더욱 빨라졌다. 내적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정말 유령살군이란 뜻인가? 하지만…….’
좌사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가 정말 유령살군이라면 오히려 기회일 수 있었다.
유령곡주인 유령왕과 부곡주인 그가 경쟁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런 유령살군이 자신에게 죽는다면 유령왕은 자신에게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놓치기 아까운 기회인 셈이었다.
“천붕지괴(天崩地壞)!!”
“큭!”
괴한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막아내기는 했으나 수월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다섯 보나 밀렸다.
좌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야!’
“천붕지멸(天崩地滅)!!”
“일점…….”
‘…혈!’
좌사는 천붕도법의 마지막 절초를 펼쳤다.
일도(一刀)에 모든 것을 담았다. 그 누구라도 벨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는 깨닫지 못했다.
이 상황은 괴한 아니, 이현성이 유도했다는 것을.
천붕지멸, 그 위력은 천붕도법 최강이었다.
그만한 위력을 위해서 동작이 커지고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허나 동시에 마음의 틈이 발생했다. 방심이라는 틈.
빛과 그림자처럼 확고한 확신에는 방심이 만들어진다.
의심을 하는 자는 자신의 일격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확신이 없다면 전력을 다할 수 없었다.
즉, 이현성은 좌사가 방심할 수 있게 천붕지멸을 유도했다는 뜻이다.
허나 방심을 한 것은 좌사만이 아니었다.
콰쾅!!!
“으아아악!!”
“컥!!”
분명 좌사가 펼친 천붕지멸은 강력했다.
하지만 이현성의 일점혈은 빠르다.
좌사의 칼이 닿기 전에 찌를 수 있다.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좌사는 이현성의 판단보다 뛰어났다.
목숨 대신 팔 하나로 그쳤으니까.
그리고 천붕지멸은 예상보다 더욱 강력했다.
좌사의 팔을 벤 터라 빗나간 천붕지멸에 의해 이현성이 나가떨어졌다.
천붕도법의 최후 초식다웠다.
“죽여! 죽여버리겠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팔이 베인 고통에 눈이 뒤집어진 좌사는 나가떨어진 이현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곳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한 팔을 잃은 천왕대주도 있었다.
잠시 쉰 덕분인지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듯싶었다.
게다가 이현성 역시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즉, 자신이 불리했다. 그것도 매우.
“죽여주마! 언젠가 꼭!!”
좌사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복수는 잠시 미루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좌사가 도주하자 천왕신권을 노리던 악가사십구창 이개조는 당황했다.
좌사 아니, 천붕도 모관형 호법이 천왕대주를 처리해주지 못한다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역시 도주를 선택했다.
“도망치게 놔두지…….”
“그만!”
그런 그들을 놔줄 천왕대가 아니었다. 바로 뒤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천왕대주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대, 대주님. 하, 하지만…….”
우드득……!
“저들을 죽이는 것보다 소가주의 안위가 먼저다!”
“존…명!”
둘밖에 남지 않은 천왕대원은 분노했으나 대주의 명을 따랐다.
그의 명이 옳다는 것을 그들 역시 잘 알기 때문이다.
천왕대주는 어느새 일어나 있는 이현성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포권(抱拳)을 취했다.
물론 주먹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온전한 포권은 아니었다.
“황보세가의 천왕대주가 은공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인 줄 아나, 사정이 있어서 밝힐 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리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