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살수-77화 (77/314)

77화.

그리하여 사부께서 남기신 광세비급인 천검비록을 전해도 된다고 확신했다. 천검비록을 전한다는 것은 이현호를 제자만 아니라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다. 그걸 알기에 이현호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했다.

‘이 제자, 반드시 사부님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아직 내공이 미숙해 전음을 보낼 수 없는 이현호는 마음으로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한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녀오겠습니다. 사부님, 누이…….”

* * *

“거절이라.”

사자도패의 서신이 천웅방에 전해졌다.

이현성의 거절과 천사교 환야의 방해 그리고 다음 명령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버릇을 고쳐놔야 합니다. 허나 우리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지요.”

“풍패. 천사교의 손을 빌리잔 말인가?”

천웅창제(天雄槍帝) 담중과 함께 있는 자는 천리풍패(千里風覇)였다. 사자도패와 함께 천웅방 팔패(八覇) 중 한 명이다. 무림에서 손꼽히는 경공술의 대가이자 천웅방의 눈과 귀를 맡고 있었다.

방주의 곁에서 조언을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천사교주는 오만한 자입니다. 이번 일을 두고 볼 리가 없습니다.”

“하긴 그 늙은이가 그냥 넘어갈 리 없지. 위험할 때, 은혜를 입히는 것이 낫겠지. 허나 실패한다면 정리하라 전하게.”

“존명!”

천사교주는 칠사(七邪) 중 최강이었다.

그만큼 오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런 그였으니 제안을 거절한 자를 살려둘 리가 없었다. 사자도패의 서신대로라면 이현성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터, 허나 천사교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었다. 그때 도움을 준다면 그를 천웅방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게 천리풍패와 천웅방주의 생각이었다.

허나 세상일은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

그때는 남의 검이 되지 못하게 부숴야 했다.

남의 검이 되어서 자신에게 겨누어지지 않도록.

천웅창제 담중.

패도(覇道)를 지향하는 절대자이지만, 심계(心計)는 사파의 절대자답게 치밀했다. 그가 천웅방을 차지한 것은 무위만으로 이뤄낸 게 아니었다.

“영패.”

“예. 방주.”

“만약을 대비해라.”

“존명.”

담중의 말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사라졌다. 천리풍패가 그의 눈과 귀라면 사자도패는 그의 칼이었다. 그리고 암월영패(暗月影覇)는 담중의 그림자이자 비수였다.

그의 기운이 사라지자 담중은 입맛을 다셨다.

“그와의 계약도 얼마 남지 않았지. 재계약을 맺어야 해. 제거하는 것도 마땅치 않으니까.”

천웅방의 팔패는 재미있는 자들이었다.

사자도패처럼 담중을 주군으로 삼은 자도 있고, 천리풍패처럼 담중을 방주로서 모시는 자도 있었다. 그중 암월영패는 담중과 계약을 맺고 그의 비수가 되었다.

팔패 중 무위만 본다면 하위였으나, 제거에 실패했을 때 천웅방에 제일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자도 암월영패였다. 그렇기에 담중은 그와 재계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허나 떠난다고 해도 제거할 수가 없었다.

실패한다면 여간 골치 아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애송이가 내 밑으로 온다면 영패를 대신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 * *

“모두 잘 계십시오.”

암천만 챙긴 이현성은 문가장을 떠나기 위해서 입구로 왔다. 입구에는 금의위사들과 문태규가 나와 있었다.

“이렇게 떠나시다니요. 섭섭합니다.”

“위 대장님. 언젠가 돌아올 테니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두님의 천하출도에 평안을 기원하겠습니다.”

“교두님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금의위 부천호이자 문가장 경비책임자인 위표는 물론 이하 금의위사들은 떠나는 이현성을 보며 아쉬워했다.

그의 가르침 덕분에 동기들보다 더 나은 실력을 가질 수 있었다. 진급 대상에 오른 자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대인께는 이미 인사드렸다. 태규야. 잘 있거라.”

“누이는 몸이 좋지 않다고 하네요. 형님. 죄송합니다.”

“아니다. 다시 볼 날까지 건강히 잘 지내거라.”

문교교는 결국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성은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게 의지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몰랐다.

그녀가 담고 있던 감정이 남매의 정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애초 여동생으로만 봐왔기에 깨닫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사를 마친 이현성이 막 떠나려 할 때였다.

“자, 잠깐!!”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이십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팽군악과 하북팽가의 도객들이었다. 뒤늦게 이현성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진짜 떠나는 거야!”

“그렇게 됐어.”

“왜 이야기 안 했어!”

“미안. 사정이 있어서.”

이현성은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귀림과 문가장 식구를 제외하고는 따로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 빨리 사파사세의 눈에 포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널 찾아온 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과 연관 있는 거야?

―자세한 건 말해주기 힘들지만, 북경을 떠날 때까지 꼬리가 붙으면 곤란해서.

―그렇다고 해도 나에겐 미리 알려줬어야지!

―미안.

알게 된 지는 두어 달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팽군악은 이현성을 죽마고우보다 더 가깝게 여겼다.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려 했다는 것이 못내 섭섭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을 어렴풋이 알기에 더 이상 화를 낼 순 없었다.

