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묵장진 본인은 물론 흑룡당 전원이 자신을 따르겠다는 결말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굳건한 그의 눈빛에 이현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내겐 짐일 뿐이다.”
“강해지겠습니다. 주군의 짐이 되지 않게… 더 이상 버림받고 싶지 않습니다.”
“……!!”
순간 이현성은 한 대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그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결정일 뿐이다. 그들은 버림받은 것으로 받아들였으니까.
그들을 보며 이현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환야(幻夜)와 사자도패(獅子刀覇)란 별호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천사교와 천웅방의 고수들이 아닙니까? 주군.”
“며칠 전 본방에서 있었던 소란, 그들의 소행이다.”
“예?!”
이현성의 말에 묵장진은 물론 모유환 역시 기겁했다.
아무리 흑도 바닥에 있다고 한들 그들의 별호를 모를 리 없다. 그들을 보며 이현성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날 원하는 자들 그리고 날 노리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그러니 왜 너희들을 두고 가는지 이해하겠지.”
“…….”
묵장진은 말을 잃었다.
이현성의 말대로 그런 괴물들이 상대라면 자신들은 시간을 끄는 역할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짐일 뿐이다.
묵장진은 이를 악물었다.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아니, 저희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불가(不可).”
이현성은 단호하게 묵장진의 청을 묵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장진은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현성은 내색하지 않을 뿐 기뻤다.
그간의 북경 생활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란 증거였다.
그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을 보낼 테니 그를 따라가라. 자네를 그리고 흑룡당 아니, 흑룡대를 강하게 만들어줄 거다.”
“그 말씀은…….”
“나에게 짐이 되지 않겠단 말, 믿어보지.”
“감사합니다! 주군!”
이날 이현성의 칼, 흑룡대(黑龍隊)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현성은 묵장진의 곁에 부복한 모유환을 바라봤다.
“자네의 용무는 뭔가?”
“절 책임지십시오.”
“뭐?”
모유환의 뜬금없는 말에 이현성은 순간 당황했다.
그를 보며 모유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다른 당주들처럼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 고수들을 부릴 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방주님께서 절 거두셨으니 끝까지 책임져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모유환의 황당한 말에 이현성은 차갑게 대응했다.
그럼에도 모유환은 당황하지 않고 소신 있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방주님께서 제 주군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군이라.”
방주(幇主)와 주군(主君)은 둘 다 이현성을 지칭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주라 칭할 때는 방파의 주인을 따른다는 뜻이지만, 주군이라고 부를 때는 신하로서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단 뜻이다.
“모유환.”
“예. 주군.”
차갑게 가라앉은 이현성의 목소리에 모유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귓가에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방에 오기 전에 암상단(暗商團)의 총관이었다지?”
“예? 예. 그렇습니다. 주군.”
“네게도 사람을 보내줄 테니 정보조직을 만들어라.”
“가, 감사합니다!”
무인만으로 혈천을 상대할 순 없었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골고루 갖추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정보였다.
쾌활림을 거두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을 보며 이현성은 한숨이 나왔다.
‘하아… 거참, 다시 부탁해야 하나.’
* * *
“귀림전을 이렇게 빨리 사용할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말이오.”
이현성은 동전 아니, 귀림전을 내놓았다.
귀림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흑룡당 아니, 흑룡대의 수련을 도와달란 말씀이시죠?”
“그렇소. 무공을 가르쳐달란 말은 아니오. 귀림의 혹독한 훈련을 받을 기회를 주셨으면 하오.”
이현성은 흑룡대를 살수로 키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귀림에 부탁하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였다.
살수로서 명성 높은 귀림의 혹독한 훈련이 흑룡대를 정신부터 단련시켜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본림의 살수들도 무인들을 상대로 살법을 시험할 기회가 될 테니 문제가 될 것은 없어요.”
“감사하오. 그리고…….”
“쾌활림을 내어드릴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소.”
이현성은 흑룡대만 아니라 모유환 역시 귀림에 부탁을 했다. 맨손으로 정보조직을 세우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금이 필요하다.
허나 약간의 도움만 줄 수 있다면 수고가 확 줄어든다.
그렇기에 이현성은 염치가 없지만 귀림에 청했다.
“어차피 저희도 쾌활림에 큰 신경을 쓸 수 없어요. 어차피 귀인께 드렸잖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라면…….”
이현성의 물음에 야래향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가 조금 전 이현성에 건넨 귀림전을 반으로 쪼개 그중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이 반쪽을 건넬 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세요.”
“어떤 소원이든 말이오?”
“안 되나요?”
“으음. 아니오. 야 소저 아니, 귀왕. 귀왕의 소원이라면 어찌 거부할 수 있겠소.”
그녀가 어떤 소원을 말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수락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성은 수락했다.
왠지 그녀라면 무리한 소원을 말하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래향은 흔쾌히 수락한 이현성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해요. 그런데 언제 떠나시나요?”
