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직 은혜도 다 갚지 못했소.”
“아닙니다. 대인께선 이미 다 갚으셨습니다.”
“허나 아직 대협의 가족들을…….”
“괜찮습니다.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요.”
이현성의 입장에서는 아직 가족들을 찾아내지 못한 게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각대학사가 손을 썼는데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가족들을 모두 죽인 후 혈천의 추살조가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거나, 반대로 살아남은 가족이 흔적을 지운 채 잘 숨어 있었다는 뜻이다.
상대가 혈천인만큼 후자보단 전자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일말의 가능성마저 버리진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였나 봅니다.”
“그렇구려.”
문종학도 귀가 있기에 최근 장원을 찾는 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림인들이었고, 그 목적이 이현성이었단 것도 듣긴 했다. 다만 다 거절했다는 것 역시 들었기에 안심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느 가문으로 가실 생각이오?”
“특정 가문에 가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참에 유람을 떠날 생각입니다.”
사파사세 등 무림의 사정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내각대학사, 황실의 사람이기에 더 이상 얽혀서 좋을 것은 없었다. 문종학은 물론 문씨 남매에게도.
그렇기에 이현성은 최대한 말을 아끼려고 했다. 문종학은 그런 이현성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에게 낫기 때문이다.
“그렇구려… 혹시 하남으로 가실 생각이라면 소개장을 써드리겠소. 동문수학했던 동문인데, 가족을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오.”
“감사합니다. 소개장이라고 하시니 드릴 청이 있습니다. 한 사내를 천거해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묵장진을 부탁하려는 것이다.
위표에게 소개장을 부탁하려고 했으나, 그보다는 내각대학사의 소개장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매관매직 등을 혐오하는 문종학이었기에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단칼에 잘랐을 것이나 이현성의 말이기에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어떤 자요?”
“전직 무관으로, 그의 부친이 줄을 잘못 잡아 퇴역한 자입니다. 썩히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인재라서…….”
“복직은 약속할 수 없으나 소개장 정도는 써드리겠소.”
“감사합니다. 대인.”
그의 가문을 몰락시킨 권력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나 내각대학사의 소개장이라면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방해만 없다면 묵장진은 분명 날개를 활짝 펼칠 수 있었다. 실제로 회귀 전, 그는 어느 고관의 자제를 구해준 덕분에 다시 무관이 되었고 장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렇기에 이현성 역시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아이들에게는 언질은 하셨소?”
“아직…….”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다.
그걸 알지만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간 너무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상처 입지 말아야 할 텐데…….’
* * *
“…….”
묵장진은 착잡한 눈으로 서신을 내려다봤다.
흑룡방주가 직접 그에게 준 소개장이었다.
명예롭지 못하게 퇴역해야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명예를 되찾고 싶은 마음 역시 떨칠 수 없었다.
“다시 장수가 될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후…….”
예전이었다면 고민할 것도 아닌 기회. 자신은 물론 선친 그리고 가문의 불명예를 회복할 기회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갈등이 되었다. 다시 무관이, 전장의 장수가 된다면 주군인 흑룡방주와 연이 끊긴다.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그의 뜻이 무림에 있음을. 그 토대를 자신과 흑룡당으로 삼으려는 것 역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사혼팔도(死魂八刀), 진천보법(振天步法) 그리고 일원심법(一元心法)을 전수한 이유일 테니까.
고민을 하는 자는 그만이 아니었다.
“당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궁 조장? 들어오게.”
그를 찾아온 사람은 흑룡당의 조장이었다.
정확히는 조장‘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묵장진은 나직하게 말했다.
“무슨 일들인가.”
“이야기 들었습니다. 본방이 해체된다는 것을…….”
“그렇군.”
하나같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을 보며 묵장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수십명이 다른 당으로 보직이동을 하거나 흑룡방에서 나갔다. 이들 역시 같은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주님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난 전직 무관일세. 주군께서 내게 다시 무관이 될 기회를 주신다면서 소개장을 주셨네.”
묵장진의 말에 조장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이로써 흑룡방은 물론 흑룡당 역시 해체가 결정된 상황이다.
그때 선임조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주님 아니, 주군을 죽을 때까지 따르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나 역시 주군을 따르고 싶다. 허나 그분의 뜻은 다르신 듯하네.”
묵장진은 씁쓸했다.
이번만은 진정한 주군을 만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관이 아닌 주군으로 모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묵장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자네들은… 어쩔 생각인가?”
“주군을 따를 생각입니다.”
“주군께선…….”