“받아라.”

“뭐야?”

팽군악은 이현성을 향해 작은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는 제법 묵직했다. 전낭(錢囊, 돈주머니)이었다.

“많이는 못 넣었다.”

“이럴 필요는…….”

“넣어둬. 거절하면 나 무척 속상할 것 같다.”

“후… 고맙다.”

사실 이현성은 굳이 이 전낭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문종학 대인에게 받은 것도 있고, 모유환이 챙겨준 것도 있기에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전낭을 준비한 친우 팽군악의 성의를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제법 많은 것을 얻었구나.’

문가장의 식구들, 흑룡대와 모유환 그리고 귀림. 그들만이 아니었다. 하북팽가 팽씨 형제와 그들의 조부 도왕(刀王). 사천당가의 유백 등. 제법 많은 사람을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북경 생활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원했던 세력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돌아온다. 언젠가 반드시…….’

* * *

“어디로 갈 것 같나. 령주.”

이현성이 북경을 떠난다는 사실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문가장을 지키는 금의위를 통해 전해진 정보였지만, 그 외에도 별도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덕분에 비밀리에 떠나려 했음에도 결국은 황제에게 전해졌다.

“동(東)으로는 절강의 천사교, 남(南)으로는 호남의 천웅방. 서(西)로는 사천의 당가로 막힌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현 상황에서는 하남이 제일 유력합니다. 폐하.”

“소림사가 있는 하남이라…….”

천위령주는 북경을 떠난 이현성이 숨을 장소로 하남을 예상했다. 구파일방의 화산과 종남파가 있는 섬서, 무당과 제갈세가가 있는 호북 그리고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 역시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허나 소림과 개방이 있는 하남만큼 안전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이현성 역시 하남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남에는 누가 있지?”

“낙양 여씨상회, 정주 태가장, 개봉 백송학관이 있습니다. 폐하.”

하남성을 대표하는 세 도시인 낙양, 정주, 개봉.

여씨상회는 낙양의 값싼 비단을 다루는 중소상회 중 한 곳이고, 태가장은 정주의 흔한 장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백송학관은 낙향한 한림원 학사가 세운 학관이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신분일 뿐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황실 아니, 황제가 심어둔 세력이란 점이다.

정확히는 황제의 밀명을 받은 천위령의 주도하에 숨겨진 힘으로 만들어졌다.

여씨상회, 태가장 그리고 백송학관의 수뇌부는 퇴임한 관부, 군부 그리고 황실의 고수들이었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황인 만큼 황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무림의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편법으로 황실과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세력들을 만들었다. 실제로 그들은 독자적인 세력이었다.

황제의 밀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런 집단이 하남성에만 존재할 리 없었다. 무림의 눈에 띄지 않을 작은 수준으로 각 성(省)에 존재했다.

그들이 무림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순 없으나 만약은 대비할 수 있었다.

“그들을 그 아이의 손에 쥐어주면 어찌될 것 같은가?”

“폐하의 뜻이라면…….”

황제의 숨은 힘을 외인에게 넘겨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위령은 황제의 뜻을 따르겠단 대답뿐이다.

그런 그를 보며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천위령주는 이래야 하기 때문이다.

전임 천위령주가 이러지 못했기에 교체된 것이다.

“아닐세. 아직은… 말이야.”

황제는 ‘아직’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 말은 언젠가는 넘겨줄 수도 있단 뜻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아닐 수도 있었다.

황제는 이현성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숨겨진 힘을 넘겨주려는 것이 아니다.

‘안에서 흔들지 못하면 밖에서 흔들면 되겠지.’

태태감이 더 이상 틈을 보이지 않는다.

적당히 꼬리를 자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허나 황제는 분명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무림세력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흔들 수는 없으니 이현성을 통해서 흔들려는 것이다.

그게 일어탁수(一魚濁水)로 그칠지,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수를 쓰지 않는다면 분명 등에 칼이 꽂힐 때까지 적의 수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쉽게 칼을 전하지 않았다.

그 칼을 거꾸로 쥘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지켜봐 주지. 내 칼을 쥘 자격이 있는지.’

* * *

“이곳이 어디요?”

황제가 칼을 쥐어 주지 않아도 이현성에겐 이미 칼이 있었다. 아직 담금질이 끝나지 않아 미흡했지만, 그만을 위한 칼, 흑룡대가 있었다. 흑룡대는 어둠을 틈타 비밀리에 모종의 장소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현성이 보냈다는 의문의 존재를 따라서 빙글빙글 돌아서 왔기 때문이다. 산을 타고 이동했고, 마차를 타고 움직였으며, 다시 배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며칠을 걸쳐서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대들은 알 자격이 없으나… 귀인(貴人)을 생각해서 알려주마. 본림의 양성소 중 하나다.”

“본림?”

“거기까지! 그 이상은 알려 하지 마라. 그대들의 명은 이곳에서 강해지는 것이지,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물론이오.”

이곳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림자 마을로, 귀림의 살수 양성소 중 한 곳이었다.

당연히 외인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곳이었지만, 귀왕의 특명으로 인해 처음으로 외인에게 개방되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