“이틀 후에 떠날 생각이오.”
“그러시군요. 조심히 가세요.”
‘기다릴게요. 부디 무사하셔요.’
그녀는 이현성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파사세까지 움직인 상황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야래향은 귀왕, 귀림의 주인이다. 귀림의 그늘 안에 살고 있는 수백이나 되는 식솔들의 운명까지 걸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무사귀환을 빌 뿐이다.
흑룡당과 모유환의 일을 마친 이현성은 마지막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문가장으로 돌아왔다.
* * *
“떠, 떠나신다고요!”
“혀, 형님. 도대체 왜…….”
문교교, 문태규 남매는 이현성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떠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미 그들에게 이현성은 또 다른 가족이었다.
이현성이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천하를 배우기 위함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으세요. 오라버니?”
“마, 맞습니다. 이곳에서도…….”
이현성의 현 상황을 모르는 두 사람은 떠나려는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들의 간곡한 청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파의 세력이든가, 웬만한 사파의 세력이라면 굳이 떠날 생각까지 안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사파사세였다. 천사교와 천웅방이 그를 원한 이상 북경은 결코 안전지대라고 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문씨 남매까지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성을 떠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밝힐 순 없었다. 모르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낫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젠가 돌아올 거란다. 그러니 이번에는 날 보내줄 수 없겠니.”
“하,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이현성의 눈빛에 문태규는 말을 더듬었다. 설득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의 곁에 있던 문교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를 보며 문태규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때 문교교의 입이 열렸다.
“거짓말쟁이.”
“교, 교 누이. 형님께 무슨 말버릇이세요.”
“곁에 있어준다고 했으면서… 오라버니는 거짓말쟁이야!”
결국 화를 낸 문교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에 문태규는 안절부절못했다. 이현성은 그런 그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교교를 위로해주거라.”
“형님.”
지금은 누이인 문교교를 위로해주는 것이 먼저라고 느낀 문태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라갔다.
남매의 뒷모습에 이현성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안하구나. 그 아이들은 잘 있는지 모르겠네.”
* * *
“현아… 꼭 가야겠어?”
“미안해. 은설 누이. 꼭 확인해봐야 합니다.”
천중산장(天中山莊)의 입구는 이른 시간부터 부산스러웠다. 장주의 조카이자 제자인 한호현이 장원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인이 무척 안타까워했다.
“설아. 현이는 곧 돌아올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아버지… 꼭 그가 현이의 큰오라버니란 보장이 없잖아요.”
“그러니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더냐. 현이를 믿거라.”
한호현이 먼 길을 떠나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이다. 한호현을 바라보며 청초한 미색의 소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현아. 꼭 돌아와야 해.”
한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형님이 맞는지만 확인하고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누이.”
“꼭이야! 꼭!”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었다. 허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천중산장의 장주인 한승의 여식 한은성.
한승의 제자이자 조카인 한호현. 그러나 진짜 이름은 이현호. 십일 년 전, 가족 중 유일하게 천중산장에 온 이현성의 막냇동생이 바로 그였다.
이현성의 소문이 퍼지면서 한승의 귀까지 들어갔다. 한승은 천중산장에 기거하면서 반 은거생활을 했으나, 그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인물이 있었기에 이현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종리 아우. 현이를 부탁하네.”
“형님. 제게도 조카가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부님…….”
“알았다, 알았어. 제 동생은 끔찍이도 생각하네. 이 사부는 걱정도 안 되냐?”
천중산장을 떠나는 사람은 이현호 한명이 아니었다.
다른 중년인과 함께 길을 떠난다.
이현호의 재능은 인정할 만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16살짜리 소년이었다.
그를 북경까지 홀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한승의 의제이자, 한은설의 사부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의독선생(醫毒先生) 종리우. 한승의 의숙인 독의(毒醫)의 제자였다. 독공보다는 의술이 더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독공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한은설의 의술 사부는 그가 아닌 독의여야 했다.
그러나 방랑벽이 있던 독의는 그녀의 사부 자리를 제자에게 넘겨버렸다. 덕분에 수년 전부터 한은설은 종리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은 아예 그의 제자가 되었다.
종리우는 한은설이 어느 정도 의술을 익히자, 간혹 산 아래로 내려가서 민초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그것이 의술을 익힌 자의 의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현성에 대한 소식도 그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그럴 리가요. 사부님께서 워낙 대단하신 분이니까…….”
―네 서방 무사히 데려올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종리우의 전음에 한은설의 얼굴이 빨개졌다.
눈치 빠른 종리우는 한은설이 이현호를 동생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이건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눈치가 없는 한승과 이현호는 모르는.
그때 한승 역시 이현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사히 돌아오거라. 그때 본격적인 비전을 전수해주마.
‘사부님…….’
한승은 딸의 마음은 아직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십일 년간 곁에 두면서 이현성의 무재만 아니라 됨됨이 역시 봐왔다.
귀환살수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