“그렇다고 다시 옛날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흠칫!
묵장진은 단호한 선임조장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더 이상 흑도의 쓰레기들이 아니었다.
눈빛이 살아 있었다. 어느새 그들 모두가 무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들에게 채찍질했던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뤄진 성과였다.
“자네들… 변했군.”
“당주님 역시 변하신 것 같습니다.”
선임조장의 말에 묵장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불쾌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내치신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의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자네들만의 생각인가?”
“모두의 생각입니다. 당주님.”
묵장진은 눈앞에 있는 서신 아니, 소개장을 바라봤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멈추었다.
부욱! 부욱!
이현성이 준 소개장을 과감하게 찢어버렸다.
그를 다시 무관으로 만들어줄 기회를 버린 것이다.
묵장진, 그의 눈빛이 바뀌어져 있었다.
“언제 떠날지 모른다. 서둘러 채비들 해둬라.”
“존명!”
그 역시 결심했다.
이번에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고. 주군의 명을 거역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흑룡당의 조장들이 돌아간 후 묵장진은 또 다른 손님을 맞이했다.
“묵 당주. 안에 있소. 나…….”
* * *
“신룡유희(神龍遊戱)!”
부드러우면서 강인함이 담긴 검초는 척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하북팽가에서 이현성의 검무를 본 후 얻은 깨달음을 참고하다 보니 신룡검법의 검초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그 후 틈틈이 다듬은 결과물이 바로 신룡유희라는 검초였다. 아직 완벽하지 않으나 신룡사검을 오검으로 바꾸게 되었으니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백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검을 거둔 유백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하…….”
심기가 굳고 진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예상한 것 이상으로 고립무원이었다. 하북성을 떠나 사천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받은 당천수의 냉대.
물론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허나 당가의 혈족들만 아니라 호위무사 등 사천당가의 하급무사들까지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
흡사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대했다. 그런 무시는 사천당가에 온 이후 나아지긴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덕분에 천하의 유백조차 서서히 지쳐갔다.
십여 년간 주변의 질시와 고독감조차 버텨낸 그도 더 이상은 힘들었다.
“많이 힘들더냐?”
흠칫!
나름 절정을 바라보고 있는 유백이다.
그런 그가 누군가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를 찾아온 노인은 사천무림의 전설이자 사천당가의 절대자 독종(毒宗) 당철영이었다. 그리고 사천당가에서 유일하게 유백에게 선의를 가진 자였다.
“속하 유백이, 가주님을 뵙습니다.”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늙은 생강이 맵다던가.
당철영,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유백이 세가에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들이 원석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나선다면 더욱 관계가 어긋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 좋다.”
“속하는…….”
신룡유가가 무너진 후 그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사라졌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유백은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겠단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괴로웠고, 정신적으로도 이미 지친 상태였다.
“그 말괄량이를 구해준 것으로, 은혜는 이미 다 갚았네. 그러니 나 때문에 남아 있을 필요 없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결국 유백은 결정을 내렸다.
사천당가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로.
꼭 주변의 냉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곁을 지키던 친우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유백이 물러난 후 당철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호되게 혼날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들.”
당대 사천당가. 그야말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비록 화경에 오르지 못했으나 화경의 고수까지도 죽일 수 있다는 독의 조종. 당철영이 십정(十正)에 꼽히지 못했음에도 사천당가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이유였다.
허나 그로 인한 폐해 역시 생겨났다.
각자의 실력이 아닌 자신(독종)과 가문의 위명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상황. 이를 너무 늦게 깨달은 당철영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해도 본가를 업신여긴다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아무리 그가 거인(巨人)이더라도 결국 당가인이었다.
사천당가의 이름을 우습게 만든 이현성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사천당가가 왜 사천당가인지를 알려줘야 했다.
“본가를 무시한 대가가 뭔지 알려주거라.”
“존명!”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취를 감추었다.
가주의 밀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악연의 고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출도
“너희들이 어떻게…….”
떠날 준비를 하던 이현성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방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군.”
“…확신은 없었습니다. 방주님.”
그들은 바로 흑룡방의 당주인 모유환과 묵장진이었다.
이현성은 흑룡방주로 활동할 때는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그의 진면목을 아는 자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자신을 찾아 문가장까지 방문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때 묵장진이 부복했다.
“주군. 따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소개장을 줬을 텐데.”
“속하 이하, 흑룡당 전원이 주군의 뒤를 따를 준비를 마쳤습니다.”
“…….”
부복한 묵장진의 말에 이현성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귀환살수
— 문지기 —